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제정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뿐입니다

이상윤(노동건강연대 대표)

 

2021년 1월 8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새해 시작과 더불어 제정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산재사망 없는 사회로 가는 힘찬 출발이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더욱 불평등해진 한국 사회를 바꾸는 시작으로 여겨졌다면 더욱 좋았겠죠. 하지만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올해 시작이 그렇게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의 산재사망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던 운동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로 “산재사망은 기업의 살인이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노동건강연대가 대중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 2002년부터였습니다. 캠페인을 시작한 이후로 햇수로 19년 만에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노동건강연대는 2003년 5월 기업살인법팀을 만들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초기 형태의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살인법’ 논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영국, 호주, 캐나다 등의 입법 운동 및 입법 사례를 소개하는 논의로 시작했으니 법안 자체에 대한 논의로는 18년 만에 제정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운동은 시작 초기부터 많은 분의 관심과 지지 속에 그 외연을 넓혀왔습니다. 2005년 4월에 민주노총, 한국노총, 매일노동뉴스, 노동건강연대가 함께 “산재사망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캠페인단’을 결성할 수 있었던 것도 노동사회 내에서 이 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2006년부터는 매년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을 진행하며 관련 사업을 본격화하였습니다. 정치적 상황과 주체적 조건에 따라 부침이 있었지만, 운동은 꾸준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 운동의 궤적을 추적하며 평가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이 정도로 하지요.

노동건강연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중대재해기업처벌법(기업살인법)’이 제정되면 한국의 심각한 산재사망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산재사망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이고 한국의 여러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와 중첩되어 있습니다. 법 하나 만들어졌다고 현실이 금방 바뀔 것으로 생각한다면 상황 파악이 잘못된 것이거나 법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은 것이겠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마법 탄환도, 도깨비 방망이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법에 불과하고 법은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법은 바뀐 세상을 사후적으로 승인해 줄 따름이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의 출발점을 보여줄 뿐이라고 감히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노동건강연대는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해 왔지만, 이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여러 가지 한계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여러 주·객관적 상황 속에서 문제 해결의 단초를 마련하기 위해 이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법 제정 과정에서, 법 제정 이후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법은 제정되었지만 한계가 크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법 제정의 경과와 결과를 평가하고 향후 법을 개정하고 보다 실효적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 운동에 참여하였던 많은 이들이 함께 평가하고 함께 계획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논의와는 별개로, 노동건강연대가 운동의 초기부터 생각한 이 운동의 성격을 여러 분과 나누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이후의 기업 살인 대응 운동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운동은 산재사망 문제를 ‘대중적 진보정치’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 기획의 일부였습니다. 한국에서 산재사망 문제가 개인의 부주의와 불운, 경제활동 과정의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피해로 취급되며, 전통적인 노사관계 속에서도 부차화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동건강연대는 “산재사망은 (개인의 부주의와 불운, 경제활동 과정의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피해가 아닌) 기업의 살인이다”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프레임 전환을 시도했고, 문제의 지점이 ‘기업’임을 명확히 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 설정 프레임에 대한 동의 수준을 높여가고자 묻힌 사건 가시화하기, 당사자 조직화, 우호적 여론 조성, 불특정 다수 대중 동원 등의 방식을 활용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운동은 산재사망 문제 해결을 위한 ‘주체 형성’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습니다. 한국의 산재사망 문제 해결이 더딘 것은 기업에 우호적인 이데올로기적 지반의 문제도 있지만,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주체 역량이 튼튼하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산재사망은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 등 노동조합이 포괄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주로 발생하는데, 이들은 사회적으로 보면 자원이 없고 발언권도 없으며 영향력도 없는 이들입니다. 기존의 노동조합이 의지와 뜻은 있더라도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이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조합과 더불어 노동조합 외부에서 이 운동의 주체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법이 제정된 마당에 법 제정 운동의 성격과 방식에 대해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은 까닭은 애초부터 이 운동의 목표와 지향점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고자 함입니다. 산재사망 문제를 포함하여 노동자 안전과 건강 문제를 ‘대중적 진보정치’ 문법을 활용하여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며 해결하려는 노력은 일정한 성과도 있지만 한계도 있습니다. 법 제정 운동으로는 달성하기 힘든 목표를 과도하게 법 제정 운동에 요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다른 운동 방식으로 새롭게 형성된 주체들과 함께 벌여나가야 할 것입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운동의 성과임에 분명하지만, 만들어진 법조문 그 자체 때문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법 조문 자체는 실망투성이입니다. 하지만 법 제정 운동 과정에서 노동자 안전과 건강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운동의 아군과 적군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 운동의 주체 동력이 미약하게나마 형성되고 사회적 지지를 확보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한계가 명확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개정하고, 제정된 기업처벌법이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비판하는 활동을 지속해야 할 것입니다. 검찰과 사법부의 역할 뿐 아니라 법을 집행하고 기업에 대한 감시, 감독 역할을 해야 하는 정부의 책임을 묻는 활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제는 깨어 있는 시민의 힘에 의지하는 것을 넘어 노동조합을 포함한 노동자 조직과 진보 정당이 제대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노동건강연대도 남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미약한 힘이나마 보탤 예정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