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트기타가 연주하는 ‘노동자비명교향곡’
천억 대 부자 회장님 알짜기업 콜텍 노동자들의 이야기

오도엽 구술기록작가 odol@jinbo.net / 2007년11월23일 15시15분

기타 한 대만 있으면 부러울 게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산을 가든 바다를 가든 강가를 가든 기타 한 대면 충분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기타는 젊음이자 낭만이다.

80년대 중반에 군사정권은 옛 서울대 자리를 지나는 거리에 대학로를 만들었다. 주말에 대학로는 차가 다니지 못하였다. 대학 캠퍼스에는 침묵을 요구하고 강요했다. 대신에 대학로라는 거리에 나와 낭만을 즐기라는 배려(?)였다.

당시 대학생들은 대학로에서 낭만을 찾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광주라는, 군사정권이라는 무거운 과제가 어깨를 억눌렀다. 대학로는 대학생들의 거리가 아니었다. 혜화동을 중심으로 펼쳐있는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이 몰려나와 거리를 채웠다. 머리와 교복 자율화에 맞물려 대학로는 끼 있는 고등학생들의 공연장 구실을 톡톡히 했다.

대학로에서 통기타를 치는 친구들의 인기는 단연 으뜸이었다. 홀로 또는 벗들을 이끌고 나와 거리에 주저앉아 기타를 쳤다. 지나가는 여고생들의 발길이 저절로 머문다.

70명이 왁자지껄 떠들던 교실과 바늘하나 파고들 틈 없는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하루를 살던 고교시절, 소리보다는 소음에 익숙했던 고등학생에게 유난히 손가락이 희고 길었던 한 고등학생의 손으로 울려주던 기타의 소리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때 기타에 새겨진 ‘Cort’라는 글자를 처음 만났다. 내 기억에 콜트는 소리를 깨우쳐 준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그 아름다움의 이름은 우연찮게 20년이 훌쩍 넘은 2007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11월 7일 다시 만나게 된다.

콜트기타, 소리를 만나다

이름도 생소한 ‘계룡시’라는 곳에 참 힘들게 싸우는 노동자들이 있으니 취재를 가자는 소리를 들었다. 전태일 37주기 행사 실무를 맡고 있는 터라 정신이 없었다. 전국노동자대회와 추도식을 며칠 앞둔 때라 ‘아무리 바빠도 가야지’와 ‘행사를 끝내고 가지, 뭐’ 사이에 갈등을 하였다. 7일 오후 무작정,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전행 고속열차를 탔다. 무엇을 만드는 공장인지, 왜 힘들게 싸우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계룡시 콜텍’이라는 공장을 찾아서.

대전역에 도착하니 함께 취재하기로 한 사람이 차를 가지고 왔다. 서로 초행이라 네비게이션의 지시에 복종하며 공장을 찾아갔다. 대전시 유성구를 막 벗어나니 계룡시다. ‘논산이었는데?’라는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친절한 네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음성 안내를 한다.

얼른 창밖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둠에 잠겨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전조등을 밝히며 핸들을 꺾는다. 드럼통을 반 쪼개어 장작을 채우고 불을 피우고 있다. 주위로 몇몇이 모여 있다. 장작불빛 너머로 컨테이너박스와 천막이 보인다. 차가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몰려온다.

서로 어색함을 달래는 인사를 성급히 나누었다. 공장식당으로 가자는 안내에 따라 현관문을 들어섰다. 기타 모양의 로고가 새겨진 광고물이 정면에 있다. ‘어, 어디서 본 듯한데…’ 가까이 다가섰다. 아득한 시절, 소리의 아름다움을 깨우쳐준 글자 ‘Cort’가 있다.

“콜트 기타를 만드는 공장이에요?”

콜트라고 새겨진 검정조끼를 입은 조합원이 어이가 없는 듯 “취재 온 것 맞아요?”하며 되묻는다.

취재 온 것 맞아요

콜트는 기타를 전문으로 생산한다. 세계기타시장의 30%를 차지한다. 인천 부평에는 전자(일레트릭)기타를 생산하는 콜트악기가 있고, 계룡시에는 통(어쿠스틱)기타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콜텍이 있다. 1995년에는 인도네시아에, 1999년에는 중국에 해외공장을 세웠다. 콜트는 기타업계의 세계 장악을 꾀하고 있다.

