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준(노동건강연대 회원, 더불어사는 희망연대노동조합 조직국장)
50대 중반인 그는 19살에 유선방송 설치 일을 시작했고, 2015년 4월 20일까지 티브로드 케이블방송·인터넷 설치기사로 일했다. 고객 집으로 이동하던 중 어지럽고 마비 증세가 와서 갓길에 차를 멈추고 동료에게 SOS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병원에서 뇌경색 진단을 받았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비조합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사건을 알게 된 것도 올해 초인데 이 사건 법률대리인인 변호사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재판을 준비하던 중 통신판의 노동조합을 찾았고 노조 정책담당자인 나와 연락이 닿은 것이다. 우리 노조에는 그와 똑같은 조건과 환경에서 일해온 노동자가 수천 명 있기 때문에, 나는 동료들과 함께 8쪽짜리 사실조회서 답변서를 작성하고 관련된 첨부 자료들을 추려 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8월 초에서야 결과를 전해 들었다.
거듭된 산재 불승인, 만성적 과로는 업계의 평균이라는 이유 때문
그는 2015년에 근로복지공단에 요양 신청을 했는데 산재 승인이 나질 않았다. 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업무상 질병 인정 요건이 바뀌고 2018년 재차 요양 신청을 했으나 초심에서 불승인 결정이 내려졌다. 재심 요청은 기각됐다. 2019년 9월 그는 마지막 소송을 시작했다. 올해 7월 법원의 조정 권고를 거쳐 8월 3일 최종결론이 났다. 이겼다.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다.”
그의 증언과 기록으로 본 그의 일터는 처참했다. “근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나 2005년도부터 영업실적 목표치가 생기면서 영업실적을 위해 오후 8시까지 근무 후 퇴근했다” “당직 때문에 월 3일 정도 휴무할 수 있었다”는 증언을 읽었다. “발병 전 4주 동안 1주 평균 업무시간 : 63시간 00분, 발병 전 12주 동안 1주 평균 업무시간 : 59시간 24분”이라는 숫자를 확인했다.
그는 다른 비조합원처럼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일만 했고, 몸이 고장 난 것도 모른 채 일만 했고, 결국 쓰러졌다. 심지어 회사조차 “재해자의 업무가 고객을 상대로 하는 업무로 스트레스가 있었고 스트레스가 장기간 누적되면서 질병이 발생했다고 판단된다”고 증언했을 정도다.
그리고 나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이하 ‘질판위’) 심의결과를 읽으며 억장이 무너졌다. 그의 노동시간이 만성적 과로 기준을 초과하지 않고, 영업목표 또한 동료들의 평균치에 해당하기 때문에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아니며, 당뇨 등 기존 질환의 자연 경과적 발병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산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질판위 결론이었다. 주치의와 자문의 소견도 마찬가지였다. 한 줄짜리 소견에는 산재 가능성을 검토할 여지조차 없었다.
‘운’에 좌지우지되는 산재 인정, 이래선 안 된다
이런 상황이 뒤집힌 것이다. 몇 번의 좌절에도 5년을 버틴 당사자와 가족, 노동자의 관점에서 끈질기고 치밀하게 자료와 변론을 준비한 훌륭한 변호인, 사건을 잘 살펴서 조정권고안을 제시한 법원, 권고를 수용한 근로복지공단, 네 주체 중 하나라도 다른 생각과 판단을 했다면 결과 또한 달랐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통신판에서 노조 활동을 하면서 고발한 노동실태와 현장에서 발굴하고 분석해서 축적해온 데이터를 법원에 제출한 우리 노동조합의 지원도 도움이 됐을 거라 믿는다. 단언컨대 그는 운이 좋았다.
더이상 운에 맡겨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에는 인정받지 못한 산재, 신청조차 못한 산재가 너무 많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9년 10만9242명이 산업재해를 입었고, 202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 통계는 산재보상을 신청해서 승인받은 경우만 뽑아낸 것이다. 더구나 교사, 공무원, 군인은 통계에 아예 포함되지 않는다. 통계에서 나타난 업무상 부상과 사망 비율 분석자료를 놓고 독일 스웨덴 이탈리아 등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아무리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인정되지 않거나 드러나지 않은 산업재해는 고용노동부 집계의 10배 수준이다.
산업재해를 줄이자는 데에 이견이 있는 이는 없을 것이라 믿는다. 최근 이 사회적 합의는 아주 강하고 끈끈하게 이뤄졌다. 산업안전보건법이 30여 년 만에 전면개정된 것도(‘김용균법’), 대통령이 “산재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언한 것도, 공영방송에서 일주일마다 산재 소식을 종합정리해 보도하는 것도<[일하다 죽지 않게] 기획(노동건강연대·KBS 공동기획)> 같은 목적일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가야 한다. 고용노동부는 적극적인 규제와 감독으로 재래형 산재를 빠르게 줄여야 한다. 산재에 취약한 50인 미만 사업장, 하청업체 사업장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국회는 모든 노동자를 산재로부터 보호하고,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과 사업주를 처벌하는 제도 정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기업은 ‘안전’과 ‘건강’을 기준으로 현장과 작업공정을 재구조화하고 노동시간을 줄이고 적정인력을 충원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무엇보다 노조를 만들어내고, 노동 안전 의제를 노조 활동의 중심에 둬야 한다.
산재를 줄이기 위해선 산재를 늘려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고도 역설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산재를 늘려야 한다. 산재를 줄이기 위해선 수많은 은폐된 산재를 드러내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보건의료 노동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최초의 상담자이자 기록자인 보건의료인이 진료실에 찾아온 환자에게 일하다 다친 것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주변 동료들은 비슷한 증상을 겪지 않는지 질문해야 한다. 노동자의 이야기를 기록해야 한다. 그런 다음 노동자에게 산재의 개념과 대응방안을 알려주고, 왜 산재를 처리해야 이득인지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노동권의 시각으로 산재 문제를 고민하고 자신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는 것, 나는 이것이 노동권과 의료공공성이 맞닿은 지점이고, 산재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보건의료 노동자 동지들의 분투를 빈다. 투쟁!
(독자들이 꼭 알면 좋겠다. 우리 집을 방문하는 케이블 기사, 인터넷 기사들은 장시간․고강도 위험작업과 감정노동을 한다. 지역독점, 독과점 사업자들은 땅 짚고 헤엄치며 막대한 매출과 이익을 올리는데 원청인 대기업, 통신 재벌은 ‘위험의 외주화’를 철저히 활용했다. 하청업체와 현장노동자들에게 실적압박을 일상화하고, 노동자들에게 자기착취를 내면화시킨다. 이들이 외주화를 통해 현장업무, 위험업무에 대한 비용을 줄이고 사용자책임을 은폐하면 할수록, 외주화된 노동자는 더욱 위험해진다. 참고로 임금은 터무니없이 적은데, 티브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5분의3 정도는 200만원이 채 안 되는 기본급을 받으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