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10주년 심포지엄
“건강하게 여유롭게 즐겁게 일하자”
안전보건활동 전 산업으로 외연 확장 …사회적 약자 보호·연대는 과제
조현미 기자 ssal@labortoday.co.kr 09-12-04
“이제 노동의 가치가 달라져야 한다. 임금이 아닌 건강으로, 장시간 노동이 아닌 가족의 화목과 여유로운 삶으로, 야간근무가 아닌 밤에도 일정한 숙면을 취할 수 있는 노동으로 노동의 기준과 가치를 바꿔야 한다.”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소장 임상혁)가 열 돌을 맞아 3일 오후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공연장에서 지난 10년의 한국사회 안전보건을 평가하고 향후 과제를 토론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2대 연구소 소장인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지난 10년간 정부의 산업안전보건 정책을 평가했고, 임상혁 소장이 안전보건운동 평가와 함께 과제를 제시했다.
임상혁 소장은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일하는 것’이 지난 시기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주요한 의제였다면 이제는 ‘건강하게 여유롭게 즐겁게 일하는 것’으로 의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위기와 규제완화
지난 10년 동안 발생했던 굵직한 안전보건 관련 사건들로는 국민의 정부 시절 산재노동자 이상관씨 자살(99년)·의사파업(2000년)·근골격계질환 실태조사(2001년)·근골격계질환 집단요양투쟁(2002년), 참여정부 시절 집단 따돌림에 의한 청구성심병원 노동자 정신질환·대구지하철 화재사고(2003년)·지하철 공황장애 사건(2004년)·노말헥산중독(2005년)·디메틸포름아미드 중독 사망사건(2006년)·2007년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 이명박 정부 들어 한국타이어 돌연사 사건(2008년)·충남 석면광산 석면폐 발생 사건(2009년) 등으로 요약된다.
백도명 교수는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주로 노동강도와 함께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며 “대기업과 여러 주요 산업의 구조조정을 통해 사회적 이해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매우 급격하게 재편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격렬하게 표출되는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산재예방 5개년 계획’ 한계
백 교수는 참여정부 시절을 평가하면서 “집단 따돌림이나 업무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정신질환을 비롯한 신종질환의 등장과 함께 직업성 암, 화학물질중독 발생 등을 비롯한 기존 업무상질병 관리체계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였다”고 밝혔다. 백 교수는 “사회적 변화의 일환으로 업무상 요인으로 인한 정신질환, 특히 스트레스로 인한 질환이 처음으로 부각됐다”며 “기존의 관리체계가 제대로 가동됐어야 함에도 불가하고 화학물질 중독사건들과 직업성 암 발생 사건 등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됐다”고 덧붙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94년 성수대교가 붕괴하고 이듬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정부는 96년 산업안전선진화 3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노동부는 99년 신산업안전선진화 기획단을 꾸려 ‘신산업선진화 3개년 계획’을 마련했다가 2000년 다시 ‘1차 산재예방 5개년 계획’으로 바꿨다. 외환위기 시기에 실시된 규제완화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백 교수는 “결국 내용은 노동부의 행정을 위한 행정, 사업을 위한 사업의 확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근골격계질환 사업은 안전보건활동 ‘전환점’
임상혁 소장은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구조조정 저지 투쟁으로 집중되기 시작한 노조운동은 상대적으로 노동자 건강 문제를 쉽게 제기하기 어려웠다”면서도 “2000년대 초반 들어 금속노동자를 중심으로 근골격계질환 투쟁이 사업장 단위로 확산돼 2002년 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임 소장은 △금속노동자에서 전체 노동자로 안전보건활동 외연 확대 △근골격계질환으로 대표되는 안전보건활동의 질적변환 등을 성과로 꼽으면서도, △줄어들지 않는 산재율 △정착되지 않은 노조의 안전보건담당부서 활동 △미조직 사업장의 안전보건활동 △연대활동 위축 △정부와 사업주의 정책에 대한 대응 미비 등을 한계로 지적했다.
주영수 한림대 의대 교수(산업의학과·노동건강연대 공동대표)는 “산재요양 승인에 집중하다 보니 ‘산재요양합리화’라는 정부 정책에 대한 대응논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며 “산재보험 예방·치료·재활이라는 프레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검토를 통해 선제적으로 산재보험제도 개혁을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전보건활동 ‘사회의제’로 확장해야
김은아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직업병센터 소장은 “선도적으로 우리 사회의 근로자 건강 문제를 이끌어 가는 입장에서 산업안전보건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지평을 넓혀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소외된 여성이나 농업근로자처럼 그동안 관리하지 못하고 연구하지 못했던 의제를 지속적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산업안전보건 영역에서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검진도 물리·화학적 직업병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앞으로 정책의 큰 틀을 바꿔야 하며, 연구소가 그런 제안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기홍 한국노총 안전보건연구소 국장은 “한국노총도 나름대로 안전보건 활동을 했지만 연대를 많이 못한 것은 반성할 부분”이라며 “노동계가 정부 정책을 주도하기 보다는 정책이 나오거나 사용자단체의 규제완화 방안이 나왔을 때 방어하기에 급급했다”고 지적했다. 조 국장은 “노동안전보건단체 활동가들도 많이 지쳐 있고 재정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단체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재정을 확충하고 활동가를 양성하는 기제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사업장·미조직 사업장은 과제
임 소장은 “현재의 안전보건운동은 노동운동이 되지 못하고 노조운동이 됐다”며 “미조직노동자·중소영세사업장 종사자·비정규직·이주노동자·장애노동자 등의 노동조건이 열악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면서도 이들이 직면한 안전보건 문제는 ‘문제’로 등장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김은기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국장은 “요즘 상황을 보면 노동부는 이런저런 사업을 한다고 시늉을 하는데 실제 사업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며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가 산재보험 민영화를 추진하는 등 현 정권이 ‘실용’을 넘어 원칙마저 무너뜨리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김 국장은 “산재보험 제도개선이 필요한 상황이어서 민주노총이 연구팀을 준비하고 있다”며 “내년에는 건설·이주·여성·비정규직 등 취약노동자 건강권 보호를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원진레이온 직업병 환자들과 보건의료사회단체들의 투쟁으로 1993년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이 세워졌다. 재단은 직업병 노동자를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99년 6월 원진레이온 직업병 노동자들이 받은 보상금과 공장매각대금 250억원을 바탕으로 구리시 인창동에 원진녹색병원이 개원했다.
이때 병원 산하에 노동자 직업병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노동환경건강연구소도 설립됐다. 이황화탄소 중독증은 완치가 어렵기 때문에 이들을 제대로 치료하기 위한 종합병원이 필요했다. 이에 재단은 2003년 서울 면목동에 녹색병원을 개원한다.
현재 16명의 석·박사가 포진돼 있는 연구소는 네 분야의 연구팀을 운영하고 있다. 직업성 근골격계질환을 발생시키는 작업장의 문제를 찾아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의학적 조치를 연구하는 직업성근골격계질환연구센터, 작업환경을 측정하고 환경위험평가를 수행하는 산업위생실, 역학조사와 특수건강검진을 수행하는 산업의학실, 각 연구소에서 수행한 연구와 정책을 작업장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는 교육센터가 바로 그것이다. 조현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