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산업안전보건법 판례 671건을 분석하다]
지난 6월, 노동건강연대는 KBS의 의뢰로 2018년과 2019년에 나온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판결문 671건을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 이는 해당 기간동안 나온 판결문 중 법원에서 공개하기로 결정한 모든 판결문이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일하는 모두가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노동할 수 있게끔 규정하고 있는 법인데, 이 법의 위반이 판결문으로까지 남게 되는 경우는 사업주가 안전 의무를 다하지 않아 누군가가 일하다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들이다. 법원은 노동자의 죽음과 사업주의 안전 의무 위반 사이의 인과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노동건강연대 회원, 수습 노무사 모임 노동자의 벗 등에서 자원한 10여명이 이 사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고, 판결문들의 경향성을 분석하였다.
유성규(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 | 남준규(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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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지난 4월 이천에서 또 하나의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물류창고에서 발생한 화재로 38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10명의 노동자가 다쳤다. 사고 소식이 뉴스를 통해 알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2008년 이천 냉동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더 지났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 번 분노할 일이 남아 있음을 우리 모두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2008년 사고에서 그러했듯, 이번에도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진짜 책임자들이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같은 비판과 우려에 대해, 혹자는 과도한 비판이라거나 근거 없는 추측이라는 반론을 펼치기도 한다. 그동안 법‧제도와 정책이 많이 변화했고 사회적 인식도 크게 달라졌으므로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희망적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노동건강연대와 KBS는 이러한 낙관이 타당한지, 객관적 사실을 검증해보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우리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2018년과 2019년에 판결 선고된 총 671개의 1심 판결문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죽게 하거나 다치게 한 기업, 경영진, 관리자 등이 과연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분석 작업에는 노동건강연대 회원들, KBS 기자와 작가들, ‘노동자의 벗’ 수습 노무사들이 함께 참여했다. 분석 결과는 2020년 7월 9일 KBS 9시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하지만 시간 제약 상 뉴스에 보도된 내용은 일부에 불과하다.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 결과물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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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방법
분석 자료는 2018년과 2019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1심 판결문 671건이었다. 피고인별로 어떤 처벌이 내려졌는지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총 1,670명(자연인 1,065, 법인 605)에 대한 처벌 내용을 분석하였다.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하여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는 경우, 사업주는 징역형 또는 벌금형에 처해진다. 법인의 경우, 법인 자체가 사업주이며, 개인 사업주의 경우 자연인인 개인이 사업주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규모가 큰 업체의 경우 현장 소장 등 현장 책임자 정도가 처벌을 받는다. 특히 법인의 경우 자유형 선고가 불가능할뿐 아니라, 대표이사는 벌금형도 안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는 경우,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만이 아니라 형법 상 업무상과실치사상죄도 동시에 적용될 수 있다. 이런 경우‘상상적 경합’에 해당하며,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에 따른 형량과 업무상과실치사상죄에 따른 형량을 비교해 더 강한 처벌을 규정하는 법률로 선고하게 된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은 무죄, 업무상과실치사상죄는 유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판결문에서 금고형이 선고되는 경우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은 무죄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에 대해서는 징역형 또는 벌금형이 규정되어 있지만, 업무상과실치사상죄에 대해서는 금고형 또는 벌금형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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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분석 내용
(1) 재산형 (벌금) 평균
벌금형만을 선고받은 자연인(528명)의 평균 벌금액은 458만 원이었고 법인(584개)의 경우 505만 원이었다.
부상자 없이 노동자가 한 명 사망한 사건에서 자연인 피고가 선고받은 평균 벌금액은 513만원이었고 법인 피고의 경우 533만원이었다. 부상자 없이 노동자가 두 명 사망한 사건에서 자연인 피고가 선고받은 평균 벌금액은 717만원이었다. 부상자 없이 노동자 네 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자연인 피고가 선고받은 벌금액은 평균 500만원이었고 법인 피고의 경우 1500만원이었다.
벌금 최고액은 3천만 원이었고, 최저액은 30만원이었다. 벌금 30만원이 선고된 사건의 피고는 9인 규모 회사의 사실상 대표이사(자신의 처를 대표이사로 내세워 사업 운영)였는데, 작업 중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임에도 이와 같은 선고가 내려졌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작업계획서 작성 의무를 행하지 않았지만, 현장 소장에게 현장 관리를 맡겼다는 사정을 참작하여 이러한 형량이 정해졌다.
