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증 없으면 환자취급 안하는 서러운 막장인생
[탐방] 태백 재가 진폐환자를 찾아서

매일노동뉴스 김미영 기자

태백의 겨울은 눈에 잠겨 고요할 것 같았다. 올해로 일흔두살 정옥배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는. 캐~엑! 캑! 쿨럭쿨럭! 허공을 찢어놓는 할아버지 기침소리가 작은 단칸방을 몇 번이고 들었다 내려놓았다.

춘천이 고향인 정옥배 할아버지는 지난 1968년 태백으로 왔다. 탄광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고 한다. 죽자사자 일하면서 탄광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쌓아놓은 돌이 떨어져 팔뼈가 으스러진 적도 있다며 그 때 난 상처를 내보이기도 했다. 89년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으로 문을 닫는 광산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동료들도 떠나갔다. 하지만 벌어놓은 돈이 없었던 정씨 할아버지는 92년까지 탄광을 기웃기웃할 수밖에 없었다.

탄광을 그만두고 가슴이 답답하고 기침이 끊이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진폐(11급) 판정을 내렸다. 그때가 95년이다. 숨이 차 50m도 채 걸어가기 힘들어진 2005년 진페 7급으로 상태가 더 악화됐다. 그 사이 부인마저 집을 떠나, 정씨 할아버지는 혼자가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젊었을 때 몸 좀 사리는 건데….” 정씨 할아버지가 한숨을 내셨다. 그러자 옆에 있던 최순길(72) 할아버지가 핀잔을 던진다.

“우리 젊었을 때는 마스크도 없었어. 수건 한 장으로 가리고 일했는데 폐가 멀쩡할 리 있겠어.” 최순길 할아버지도 탄광에서 30년을 일하다 88년 진폐(11급) 판정을 받고, 지금은 전국진폐피해자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정씨 할아버지의 가계부

정씨 할아버지는 1주일 전 이사를 했다. 1년에 200만원을 내고 빌리는 전셋집이다. 이것은 정씨 할아버지의 전 재산이다.

정씨 할아버지의 자녀들이 부정기적으로 보내주고 있는 용돈을 뺀 고정적인 월 수입은 총 8만7천원. 장해연금 3만원, 노인연금 4만5천원, 65세 노인에게 지급되는 차비 1만2천원이 전부다.

10만원도 채 안 되는 월 수입은 한 겨울 연탄값에도 못 미친다. 한달에 360장 들어가는 연탄이 11만원, 약값 10만원, 식비 7~8만원. 경조사비와 잡비가 10만원 안팎이다. 정씨 할아버지는 사실 “폐가 망가져 죽기 전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까봐 걱정”이다.

실제로 재가 진폐환자 10명 중 7명은 50만원 미만의 월수입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주영수 한림대 성심병원 산업의학과 교수가 태백지역 재가 진폐환자 1천40명을 대상으로 건강실태조사를 진행한 결과 심장질환과 당뇨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각각 38.4%, 29.8%에 이르렀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있다’는 응답이 52.1%에 달했다. 이들 중 75%는 60세 이상 고령자였으며, 65.2%가 월 수입이 5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전국에 나 같은 사람 3만명”

정부가 지난해 진폐환자들에게 지급한 금액은 총 3천27억원. 진폐법(에너지특별회계)에 의한 진폐위로금이 463억원이고 산재보험기금에서 2천564억원이 지급됐다. 그러나 진폐 7급 판정을 받은 정옥배 할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금액은 매달 3만원 가량인 장해급여가 전부이다. 원인은 진폐보상제도에 있다.

산재보험법상 요양을 받기 위해서는 ‘치료를 통해 의학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진폐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진폐판정을 받아도 9가지 합병증에 해당되지 않으면 산재요양을 받을 수 없다. 폐결핵·활동성폐결핵·흉막염·기흉·기관지염·기관지확장증·폐기종·폐성심·미코박테리아감염·원발성폐암이 합병증에 해당된다.

근로복지공단은 광산노동자에게 정밀진단을 실시하고, 그 결과 △합병증이 있는 진폐자 △합병증이 없는 진폐자 △진폐판정을 받지 못한 잠정 진폐자(진폐의증) 등 3가지로 분류한다. 똑같이 진폐 판정을 받아도 합병증이 없는 경우 ‘재가 진폐환자’로 구분하는데 정옥배 할아버지의 경우가 그렇다.

