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후보의 눈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고] ‘벼랑 끝’ 진폐환자들…”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

2007-11-13 오전 11:22:31

‘산업폐기물’.

자신이 사람이 아닌 쓰다 버린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고 외치는 이의 심정은 어떨까. 걷기조차 힘든 몸에 쇳소리같은 기침이 쏟아져나오는데도 ‘정상’ 판정을 받아 입원조차 못하는 이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오갈까. 이들은 바로 탄광에서 일을 하다 진폐증을 얻고도 입원 요양 판정을 받지 못해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재가 진폐환자들이다.

한국진폐재해자협회는 재가 진폐환자들이 전국 3만여 명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이중 70% 이상이 과거 탄광에서 일했던 광부들이다. 광산에서 발생하는 탄가루가 숨을 쉴 때마다 코와 기관지를 통해 폐에 들어가 점점 폐를 굳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중 병원에서 입원 요양 혜택을 받는 사람은 3500명에 불과하다. 9가지의 합병증이 있어야만 입원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입원하지 못한 재가 환자들에게는 단 한 푼의 생활비도 지원되지 않는다. 노동부는 2001년 처우 개선을 약속했으나 6년째 이행되지 않고 있다.

참다 못한 이들이 결국 온몸을 던져 그 고통을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지난달 24일부터 현재까지 진폐재해자협회 회원들은 강원도 정선 고한읍 강원랜드 진입구에 천막을 치고 21일째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실 진폐환자와 같은 산업재해의 비극은 지금도 여전히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5월 이후 15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한국타이어 대전·금산 공장은 비극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중 7명이 심장질환으로 돌연사하고 폐암, 뇌수막종양 등 암으로 숨진 이가 5명인데도 한국타이어 측은 “작업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명할 뿐이다.

산업폐기물이 아닌 인간으로 대접해달라는 상식적이면서도 서글픈 요구를 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국진폐재해자협회의 성희직 투쟁위원장이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21일째 단식을 벌이고 있는 그는 “지난 대선 때 진폐병원을 방문한 노무현 후보의 눈물을 기억하고 있다”며 “그 눈물이 ‘정치인 노무현’의 득표수단이 아니라 ‘인간 노무현’의 진정성이었음을 믿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껏 네 차례에 걸쳐 서울 광화문, 강원도 태백, 정선 일대에서 궐기대회를 벌인 진폐환자들은 오는 15일엔 10여 명이 삭발식을, 22일 1000여 명이 강원랜드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질 예정이다. <편집자>

‘청문회스타’에서 ‘바보 노무현’으로 애칭이 바뀐 노무현후보가 2002년 12월 12일 정선군 사북의 한 진폐병원을 방문하였다. 바쁜 대선 일정 탓에 강원도에선 유일한 방문지가 진폐병원이었다. 병원엔 약 30분 정도 머물며 진폐환자들을 격려하였다.

중증병실을 둘러보던 노후보가 코에 산소호스를 연결한 한 진폐환자의 손을 붙잡고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건강하세요. 제가 당선되면 진폐환자 여러분의 처우개선에 힘쓸게요….” 그런 노 후보의 옆엔 기호 2번 어깨띠를 둘러맨 내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원도 선대본부 유세위원장을 맡았던 내게 ‘사북진폐병원 방문 때 안내를 맡아 달라’는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한 인터넷신문에 사진으로 실렸고, 대통령 당선 후 그 사진은 오래도록 우리 집 거실에 자랑스레 걸려 있었다.

가래 끓는 목소리로 토해내는 분노를 아는가

그로부터 5년이 흐른 2007년 11월 7일 오후. 태백시 시민공원인 황지연못엔 ‘사생결단’, ‘노동부 규탄’, ‘생계비 확보’란 머리띠를 질끈 맨 노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국진폐재해자협회 회원 1000여 명이 ‘재가진폐환자 생존권확보 궐기대회’를 가진 것이다. 뼈마디만 남은 야윈 몸에 환자복을 걸친 진폐환자들. 작업복에 안전등, 안전모까지 착용한 광부복장으로 참석한 사람들도 상당했다.

주응환 회장의 대회사에 이어 투쟁위원장을 맡은 내가 혈서를 써내려갔다. ‘사생결단, 진폐환자들에게 희망을!’ ‘막장정신, 죽음도 두렵지 않다’ 그렇게라도 세상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재가(在家)진폐환자들 가슴에 ‘희망’ 한 줌씩 나누어주고 싶었다.