콜트의 주식은 박영호 회장의 1인주주로 되어있다고 한다. 박영호 회장은 1973년 서울 성수동에서 자본금 200만 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30년이 지난 현재의 박영호 회장은 천억 대의 재산가로 한국의 부자순위 120위에 올라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의 신화를 만들고 있다.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은 콜트가 새겨진 기타가방만 들고 다녀도 어깨가 으쓱해진다고 한다. 박영호 회장은 한국의 자랑일지 모른다.

박영호 회장에게는 또 다른 자랑이 있다. 계룡시에 있는 콜텍공장이다. 공장 2층의 식당과 나란히 직원 휴게실이 있다. 휴게실에 있는 칸막이를 옆으로 밀치면 붉은 빛 드럼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무대가 나온다. 이색적이다.

박영호 회장은 콜텍공장을 찾아 직원들과 함께 이곳에서 밴드의 연주를 듣는 걸 좋아한다. 연주를 들으며 직원들과 ‘우리는 가족’임을 강조하고, ‘콜텍공장에만 오면 기분이 좋다’며 연거푸 건배를 외친다.

물론 2006년 4월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박영호 회장은 노동조합에 대해 선천적으로 거부증상이 있는지 모른다. 1988년 콜트악기에 노동조합이 생기자 박 회장은 아예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반면 계룡시에 있는 콜텍공장에는 한 달에 서너 차례씩 찾아왔다. 물론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콜텍에도 노동조합이 생기자 발길을 뚝 끊었다.

부자 회장님의 알레르기

우미자 씨를 만났다. 단정하게 머리를 뒤로 빗어 묶은 우미자 씨는 자그마한 키에 쌍꺼풀이 진 초롱초롱한 눈을 가졌다. 말끝마다 ‘요’를 꼬박꼬박 붙이며 차근차근하게 한마디씩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는 올해 마흔아홉이다. 스물네 살에 결혼을 하였다. 스물넷, 스물둘의 딸과 아들이 있다.

그는 올해로 13년째 콜텍을 다니고 있다. 여성 조합원 가운데는 가장 오래 근무를 하였다. 삼천포가 고향이다. 그 시절이 그랬듯 우미자도 남자 형제들의 공부를 위해 중학교만 다녔다.

“동네 언니들이 도시로 돈 벌러 나간대요. 그래서 명절 때 시골에 오면은 옷도 예쁜 것 입고, 구두도 높은 것 신고 와요. 도시에 가면 그렇게 돈 버는 줄 알았어요. 중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일 년 놀다가 아는 언니를 통해서 마산에 왔어요.”

60년대 마산에는 수출자유지역이 생겼다. 이곳에 있는 공장에 들어가면 다른 곳보다 월급도 많고, 산업체학교를 다니며 공부도 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우미자 씨는 나이가 어려서 취직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년을 자그마한 개인 사업장에서 일을 하다 수출자유지역에 취직을 하였고 산업체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마치니 스물 둘이었다.

“개인 일하는데 들어갔는데 너무 힘든 거에요. 출퇴근할 때 학생들하고 출퇴근하잖아요. 저는 공장을 가고, 저 나이 또래 애들은 학교에 가고 …… 너무너무 부러워가지고 학교를 가야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했는데, 그 다음해에 자유지역에 들어갔어요. 회사에서 산업체 특별학급 신청을 했어요. 그래서 운 좋게도 이년 뒤에 학교를 간 거죠.”

진해에서 직업군인으로 일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제대를 하고 사업을 했는데 불행히도 빚만 진 채 사업을 접어야 했다. 남편이 새로운 직장을 찾아 옮겨온 곳이 이곳 계룡이다. 남편이 직장을 다시 얻었지만 사업으로 진 빚이 남아있고, 아이들은 한참 커가고 있었다. 우미자 씨도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콜텍과 인연을 맺었다.

콜텍과 인연

콜텍은 처녀 적 일했던 공장과는 영 딴판이다. 8시 30분이 출근시간인데 7시 20분만 되면 언니들이 다 공장에 와서 일을 시작한다. 우미자 씨도 당연히 그리 하는 줄 알고 언니들을 따라 일을 한다. 물론 이 시간에 일한 것은 월급에 포함되지 않았다.

“92년도 공장에 들어갔을 때는 제가 젤 나이가 적었어요. 서른다섯에 들어갔거든요. 근데 여덟시 반에 일을 해야 하는데 일곱 시 이십분만 되면 회사 다 와요. 막 일을 해요. 다 이렇게 하나보다. 그게 언니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하니까, 따라서 저도 습관이 되서 몸이 부서지는 줄 모르고 일만 했어요.”