노동부와 전국진폐피해자협의회에 따르면 진폐환자 수는 3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이중 입원 환자가 10월 기준으로 3천684명으로 10% 가량. 나머지 90%가 재가 진폐환자들이다. 하지만 지난해 산재보험에서 진폐로 지급된 보험급여액의 87.6%인 2천245억원은 입원 환자에게 돌아갔다. 재가 진폐환자의 몫은 319억원으로 12.4%에 불과하다.

또 재가 진폐환자와 입원 환자는 죽어서도 대우가 다르다. 병원에서 요양 중 사망한 경우 일반적으로 ‘진폐’가 사인으로 인정돼 유족급여를 받을 수 있지만 재가 진폐환자의 경우 유족급여나 유족위로금 지급대상에서도 대부분 제외된다.

아파야 사는 사람들

불합리한 진폐 보상제도는 기이한 현실을 만든다. 보통 병에 걸리면 주변에서 ‘쾌유’를 기원한다. 하지만 진폐환자는 폐암 같은 합병증이 하루라도 빨리 찾아오길 기도한다. 그래야만 요양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옥배 할아버지는 폐렴에 걸릴까봐 노심초사했다. 폐렴은 환절기 진폐환자들의 최대 적이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폐렴’이 큰 문제가 아니지만 폐가 약한 진폐환자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더 독한 병에 걸려야지 그나마 치료라도 받을 수 있지. 폐렴은 합병증에도 못 껴.”

정씨 할아버지처럼 재가 진폐환자들이 ‘더 독한 병’을 바란다면, 병원에 있는 요양환자들은 재활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병이 나으면 다시 재가 진폐환자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산재의료관리원 태백중앙병원 내과 전근재 과장은 “진폐는 완치가 불가능하지만 적극적인 호흡재활 치료를 통해 증상완화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근재 과장은 “좀 더 숨을 잘 쉴 수 있도록 약물이나 재활치료를 권하고 있지만 오히려 환자들이 증상이 나아지면 산재요양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노동부도 ‘제도설계 잘못됐다’ 인정

이같은 진폐제도의 문제점은 노동부도 인정하고 있다. 조병기 노동부 산재보험혁신팀장은 “환자는 병이 낫길 바라지 않고 병원은 이를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는 현재의 진폐제도는 부조리의 극치”라고 말했다.

지난 2001년 9월 정부는 ‘진폐환자 보호 종합대책’을 통해 △진폐합병증 인정범위 확대 △진폐장해등급 확대 △보험급여기준 및 요양관행의 합리적 개선 △진폐요양기관 및 복지시설 확충 △진폐환자의 재활프로그램 개발·운영 △진폐환자의 생활보호대책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조병기 팀장은 “재원의 부족과 다른 질병의 산재 장해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로 2004년 폐기됐다”고 설명했다.

최순길 전국진폐피해자협의회 부회장은 “정부 스스로도 진폐 보상제도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고치지 않는 이유는 사회적 무관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때 광산노동자들을 산업역군이라 추켜세워 놓고 이제는 산업폐기물 취급을 하고 있다며 최 부회장은 분통을 터뜨렸다.

결국 재가 진페환자들은 지난해 11월24일부터 40일 가까이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벌인 끝에 노동부로부터 제도개선 약속을 받아냈다. 노동부는 내년 4월까지 진폐 관련 제도전반에 대해 개선방안을 마련키로 하고 노사정 관계자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협의체를 구성했다.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진폐 환자들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가 또다시 외면한다면 이번 제도개선 논의도 유야무야 끝날 수 있다. 산업역군에서 산업폐기물로 전락해버린 광산노동자의 ‘오늘’이 우리의 ‘내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재가 진폐환자 대책은?
통원치료로 요양수혜 범위 확대해야 … 이해관계 조율이 ‘관건’