잠시 후 거리행진 때는 200여장의 연탄을 깨고 그 위에 갱목시공도 하여 시내거리엔 탄광막장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무기한 단식투쟁 15일째인 나는 진폐환자 한 사람과 갱목을 지고 막장으로 오르는 모습을 재현해보였다. 광부들의 처절하고 힘든 막장작업을 표현한 퍼포먼스다.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 “진폐환자 다 죽이는 노동부를 규탄한다!” 그렁그렁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외치는 구호가 거리를 울렸다.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분노가 가득담긴 핏빛 절규였다.

어물쩍 폐기된 정책…’이유있는’ 사생결단

광산에서 10~20년 정도 일하다보면 훈장처럼 주어지는 직업병이 진폐증이다. 미세한 석탄먼지 돌가루먼지가 폐에 박혀 걸리게 되는 진폐증은 불치병이다. 약 3만여 명쯤 되는 진폐환자들 중 병원에 입원요양혜택을 받는 사람은 3천 5백 명에 불과하다. 입원대상이 되려면 폐결핵, 폐기종, 기관지 확장증 등 9가지 ‘합병증’이 있어야한다. 이들에겐 다양한 치료혜택과 함께 월평균 150~250만 원 수준의 ‘휴업급여’가 주어진다.

하지만 합병증이 없거나 합병증이 있어도 경미한 사람들에겐 치료혜택도 전무하고 단 한 푼의 생활비도 지원되지 않는다. 입원요양환자와 재가환자간의 각종혜택은 그렇게 ‘전부’ 아니면 ‘전무’로 극명하게 나뉜다. 이런 ‘양극화’가 진폐환자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또, 산재브로커가 개입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주무부서인 노동부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노동부는 2001년 9월15일 보도자료를 통해 ‘진폐환자보호 종합대책 마련’을 발표하였다. 총 6가지 종합대책 중엔 재가진폐환자 ‘생활보조비 지원’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입원환자와 재가환자간의 보험급여의 형평성이 지나치게 결여되어 있고…’라는 이유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종합대책은 ‘하반기에 법령개정 후 2002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노무현대통령 취임 이후인 2004년에 이 조항은 진폐환자들도 모르게 어물쩍 폐기해 버렸다. 진폐환자들이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며 이유 있는 항변을 하고 사생결단, 대정부투쟁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화석’처럼 굳고 있는 환자들 가슴에 ‘희망’을 안겨라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을 때 가장 많은 박수를 보내고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인 소외계층이라 할 수 있다. 정치인 노무현이 보여준 원칙과 신념이 그러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대중정부 때 약속한 진폐환자보호 종합대책을 노무현정부에서 폐기해버린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신이다.

나는 지난 대선 때 진폐병원을 방문한 노무현 후보의 눈물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 눈물이 ‘정치인 노무현’의 득표수단이 아니라 ‘인간 노무현’의 진정성이었음을 믿고 싶다. 그렇다면 그때의 약속과 눈물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폐기해버린 ‘생계비지원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점점 ‘화석’처럼 굳어져가는 진폐환자들 가슴에 그렇게 ‘희망’을 안겨주어야 한다. 이는 대통령의 선물이 아니라 약속이다. 대통령임기를 마치는 날 진폐환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또다시 혈서를 쓰며

– 성 희 직

‘탄광노동자만세!’
불덩어리 가슴으로 그렇게 혈서를 썼다
작업용 도끼에 잘려나간 두 개의 손가락에선
연신 검붉은 장미꽃잎이 떨어졌다.
5만 광부들에 ‘희망’ 한 줌씩 나눠주고 싶었다.

그로부터 17년 세월이 흘렀다
광부에서 진폐증환자로 이름이 바뀐 사람들
여전히 가슴엔 절망뿐이란다 분노뿐이란다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
어제의 산업전사들 절규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21세기 문명사회에도 인간제물이 필요하단 말인가!
내 손가락에서 또 다시 장미꽃이 가득 피어나면
돌덩어리로 굳어져가는 진폐증환자들 가슴이
동해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팔뚝만한 물고기처럼
그렇게 펄떡일 수 있을까 싱싱한 피 돌게 할 수 있을까

태백 황지연못에서 가진 생존권확보총궐기대회
또 다시 내 손가락에선 무수한 장미꽃잎 떨어지고
꽃잎으로 수를 놓듯 써내려간 사. 생. 결. 단
점점 화석으로 변해가는 진폐증환자들 가슴에
그렇게라도 참다운 희망 한줌씩 나눠주고 싶었다.

성희직/한국진폐재해자협회 후원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