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02 : 2021 노동자건강권 운동 전망]

재난의 불평등 앞에 연대하는 시간

전수경 『노동과건강』 100호 편집위원

 

시간은 불평등하게 온다

 

한 사회가 노정한 문제들이 일거에 소거되고 정리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뉴노멀은 이미 노멀에 안착해있던 이들에게 올 수 있는 것이고, 언택트는 컨택트되어 있던 이들에게 온 선택권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평등하지 않다. 비대면경제의 이면에서 플랫폼노동자들은 21세기의 전태일로 호명되고 있다. 산재보험은 50년이 넘어갔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산재 신청하는 법부터 무엇이 산재이고 무엇은 산재가 아닌가 알려주는 정보를 찾는다. 산재보험가입이 당연하지 않고, 산재보험 처리가 당연하지 않다. 직장마다 공장마다 산재보상 문제는 여전히 편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비닐하우스를 숙소로 삼은 여성 이주노동자의 죽음이 전해져왔을 때 『노동과건강』 편집진들은 바로 지난 호(98호)에서 만났던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이름을 찾아보았더랬다. 편집진이 만났던 이주노동자들의 이름과 겹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캄보디아 여성노동자가 살던 비닐하우스 꽝꽝 얼어붙은 밭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이주노동자를 2020년 크리스마스의 TV뉴스에서 보았다.

2020년 전염병의 창궐 앞에 하루하루가 위급하였다. 하루의 안위를 확인해야 했고 공포의 언어에 길들여져 갔다. 켜켜이 쌓인 문제들 위에 바이러스가 실어온 새로운 문제들이 얹혀졌다. 개인들에게 위생과 안전의 책임이 주어졌으나 의지만으로 개인이 보호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평평한 모니터 밖의 문제가 울퉁불퉁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인력충원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해온 보건의료노동자, 돌봄노동자들은 재난의 한 가운데서 노동을 멈출 수 없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노동조건의 열악함을 견디는 데 대한 칭송으로 ‘천사’가 되고 ‘영웅’이 되었다.

택배, 물류, 서비스, 콜센터 등 코로나19 위기 상황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의 실태 역시 당사자들의 호소와 고발, 노동조합의 실태조사 등을 통해서 드러났다. 언택트의 이면에서 언택트가 가능하도록 떠받치는 산업은 호황을 맞았으나 그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노동강도 강화, 과로사라는 또 다른 재난을 마주했다.

 

텅 빈 정부 대책

 

2020년 하반기 코로나19에 취약한 노동자에 대한 대책으로 서울시 성동구에서 ‘필수노동자 지원조례’를 제정하였다. 서울시 성동구는 방역의 효율성에 대한 열광(?)에 가려져 있던 노동에 대하여 ‘정부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던졌다. 언론의 관심이 증가하고, 소비자와 시민들의 호응이 높아졌다. 정부의 인식과 대응은 어떠하였나?

‘필수노동자’에 대한 제도적인 보호책을 정부가 어떤 수준으로, 어떤 내용으로 제시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정부가 12월 중순 발표한 ‘필수노동자 보호 지원을 위한 대책’을 보면 보건·의료, 돌봄, 택배· 배달, 환경미화, 콜센터, 여객운송 업무 분야의 노동을 필수업무로 정하고 해당 노동자들을 지원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필수업무 지원의 내용은 이러하다. 2021년 상반기에 방문 돌봄, 방과 후 강사 등 9만여 명에게 생계비를 지원하겠다는 계획과 재원마련계획을 밝히고 있다, 택배·배달, 환경미화 노동자에게 건강진단 비용을 지원하고, 직종에 따라 필요한 건강진단을 할 수 있도록 2021년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특수고용노동자의 산재보험가입 확대를 위해서 노동자의 사용자 전속성에 대한 기준을 완화하기 위한 산재보상법 개정을 2021년에 추진하고 플랫폼노동자에 대한 적용확대방안을 논의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콜센터와 물류센터에서의 코로나19 집단감염에 대해서는 관계부처 협의와 현장점검, 근로감독을 하고, 필수노동자들에게 마스크 지급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돌봄노동 인력증원과 보호기준을 강화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정부가 밝힌 대책은 대부분 2021년에 ‘법 개정을 추진한다’, ‘기준을 마련한다’는 구상을 설익은 채로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부처들의 업무 가운데 필수노동자 업종에 해당하는 것을 급하게 모은 것 이상의 내용을 찾기는 어렵다. 건강진단 확대나 보호기준 강화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지원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코로나19 위기를 반영한 현장의 절박함을 해결할 장기적 로드맵도, 단기적 대안도 아닌, 관성적이고 대증적인 대처법이다.