노동부는 지난달부터 진폐 제도개선 협의회를 구성하고 진폐 관련 제도 전반에 대한 검토작업에 들어갔다. 이번 협의회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참여하고 있으며 노동부와 경영계,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
협의회는 △재가 진폐환자 생활보호 대책 △유족급여 지급요건·절차 △진폐판정 제도 △진폐환자 요양·통원기준 △진폐 장해 판정기준 등을 의제로 내년 4월까지 개선방안을 마련하고 법안개정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일부 진폐 합병증의 경우 완치가 가능하지만 휴업급여로 인해 장기간 요양하고 있어 합리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말했다.
백도명 교수(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는 “진폐 판정기준과 요양제도 전반에 걸친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백 교수는 “진폐는 단순히 방사선 상에 보이는 먼지의 크기 문제가 아니라 기관지와 폐가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그러나 현재 진폐 요양기준은 방사선 상 합병증만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진폐환자들이 건강상태를 추스를 수 있는 충분한 요양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의학적으로 입원을 해야만 진폐 합병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근거는 없다”며 “통원치료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문제는 재가 진폐환자와 요양 환자 간 상충된 이해관계를 조율하는데 있다. 진폐 제도개선 협의회에도 참가하고 있는 백 교수는 “다양한 주장들을 아우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태백중앙병원 진폐병동의 겨울
‘안녕히 가세요’ 인사할 수 없어 슬프다

산재의료관리원 태백중앙병원은 태백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이면서 전국에서 가장 큰 진폐병동을 가지고 있다. 전체 입원환자 580명 가운데 370명이 진폐환자이다.

첫마디 “아파 죽겠어”

태백중앙병원 제2내과. 이곳을 방문하는 환자들은 하나같이 ‘아파 죽겠어’라는 말부터 꺼낸다. 죽어도 ‘진폐병동’에서 죽는 것이 꿈인 재가진폐 환자들에게 이곳은 천국으로 가는 길목이다.

“일단 여기 와서 안 아프다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하나같이 ‘나 죽겠어’라고 말씀들 하세요” 전근태 제2내과장의 말이다. 의료진의 입장에서도 지금의 진폐 보상제도는 문제가 많다. ‘조건 드러누워 입원시켜달라는 환자들을 야단치는 것도, 근로복지공단과 정부에 진폐환자의 혜택을 더 늘려달라고 촉구하는 것도 의료진들의 주된 업무 중 하나다.

진폐는 분진이 생기는 모든 사업장에서 발병할 수 있다. 0.5~2마이크로 크기의 먼지가 폐 안에 침투해 이것이 뭉쳐져 염증반응이 생기면 진폐가 된다. 진폐증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숨 쉬기가 곤란하고 가슴 두근거림 현상이 나타난다. 가래나 기침을 동반하고 살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폐 증상을 보인다고 해서 모두 진폐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나타나는 크기와 모양을 직업력과 비교하여 의사가 소견을 밝히면 근로복지공단에서 이를 최종 판독하게 된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탄광 근처에서 오래 살았던 주민들에게도 드물게 발생하기도 한다.

전근태 과장에 따르면 진폐는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다. 다만 증상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만성폐쇄성 폐질환에 준하는 보존치료’ 방법을 사용한다. 전 과장은 “폐 기능을 최대한 끌어내 삶의 질을 올리는데 치료 목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의학기술은 진폐 앞에 무기력하다. 그렇다고 포기한 것은 아니다. 전근태 과장은 “의학적인 방법은 증상완화가 전부이지만 환자 스스로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육체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꼭 하고 싶은 말 “안녕히 가세요”

진폐환자들이 모여 있는 태백중앙병원 42병동 간호사들은 환자들에게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를 건넨 기억이 없다. 일단 진폐병동에 들어오면 살아서 퇴원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혜나 42병동 수간호사는 “몸이 좋아져서 퇴원하는 환자들에게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게 간호사로서는 가장 보람된 일인데 진폐병동에서는 장례식장에 가야 그런 인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95년 진폐로 입원해 14년째 42병동에서 지내고 있는 이아무개씨는 올 겨울 들어 병세가 더욱 악화됐다. 숨 쉬기가 곤란해 식사도 못하고 누워서 잠을 잘 수도 없다. 산소호흡기를 하고 앉아서 힘겹게 졸고 있는 이씨를 돌보는 이혜나 수간호사의 손길이 잠시 떨린다.

“밤새 숨이 차서 못 주무시더라고요. 진폐병동에서의 겨울은 가장 끔찍하죠. 봄이 올 때쯤이 사망률이 확 높아지거든요. 감기에라도 걸리면 폐가 견디지 못해요.”

42병동 간호사들은 ‘오늘은 환자들에게 어떻게 웃음을 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주된 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