아침만이 아니다. 퇴근시간도 마찬가지다. 계획된 생산물량이 나오지 못하면 잔업수당도 받지 못하고 목표량을 채울 때까지 삼십분이고 한 시간씩 일을 한다.

콜트 악기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조사한 자료가 있다. 설문조사결과 ‘근골격계 40%, 유기용제 노출로 인한 직업병의심 59%, 기관지 천식 36%, 만성기관지염 40%’로 나타났다.

“(자신의 오른손 손목을 보여주며) 그래서 저도 여기 삐어 나온 것 있잖아요. 일을 안 하니까 좀 줄어들었어요. 관절이, (나무를 파내는 시늉을 하며) 이걸 많이 했거든요. 톱질 칼로 가지고 이렇게 나무를 따내는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관절을 너무 많이 써가지고 여기서 관절 안에서 액이 나와 가지고 그랬대요. 이걸 (액을) 빼내도 계속 나오고, 욱신거리고 아파요,”

2006년 노조가 만들어지고 12년 만에 가장 높은 임금인상이 되었다. 높은 임금인상의 결과로 우미자 씨가 받는 일당이 이만오천칠백 원이다. 2007년 최저임금으로 결정된 이만칠천팔백사십 원에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고, 2006년 최저임금 시급보다 백 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얻은 급여가 최저임금이다.

부서져라 일해서 받는 최저임금

노동조합이 2006년 4월에 만들어지기 전까지 콜텍 공장 안은 ‘긴급조치’시대나 ‘계엄령’시절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똑같은 일을 해도 누구는 천 원을 올려주고 누구는 오백 원을 올려주고 그래요. 마음에 드는 사람 골라 제멋대로 임금을 조정을 하고, 임금 인상되면 옆 사람에게 말하지 마라 그래요. 팀별로 조회를 서잖아요. 꼭 말끝에 입조심해라, 말조심해라 그런 거 되게 많이 시켰어요. 동료들끼리 서로 시기 질투하고 일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침에 출근해서 즐겁게 웃으면서 일을 해야 하는데 서로 감정적으로…… 그런 분위기였어요. 진짜 생지옥이었죠.”

2003년에 콜텍에 입사하였다는 노동자의 고백을 들어보자.

“어느 날은 점심시간에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배가 아파 뛰듯이 화장실에 갔어요. 배 아픈 게 좀 가라앉았지만 볼일은 못 봤고, 화장실에 오래 있을 수도 없어 일하는 작업장에 돌아갔어요. 다시 배가 뒤틀려 화장실로 뛰어가 설사를 하고 나왔더니 중간관리자가 사람들 있는데서 큰 소리로 불러 화장실 자주 다닌다고 혼난 적도 있어요.”

작업시간에도 옆 사람 쳐다볼 시간도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공책을 하나씩 나눠주면서 시간마다 자신의 작업량을 체크하면서 일을 했다.

“첨에 입사하여 힘든 노동에 지쳐 세 번이나 응급실에 실려 갔지만 공장에 빠지면 잘릴까봐 병원에서 입원을 하라고 해도 뿌리치고 새벽에 응급실에서 출근한 적도 있었어요. 결국은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었지만……”

응급실에서 출퇴근

이제는 고인이 된 우미자 씨의 동료도 있다. 침착하게 말을 하던 우미자 씨는 이 대목에서는 목소리가 떨리고 눈이 붉어졌다.

“은행에서 관리자를 만났는데 인사를 해야 했는데 인사를 안했대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언니한테 막무가내로 너무 함부로 하는 거예요. 일을 너무도 잘하고 꼼꼼한 언니에요. 뭐 일을 이렇게 했어, 소리를 지르고 급기야는 그 언니를 다른 데로 배치전환을 시켰어요. 또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데로 또 배치전환 시키고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가…… 너무 힘드니까 언니가 맨 날 울고 했는데 인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못 이겨서 나갔어요. 언니가 퇴사를 했어요. 그때 언니가 집에 있으면서…… 만약에 회사에 있었으면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공장 그만 둔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언니가 저 (공장) 뒷산에서 콜트 조끼를 입고…… 이 조끼를 입고…… 이것을 입고 목을 매서 자살을 했어요. 이 조끼, 콜트라고 적혀있는……”

콜트 노동자에게 ‘배치전환’은 관리자의 눈 밖에 났다는 말이고, 곧 생계의 터전인 일터에서 버텨나기 힘들다는 말과 같다.

