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새없이 도는 라인… “벌 수 있을 때 벌자”
최고 매출 구가하는 전성기 속 불안한 나날
[현장르포] 현대차 울산공장 직원들의 ‘빛과 그늘’
박수원 기자 won@ohmynews.com
는 지난달 11월 5일부터 르노삼성의 부산공장, GM대우차의 군산공장 등을 차례로 방문, 한국 자동차 시장에서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자동차 전쟁’의 그 이면에 담긴 풍경을 담아보고 있다. 세번째로 가 찾은 곳은 국내 자동차시장의 맏형격인 현대자동차의 울산공장이다…
▲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은 최근 90%가 넘는 공장 가동률을 기록하고 있다
ⓒ2002 박수원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는 모두 다섯 개의 공장이 있다. 공장은 생산차종별로 구분돼 있다. 1공장에서는 베르나와 클릭이, 2공장에서는 비스토,아토스, 에쿠스, 다이너스티, 싼타페가, 3공장에서는 아반떼XD, 투스카니,라비타, 4공장에서는 스타렉스,리베로,포터, 트라제, 5공장에서는 싼타모, 카스타, 갤로퍼, 테라칸이 생산되고 있다.
‘OK 라인입니다.’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장착하고 각종 부품을 부착해 자동차를 최종 완성시키는 1공장 의장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구였다.
1시간에 모두 52대 자동차가 지나가는 라인에 서서 현대자동차 직원들은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95년도에 입사한 전아무개(32)씨. 그는 평일에 평균 10시간 일을 하고 있다. 하루 520대의 자동차가 전씨의 손을 거쳐 나가는 셈이다. 전씨는 요즘 일주일에 60시간 넘게 일을 한다. 주말도 없다. 일요일에도 오후 5시까지 일을 하고 다음 날 아침 8시에 출근해 다시 라인에 서야 한다.
노조와 사이 안좋아 취재 협조 못한다?
총 부지 150만평, 건평70만평, 종업원 2만 6000명, 생산능력 연151만대.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의 외형적 모습이다. 기자가 울산 공항에서 15분쯤 차를 달려 도착한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은 작업 시간이라 그런지 공장 안은 조용했다. 정문 입구에서 가까운 식당 게시판에는 현대자동차 현장조직에서 붙인 대자보가 눈에 띄었다.
‘땀흘려 이룬 사상 최대 성과. 회사는 외면하지 마라’,’휴가도 반납하는 생산 강요만 있고 보상은 없는가’, ‘조합원 땀흘린 대가 특별 성과급 지급하라’
현대자동차는 올해 3/4분기 매출 19조 73억원. 순이익 1조 1897억원을 기록했다. 연말까지 24조원 매출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올해 국내 시장점유율은 50.4%로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기아차까지 합치면 국내 자동차 시장을 평정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는 울산에 내려오기에 앞서 서울 현대자동차 홍보팀에게 취재 협조를 구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회사쪽에서는 “노조와 사이가 좋지 않아 취재 협조가 힘들다”는 이해하기 힘든 답변을 내놓았다. 어쩔 수 없이 현대차 노동조합의 협조를 얻어 현지 취재를 할 수밖에 없었다. / 박수원 기자
“개인적인 시간이 없는 게 가장 힘들어요. 피로도 많이 쌓이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전체적으로 ‘벌 수 있을 때 많이 벌자’는 분위기인데요. 지금이야 회사가 잘 돼서 일거리가 많지만 언제 98년처럼 정리해고가 올지 모르니까요.”
쉴새 없이 돌아가는 라인
주말 특근과 철야를 해서 전씨가 받는 월급은 평균 200만원. 특근과 철야를 해야 그 나마 200만원 정도의 월급을 유지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전씨와 비슷한 생각이다. 바로 옆에서 일하고 있는 12년 차인 박아무개(35)씨는 “죽지 않을 만큼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12월에도 아마 대통령 선거와 크리스마스 빼면 모두 일을 해야 할 겁니다. 그래도 일할 수 있을 때 일해야죠.”
98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서 노조가 정리해고에 합의한 이후 현장 조합원들의 정서는 ‘누구도 우릴 지켜줄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요약된다. 노조에 대해서 갖는 기대도 ‘고용안정’이나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의 구심점’이라는 생각보다는 성과급 더 따내주는 곳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1공장에서 만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연말 성과급에 대한 기대도 숨기지 않았다.
“언론에 초과 이익을 달성했다고 보도되지 않습니까. 기대가 아무래도 크죠. 노조가 얼마나 하느냐에 달린 것 아닙니까.”
순 이익이 기대치를 초과한 만큼 회사와 노조가 합의한 150% 보다 더 많은 금액이 손에 쥐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노조도 이런 상황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이야 일거리가 많아서 일용직 노동자들을 채워서라도 일을 하고 있지만 언제 98년처럼 정리해고 폭풍이 불어닥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98년 정리해고 싸움을 겪은 조합원들 대부분은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극히 ‘개인화’ 돼 있다. 노조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그 만큼 적을 수밖에 없다.