마스크 지원 같은 항목을 한줄 더한 것을 보면 궁색하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산재보험 가입에 대하여 정부는 노동자성의 확장을 막으려 하고, 사업주에 대한 보험료 징수는 어찌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수준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등장하면서부터 불안정한 지위와 사회보험가입 문제 등으로 정부에 정책전환을 요구해 왔다. 코로나19가 이 불안정을 파고들어 더욱 열악한 노동조건을 만들고 있는데도 보호대책이라고 제시한 것은 정부의 입장에서 행정적으로 가능한 것에 고착되어 있다.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위기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은 높아졌지만, 정부는 이 흐름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미뤄둔 숙제를 해야 할 시간

 

코로나19가 불러온 영향은 균질하지 않다. 언택트 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처한 물류, 택배노동자들이 실제로 사망에 이르고,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였다. 일자리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운 노동자들이 있다. 노동자들의 연이은 사망 이후 사회적 논란이 이어질 때에도 대기업 물류, 택배 사업자들은 버티면서 침묵한 바 있다, 이들 기업은 물류센터 안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대규모로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원하청 관계를 따지며 언론대응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가 사용자인 영역에서는 정부가 사용자로서 노동자 보호와 인력충원의 책임을 더 져야 하고, 코로나19로 이익을 보는 기업들에게도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기업이 숨은 채로, 기업을 숨겨준 정부와 노동, 양자가 갈등하는 악순환은,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한다고 밝힌 ‘플랫폼 종사자 보호 대책’은 그동안 특수고용노동자를 둘러싼 혼란에서 체득한 교훈을 애써 외면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보인다. 특수고용노동자에게 노동권을 보장하도록 정부와 기업이 방향을 정한다면 플랫폼노동자를 굳이 따로 가를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2021년에 필수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대목도 의아하다. 코로나19 재난상황에서 필수노동자로 불리는 이들은 코로나19 이전에도 보호대책이 필요한 업종의 노동자들이다. 보호와 지원책들은 이미 제시되어 있다, 10년이 넘도록 입법을 기다리는 법안, 정부가 유예한 정책들이 시행되었다면 코로나19 위기에서 노동권과 건강권이 덜 침해되거나 제도적 보호가 가능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필수노동자 보호대책은 필요하다. 위험수당과 마스크지급에 반대하지 않는다. 현장이, 노동자들이 그동안 꾸준히 제기해온 대안들을 두고 시기상조론, 경제위기론을 방패로 귀를 닫아온 것에 대한 최소한의 평가와 반성이라도 있어야 실효성 있는 보호대책이 나오지 않겠는가.

 

재난 앞에 연대하는 큰 그림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코로나19가 불러온 노동의 위기는 노동운동에게 도전이자 기회가 될 것이다. 재택근무로 전환되지 않는 대면노동, 필수노동자로 불리기 시작한 이들이 노동자의 조직을 만들 수 있다면, 위기론이 상시적인 조건으로 고착된 노동조합 운동에는 기회가 될 것이다. 플랫폼 뒤에 숨어서 대면노동으로 이윤을 거두는 기업들에게 책임을 다하게 하고, 비정형의 노동으로 유입되는 노동자들이 다수가 되어도 전통적 노동자성을 고수하는 정부를 압박하는 힘이 너무 약하다. 노동조합 운동이 더 힘을 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이 갈라지고 고립되지 않도록 돕고 연대하는 데 길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회운동 역시 같다고 생각한다. 불평등이 드러나는 지점, 그 곳의 사람, 그 안의 구체적 실태, 그 안의 목소리를 따라서 갈 수 밖에 없다. 노동건강연대 역시 그 길을 따라서 왔다.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그 목소리에 담긴 사회적 맥락, 구조적 문제를 찾고자 하였다. 노동자의 건강권이 침해당하는 현장은 노동건강연대에게 과제를 제시하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하여 여전히 도전해야 하고, 기업 앞에서 머뭇거리는 정부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은 노동자를 위한 정치의 부재가 노동자 건강과 생명을 침해해 온 역사를 확인시켜 준 시간이기도 하였다. 노동건강연대가 진단한 문제가 시민사회와 공감대를 넓혀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긴 시간이기도 하였다.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들, 울타리 밖의 노동자들, 코로나19 재난 앞에서 노동과 건강의 위기를 겪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다시 귀 기울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