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환자 당연지정제, “제2성모병원 사태”
대형종합병원 불만 팽배…”과태료 내고 환자 피하고 싶다”
메디컬투제이 11월 28일
내년 7월부터 서울대병원 등 종합전문요양기관에서 모든 산재환자가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험법)’이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 인해 대형 종합병원에서 양질의 진료를 받고 싶었으나 소위 빅5 대형병원이 이를 거부, 불만이 끊이지 않았던 문제가 산재보험법 상 ‘종합전문요양기관 당연지정제(제43조제1항제2호)’로 일단락된 셈이다.
그러나 이들 빅5 병원의 속내를 보면 “마지 못해 산재환자를 진료를 하는 꼴”이어서, 내년 7월 제도가 시행되면 산재환자와 병원간 충돌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
◇빅5 병원, 과태료 내고 거부하고 싶은 심정
실제로 병원협회와 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강남성모·서울아산병원 등 빅5 대학병원은 이 당연지정제 법제화를 놓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혀왔다.
병협 측은 “산재보험은 의료기관에 재정적·제도적 지원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의료기관을 강제로 지정, 운영토록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병협 관계자는 “그동안 산재요양기관 지정이 되지 않은 해당 5개 대학병원은 병상가동률이 평균 97%선인데 재원일수가 건강보험환자의 3~4배에 이르는 산재환자를 입원시키면 중증환자 진료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빅5병원 가운데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산재환자 당연지정제가 법으로 통과돼 매우 당황스럽다”며 “의료기관으로서 환자를 거부할 수는 없지만, 과태료 처벌을 받더라도 환자를 피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털어놨다.
산재환자의 치료 권리를 인정하지만, 넘쳐나는 급성기 일반 환자들의 수요와 늘 부족한 병상에 장기 요양이 필요한 산재환자까지 들어오게 되면 병원은 오히려 수익도 떨어지고 진료의 질이 낮아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부는 산재환자에게 인력과 시설이 우수한 의료기관의 접근을 못하도록 하는 것은 형평성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며 ‘당연지정제’ 법제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노동부 산재보험혁신팀 관계자는 “빅5 대학병원도 수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사회적으로 공적인 의료서비스로 기여해야 할 책임도 있다”며 “열심히 일 하다 병에 걸린 산재환자도 좋은시설에서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이를 거부하면 역차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산재환자 당연지정제, 제2의 성모병원사태 초래?
문제는 이렇게 병원과 정부 간 입장 차이가 첨예한 상황에서 결국 그 피해가 산재환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병원 측이 산재환자를 일단 꺼리고 가급적 치료를 거부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산재환자들이 치료받을 권리를 주장하더라도 양질의 진료가 이뤄질 지가 의문이라는 것.
때문에 이를 놓고 일각에서 최선의 치료냐, 방어진료냐를 놓고 논란이 돼 백혈병환우회의 고발까지 이어졌던 성모병원 사태가 재발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 병원관계자는 “빅5 병원에서 양질의 진료를 받으려는 산재환자들은 줄을 설 것”이라며 “그러나 수익성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최선의 진료를 하지 않는 병원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환자는 최선의 치료를 위해 자신이 진료비를 감당하고라도 여기서 진료를 받겠다고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 정작 진료를 받고 나서 정부에 고발을 하게 되면 병원은 과태료 부과 등 뒤통수를 맞을 수 있는 상황도 벌어질 것이란 예상이다.
이 관계자는 “지금은 가상의 시나리오 같지만, 분명히 최선의 진료를 원하는 산재환자와 병원 간의 갈등이 내년 7월이면 일어날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이를 법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다만 산재환자에게 진료비를 부과하면 과태료 200만원 이하 처벌만 명시돼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노동부 관계자도 “현재로서는 산재환자에게 진료비를 부과할 경우에는 과태료 처분밖에 없다”며 “병원 입장에서 도의적으로 환자를 거부할 수도 없겠지만, 진료비 청구를 할 경우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전했다.
산재환자쏠림을 우려하는 병원계 주장에 대해 노동부는 ‘응급환자 등 부득이한 경우 외에 의학적 소견이 있는 경우에만 종합전문요양기관(대학병원)에서 요양할 수 있도록 진료절차를 명시해 무분별한 산재환자 집중을 완화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병원계 한 관계자는 “의학적 소견을 여부를 떠나, 환자가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싶다는 데 이를 만류할 의사가 없을 것”이라며 “부득이한 경우 외 의학적 소견을 어느 범위까지 인정하겠다는 것인지도 의문”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처럼 양질의 진료를 원하는 산재환자와 이를 거부하고 싶은 대형병원 사이에서 현재로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는 정부가 과연 어떤 해법을 내놓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