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제정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

『노동과건강』 99호 발간을 앞두고 편집위원회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대표의 편지를 씁니다. 2020년 겨울에 발간되었어야 하는 99호가 지금 나오게 된 것도 다 제 책임입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어떤 식으로 제정되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2021년 1월 8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었고, 이제 편지를 씁니다. 늦었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

한국의 산재사망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로 “산재사망은 기업의 살인이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노동건강연대가 대중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 2002년부터였습니다. 캠페인을 시작한 이후, 햇수로 19년 만에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노동건강연대는 2003년 5월 기업살인법팀을 만들어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기업살인법’ 논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영국, 호주, 캐나다 등의 입법 운동 및 입법 사례를 소개하는 논의로 시작했으니 법안 자체에 대한 논의로는 18년 만에 제정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운동은 시작 초기부터 많은 분들의 관심과 지지 속에 그 외연을 넓혀왔습니다. 2005년 4월에 민주노총, 한국노총, 매일노동뉴스, 노동건강연대가 함께 “산재사망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캠페인단’을 결성할 수 있었던 것도 노동사회 내에서 이 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2006년부터는 매년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을 진행하며 관련 사업을 본격화하였습니다. 정치적 상황과 주체적 조건에 따라 부침이 있었지만 꾸준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 운동의 궤적을 추적하며 평가하는 것이 글의 목적이 아니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이 정도로 하지요.

사실 노동건강연대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기업살인법)’이 제정되면 한국의 심각한 산재사망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마법 탄환도, 도깨비 방망이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법에 불과하고 법은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법은 바뀐 세상을 사후적으로 승인해 줄 따름이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의 출발점을 보여줄 뿐이라고 감히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건강연대는 이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여러 가지 한계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여러 주관적, 객관적 상황 속에서 문제 해결의 단초를 마련하려면 이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법 제정 이후 한계를 지적하고 법 무용론을 제기하는 여러 주장과 별개로, 저희는 이 운동의 성격과 한계를 많은 분들과 나누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이후의 운동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운동은 산재사망 문제를 ‘대중정치’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 기획의 일부였습니다. 한국에서 산재사망 문제가 개인의 부주의와 불운, 경제활동 과정의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피해로 취급되며, 전통적인 노사관계 속에서도 부차화 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노동건강연대는 “산재사망은 (개인의 부주의와 불운, 경제활동 과정의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피해가 아닌) 기업의 살인이다”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프레임 전환을 시도했고, 문제의 지점이 ‘기업’임을 명확히 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 설정 프레임에 대한 동의 수준을 높이고자 ‘묻힌 사건 가시화하기’, ‘당사자 조직화’, ‘우호적 여론 조성’, ‘불특정 다수 대중 동원’ 등의 방식을 활용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운동은 산재사망 문제 해결을 위한 ‘주체 형성’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습니다. 한국의 산재사망 문제 해결이 더딘 것은 기업에 우호적인 이데올로기적 지반의 문제도 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주체 역량이 튼튼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산재사망은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 등 노동조합이 포괄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주로 발생하는데, 이들은 사회적으로 자원이 없고 발언권도 없으며 영향력도 없는 이들입니다. 기존의 노동조합이 의지와 뜻을 가지고 있더라도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이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조합 외부에서 이 운동의 주체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마련되었던 운동이었기에 이 운동은 ‘포퓰리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운동 초기부터 거의 최근까지 다수의 전문가, 법률가, 학자, 정치인들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처벌은 예방 효과가 없고, 한국 법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게 진보적, 개혁적 전문가 포함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였습니다. 그래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운동에는 전문가가 전면에 나선 적이 없습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운동 의제를 사회화함에 있어 전문가들의 지지와 대변을 매개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운동은 처음부터 그러한 방식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사실 전문가를 찾고 싶었지만, 법 제정을 지지하는 전문가가 아주 소수였기에 그러한 방식을 따르고 싶어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노동건강연대는 이러한 전문가들의 진단에 일정 부분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운동을 만들어 왔습니다. 한국의 산재사망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법제도의 엄밀성과 효과’를 떠나,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있을지언정 대중의 분노와 열정을 조직화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고, ‘박제화된 민주주의’의 적일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좌파 버전의 포퓰리즘은 사회운동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전문가들의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만들어 왔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된 마당에 법 제정 운동의 성격과 방식에 대해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은 까닭은 법의 성격과 한계, 운동의 목표와 지향점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고자 함입니다.

산재사망 문제를 포함하여 노동자 안전과 건강 문제를 ‘대중정치’적인 문법을 활용하여 ‘좌파 포퓰리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일정한 성과도 있지만 한계도 있습니다. 노동건강연대는 2003년 운동의 시작부터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면서 여러 가지 비판과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벌여왔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한계도 많고 효과도 우려되는 형태로 제정된 것은, 어쩌면 이러한 운동 방식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한계가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운동의 성과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만들어진 법조문 그 자체보다는 법 제정 운동 과정에서 노동자 안전과 건강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 운동의 아군과 적군은 누구인지, 그리고 운동의 주체 동력이 미약하게나마 형성되고 사회적 지지를 확보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노동건강연대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기업살인법) 제정 운동 시즌을 마무리하고, 운동 과정에서 드러났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을 벌여나갈 것입니다. 한계가 명확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개정하고, 제정된 기업처벌법이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역할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주체들이 더욱 잘 할 것으로 믿습니다. 노동건강연대는 더 낮은 곳, 더 가려진 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다시 시작합니다. 또 다른 20년도 여러분과 함께일 것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