“배치전환은 단순히 작업공정을 옮기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밉기 때문에 옮기게 하는 거거든요. 돌림방이라고 했어요. 이리저리 어려운 데만 돌려요. 그러니까 공장장한테 잘 보여야 해요. 팀장한테도 잘 보여야 해요.”

돌림방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수출을 하던 콜트악기는 아이엠에프는 위기가 아니라 도약의 기회였다. 막대한 환차익으로 사세는 승승장구하였다. 지금의 콜텍 공장도 이때의 이익으로 공장을 새로 지은 것이다. 1999년에는 중국 따렌에 공장을 지었다.

중국에서 산업연수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산업연수생을 받아 일을 시키면 이윤이 많이 남는다, 그러면 콜텍의 국내직원들이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일하자 않겠냐고 관리자들은 말을 했다.

하지만 회사는 계속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기술을 배운 산업연수생은 콜트의 중국공장으로 돌아가 콜트의 통기타를 생산하였다. 중국공장은 7천 평으로 확장을 하였다. 350대 씩 생산하던 콜텍 공장은 중국공장의 확장으로 최근에는 60대까지 줄어들었다. 회사는 싼 인건비로 더 많은 이익을 남기고, 콜텍의 노동자들은 자연히 일이 줄어들고 월급봉투는 얇아져 갔다.

중국연수생에 숨겨진 비밀

늘 회사가 어렵다는 말도 거짓에 불과했다고 한다. 2004년 금융감독원에 신고한 재무제표를 보니 2004년 6월부터 일 년 간 이윤이 200억 원에 이르고 국내에서만 50억 원의 영업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다음 해의 단기순이익도 66억이었다고 한다.

“2005년부터 자꾸만 회사는 적자이고 힘들다고 했어요. 이 말이 사실인 줄 알고 저희 노동자들은 정말 자재도 아끼고 시간외 수당을 쳐주지 않아도 참고 일했어요. 나중에 노조가 만들어지고 알아보니 100억 대의 이익을 남기는 알짜기업이었어요. 참고 눈물 흘리며 일을 했는데요.”

회사가 필요한 것은 ‘MADE IN KOREA’다. “중국공장에서 생산을 하고 국내에서는 단순 조립만을 하여 ‘MADE IN CHINA’가 아닌 ‘MADE IN KOREA’로 판매하여 더 많은 이윤을 남기겠다는 경영전략”이라고 방종운 콜텍지회 지회장은 주장한다.

“우리가 벌어들인 돈으로 중국에 어마어마한 공장을 짓고, 중국인을 연수생이라고 불러들여 기술을 가르쳐주더니, 다시 중국공장으로 보내 중국공장을 가동시켜 싼 인건비로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고 한 거지요. 2005년에 우리 노동자들에게는 강제로 사직서를 쓰게 했어요.”

메이드 인 코리아와 강제사직

사직서를 쓰게 하는 것도 야비하고, 내보내는 방식도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우미자 씨는 1차 10명의 강제 사직자에 이은 2차 강제 사직자 대상이었다.

“버티고 버티고 안 쓰고 그러면 반장이 와가지고 사물함에다 사직서를 집어넣고 그랬어요. 일하고 있는데도 불러다가 사직서를 쓰라고 하고. 견디다 견디다 못해가지고 그럼 사직서를 쓸 테니 한 달이건 두 달이건 위로금이라도 좀 달라고 사정을 했어요.”

회사는 위로금조차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다. 7월 말 여름휴가를 앞둔 때라 휴가비라도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강제로 사직을 강요하면서 해고수당이나 위로금은커녕 고용보험을 가지고 협박과 회유를 했다고 한다.

“우리가 노동법을 너무 모르고 무지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고용보험 서류 안 해주면 우리는 실업급여를 못 받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고용보험 그거라도 타주게 할라니까 지금 사직서를 안 쓰면 고용보험도 못 타게 하겠다, 이런 식으로 하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고용보험이라도 타겠다는 마음으로 사직서를 쓰고 나간 거예요.”

10명 가운데 1명을 빼고 9명은 결국 사직서를 쓰고 공장을 떠났다. 회사는 실업급여 받게 해준 인심(?)을 썼다.