벌금 3천만 원이 선고된 사건의 피고는 2016년 5월 28일에 있었던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건 피해자 김군이 소속되어 있던 회사, 은성PSD였다. 이 사건은 언론에 많이 노출되었고, 사회적 공분을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벌금액이 선고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원청 책임자들에게는 벌금형만 선고되었고 하청 업체 대표에게는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이 판단은 대법원에서도 유지되었다. 결국 책임자 중 아무도 실형을 살지 않았다.
분석 결과를 종합하면, 노동자가 한 명이 사망하든 네 명이 사망하든 상관없이, 그 벌금액 수준이 터무니없이 낮고, 노동자 피해 정도와 벌금액 수준의 균형이 맞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자유형 (징역, 금고) 평균
자유형을 선고받은 자연인은 총 511명으로 그 중 금고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114명,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397명이었다. 511명 중에서 집행유예가 아닌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총 21명으로 금고 6명, 징역 15명이었다. 전체 자연인 피고 1,065명 중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비중은 1.97%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의 평균 수감 기간은 금고와 징역 모두 9.3개월이었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범죄에서 실형이 선고되는 비율이 극히 낮아 실효성 있는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양형 참작 사유
법원이 피고인들의 형량을 정하면서 참작한 사유들도 살펴보았다. 그 중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 결여되었다고 판단되는 사유들에는 산재보상을 받았다는 것 (10.7%), 반성을 하고 있다는 것 *38.0%), 피해자 과실을 인정한다는 것 (14.3%) 등이 있었다.
산재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양형 참작의 사유로 삼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산재보험은 산업재해 발생 시 사업주의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서 사업주는 당연히 가입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 의무를 위반하여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의 ‘형사’상 책임을 판단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 전혀 아니다.
피해자 과실을 양형 참작 사유로 삼는 것은 사법부가 노동자의 불안전 행동이 사고의 원인이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안전한 행동은 사고의 원인이 아니라 사업주의 안전보건 관리 부재, 안전보건을 도외시하는 조직 문화, 경영 실패의 결과물이다. 피해자의 과실을 양형 참작 사유로 삼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뒤집은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4) 지역별 형량 비교
지방 법원별 처벌 현황을 비교 검토하기 위해 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만을 분석에 포함시켰다. 평균 벌금액을 가장 적게 결정한 법원은 광주지방법원으로 392만원이었고, 가장 많이 결정한 법원은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850만원이었다. 징역형의 경우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는 평균 5.75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되어 가장 짧았던 반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평균 12개월로 형량이 가장 길었다. 금고형의 경우 부산지방법원에서는 평균 5.8개월로 형량이 가장 짧았고, 창원지방법원에서는 평균 7.33개월로 가장 엄한 처벌을 선고했다.
물론 이 같은 형량 선고는 모두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권고 기준 범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양형위원회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의 죄를 과실치사상범죄 양형기준 속에 두고 있는데, 기본이 징역 6월에서 1년 6월이며, 감경 시 4월에서 10월, 가중시 10월에서 3년 6월 사이의 형을 선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판결문을 살펴본 결과 전국 각 지방법원들은 양형기준 범위 내이긴 하지만, 각기 다른 수준의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다른 판결을 내리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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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대신하여
여러 사람의 노력 끝에 도출한 분석 결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분석 결과를 보자면,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진짜 책임자들이 이번에도 제대로 처벌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처벌을 강화한다고 과연 산재가 감소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그러나 처벌은 기업들에게 일종의 시그널로 작용한다. 산재를 유발한 기업에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면 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기업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일어나지 않은 산재를 예방하는 것보다 산재가 발생하고 사후 조치에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산재를 유발한 기업에 강력한 처벌이 내려지면, 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기업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산재 예방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다.
산재에 책임이 있는 사업주의 처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기업살인법 같은 강력한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법률 제정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우선 현행법체계 내에서 고용노동부, 검찰, 법원의 변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고용노동부, 검찰, 법원을 변화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은 누군가 그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부담감을 주는 것이다.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부담감, 그들의 불기소 이유서를 누군가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는 부담감, 그들의 판결문을 누군가 차분히 모아놓고 살펴보고 있다는 부담감을 주어야 한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그들에게 이러한 부담을 안겨주었으면 좋겠다. 이번 분석 작업이 그들의 부담감에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리라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바쁜 시간을 할애하여 분석 작업에 참여해 주신 분들과 의미 있는 기획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사회에 전파한 KBS에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