▲ 현대자동차 울산 제1공장. 이 곳에서는 베르타와 클릭이 생산되고 있다
ⓒ2002 박수원
현대자동차 노조 이상도(39) 교육선전실장은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현장이 경제적 이해에만 매몰돼 있어 어려움이 많습니다. 올해 과로사로 9명이 죽었지만 현장에서는 오히려 죽어라 일하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일이 목까지 차 올랐는데도 경쟁적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과급에 대한 기대도 많습니다. 노조가 경제적 요구에만 매몰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조합원들 요구 무시할 수도 없고…”
현대자동차 생산라인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평균연령은 37세 정도. 대부분 40세가 넘은 노동자들은 99년 이후 급격하게 증가한 생산량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엄청난 노동강도로 과로사가 속출하고, 곳곳에서 근·골격계 질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공장에서 만난 한 노동자는 “코피 나게 일하지만 딱히 쉴 수 있는 여건도 되지 않는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런 상황이지만 현장에서는 일손이 모자라 난리다. 현대자동차는 얼마 전 신규직원 590명을 뽑았다. 96년 공채 이후 6년만의 신규채용이었다. 그러나 현장을 지탱하는 중요한 축은 하청 노동자들이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2000년 6월 임단협에서 회사의 하청 노동자 투입을 합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16.9%의 하청노동자 가이드 라인을 정했다.
당시 노조는 엄청나게 밀려들어오는 하청을 어떻게든 적정선에서 유지하겠다는 생각으로 16.9% 가이드 라인을 인정했다. 그러나 2002년 현재 하청 노동자들 비율이 정확하게 몇 명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에서는 하청 직원이 6000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 비율은 1만 2000명 이상이다.
1차 하청 뿐 아니라 2, 3차 하청이 있기 때문에 노조에서조차 하청 규모가 정확히 얼마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얼마나 일손이 딸리는 지 일용직들을 정문에서 모아 현장에 투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조 조합원 수를 살펴봐도 정식 직원들 자리를 하청들이 메우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1996년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조합원은 2만 9000명이었다. 그런데 2002년 6월초 현재 조합원은 2만 3866명이다. 99년 현대정공과 통합하면서 현대정공노조 조합원 2000명을 합친 점을 감안한다면 조합원 숫자가 7000명 이상 줄어들었다.
▲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10시간씩 일을 한다. 현장에서는 ‘벌 수 있을 때 벌자’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다.
ⓒ2002 박수원
“마른 수건도 다시 짜자”
한달 전쯤 현대자동차 내에는 일명 ‘노란 봉투’가 돌았다. 회사는 현대자동차 80명, 기아자동차 50명 등 사무직 130명에 대해 희망퇴직 형식으로 사직서를 받았다. 회사는 뒤처지는 사람들에 한해 자유 의사에 따라 희망퇴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직원들은 이를 ‘정리해고’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무직에 한해서 생긴 일이지만 이 때문에 공장 안에서는 벌써 내년도 자동차 시장 불황에 대비해 회사가 인력 구조조정에 나선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노조는 회사의 호황이 언제까지 계속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 전 사무직에서 진행한 구조조정이 그 전조라고 생각하고 있다. 회사가 인도, 터키, 폴란드, 미국 등에 해외 공장을 확장하고 있는 것도 노조 입장에서는 ‘뜨거운 감자’다. 세계 시장을 유치해야 하는 과제도 있지만 해외 공장을 늘릴 경우 국내 고용 유연화는 그 만큼 쉬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노조 최석영(36) 정책2부장은 “회사가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노조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만약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고자 한다면 노조와 미리 사전에 의논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 결정해 놓고 나중에 노조에 통보하면 벼랑 끝에 몰린 상태에서 싸움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아닙니까. 회사가 좀 더 솔직하게 회사 사정을 설명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회사 쪽에서 봤을 때 노조는 큰 골칫거리다. 회사 관계자는 “르노 삼성이나 지엠 대우와는 달리 노조 때문에 불리한 점이 참 많다”면서, “만약 파업이라도 해서 공장이 스톱된다면 그 피해는 다른 자동차 회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말했다.
회사 쪽에서는 내심 상시적인 구조조정 시스템을 도입하고 싶은 눈치다. 정몽구 회장은 사무직 구조조정을 하면서 “마른 수건도 다시 짜는 기분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현대차 호황 언제까지 갈까?
현대자동차 생산라인은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다. IMF이후 한풀 꺾였던 경기는 99년부터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해 그 끝을 모르고 올라가고 있다. 내수 시장 뿐 아니라 수출시장에서도 현대자동차는 단연 1위를 달리고 있다. 공장가동률이 90%를 넘어선 지 오래다.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만 차를 주문해 소비자의 손에 도달하기까지는 적어도 한달 이상의 시간이 소유된다. 아직도 주문량이 밀려 있다는 이야기다.
기록적인 호황을 구가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현대자동차의 경쟁상대였던 대우자동차가 정리해고와 해외매각으로 인해 내부를 추스르기에 바쁘고, 르노 삼성도 본궤도에 오르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올해만 지나면 자동차 업계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르노 삼성이 중형차 시장에서 무서운 기세로 추격을 시작하고 있고, 지엠 대우도 전열을 정비해 전력 만회에 나서고 있다. 두 회사의 추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지금까지의 상승세를 어떻게 지켜내느냐가 현대자동차의 과제다.
과연 이러한 호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 박수원 기자
한편으로 11월 20일 현대자동차 김동진 사장은 현대·기아차를 2008년까지 연간 500만대 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세계 자동차 시장 5위에 진입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은 셈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본관 중앙에는 ‘글로벌 TOP5 실현’ 이라고 적힌 문구가 붙어 있었다.
‘품질경영, 무한경쟁, 이기는 길’
공장 곳곳에는 만나게 되는 이 구호를 실현시키기 위해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은 지금도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무한 질주는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무한 질주의 동력임과 동시에 브레이크가 될 수 있는 현대자동차 노조원들과 하청 노동자들을 안고 현대자동차는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