2차 강제 사직 대상이었던 우미자 씨는 아직 사직서를 쓰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지금은 지천명의 나이에 금속노조 콜텍지회 부지회장을 맡고 있다.

실업급여를 받게 해 준 회사의 배려

콜텍은 2007년 4월 9일 휴업신청을 하였고, 휴업 3개월 뒤인 지난 7월에 폐업신청을 하였다. 2006년 4월에 노동조합을 만들어진지 일 년 만에 박영호 회장은 공장 정문에 쇠사슬을 걸어 잠그고 조합원들을 거리로 쫓아냈다.

인천 콜트악기는 지난 1월 3일 시무식에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2월에는 70여 명을 정리해고를 하겠다고 노동조합에 통보를 했다. 지난 3월과 4월에 56명을 정리해고 했다.

인천지방노동위원회는 사측의 자산규모나 경영실적으로 미뤄 정리해고 필수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어려움이 있다고 볼 수 없어 정리해고는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복직이 이루어지지 않고 대법원까지 갈 기나긴 소송만이 기다리고 있다.

콜텍에는 노사협의 사항으로 되어있는 ‘배치전환’의 문제를 지난 2006년 12월 말에 들고 나와 일방적으로 시행함으로 노동조합과 갈등을 만들었다.

앞에서 봤듯이 배치전환의 문제는 콜텍 노동자에게는 중요한 문제이다. 노동조합은 대화를 통해 해결을 하자고 요구하였고, 회사는 법도 원칙도 강행하였다고 방종운 지회장은 말한다. 또한 일방적 배치전환에 불응한다고 징계를 내리기도 했다. 우미자 씨는 말한다.

“솔직히 노동조합 만들려고 공장에 온 거 아니잖아요. 회사에 돈 벌러 왔지. 배치전환, 그 문제도 어떻게 대립이 됐냐면, 우리는 배치전환 문제를 노동조합과 같이 합의하면 만약에 조합원들이 (합의 사항을) 안 따른다고 하면 조합 간부들이 열 몇 명이니까 우리 간부들이라도 그곳에 가서 일하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합의해서 하자고 했어요.”

박영호 회장의 대답은 휴업과 폐업. 그 대답 앞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박영호 회장의 뜻을 콜텍 노동자는 읽고 있다. 선택이다. 다시 동료를 시기질투하며 나 홀로 살겠다고 바동거리다 탈의실 사물함에 놓인 사직서에 사인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자랑스러운 콜트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로 살 것인가의 기로에 선 것이다.

“휴업에 맞서 조합원 49명이 천막을 치고 싸우고 있는데 휴업 삼 개월 동안에 다섯 명만 나갔어요. 저희가 단합이 잘 되요. 44명이 폐업이 된 7월부터 단 한명도 빠지지 않고 공장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콜텍 노동자의 선택

우미자 씨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밤 열시가 훌쩍 넘었다. 우미자 씨는 서둘러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남편 아침밥을 챙겨주고 농성장으로 다시 출근을 한다.

“제가 12년을 여기서 힘든 경험을 한 것을 고스란히 봐왔기 때문에 남편이 이해를 해요. 저도 여기서 있는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있었던 얘기를 집에서 해요. 그래야지만 남편이 이해를 하지 자꾸 숨기거나 얘기를 하지 않으면 이해를 잘못하잖아요. 다 이해를 하고 격려를 해주는데 그러다가 수틀리면…… 어떨 때는 치사할 때도 있어요. 아침 굶기면 굶겼다 하면…… 그러니까 저녁도 오늘 오후에 집에 가서 해놓고 왔어요. 아저씨도 많이 도와줘요. 청소하고 빨래 다리는 것은 우리 아저씨가 다해요.”

서둘러 돌아서는 우미자 씨의 이야기를 나는 다 이해를 했을까. 고등학교 시절 아름다운 ‘소리’를 가르쳐 준 콜트, 우미자 씨의 ‘소리’ 앞에 와르르 무너졌다.

꼭 우리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우미자 씨의 차분한 소리가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런저런 행사를 핑계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그날 장작불을 피우며 밤을 도와 천막을 지키던 ‘늙은 노동자의 얼굴’도 떠나지 않는다.

그새 눈이 오시고 영하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자고 가라며 붙잡던 얼굴들을 뒤로 하고 천막을 나선 것이 끝내 내 마음에 멍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