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운다 아들을 잃고, 어미도 운다
[한겨레] 권오성 기자 송경화 기자 박수진 기자
등록 : 20110605 21:07 | 수정 : 20110606 10:18
돌아오지 않는강-4대강 사망자 19명 전수조사
④ 저무는 강, 외로운 뱃사람
팔순 할머니는 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시내 병원에 갔다. 진찰이 끝났을 때 할머니는 집으로 가는 길이 생각나지 않았다. 동네 이름만 기억나고, 가는 길은 떠오르지 않았다. 병원 직원이 동사무소에 연락했다.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수급 담당 직원은 할머니를 모시고 번지를 찾아갔다.
어른 한 명이 겨우 지나가는 좁은 골목을 따라 5평 안팎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손바닥만한 창문에는 비닐을 씌웠고, 집의 지붕과 벽은 판자로 덮었다. 쪽방촌 100여가구는 공중화장실을 번갈아 썼다. 가난의 미로에서 동사무소 직원은 길을 잃었다. 통장을 불렀다. 아들의 오랜 친구인 통장이 할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할머니는 그제야 가슴을 쳤다. 생선 손질하는 동네 노인들 앞에서 눈물이 마른 눈을 끔뻑였다. “으이구, 그 배 타러 간 줄도 몰랐다. 나를 살리고 가가 죽었다.”
아들이 죽고 한달여가 지난 4월 어느 봄날, 치매 걸린 독거노인은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할머니는 군산 어촌마을 쪽방촌과 영영 이별했다. 외아들을 키운 마을이었다. 바다에서 배를 몰던 늠름한 아들 김석원(가명·59)은 강에서 외롭게 배를 타다 지난 3월22일 숨졌다. 낙동강 18공구였다.
외로운 떠돌이 노동죽음의 비명조차 강은 삼켜버렸습니다
석원의 고향은 전북 군산의 작은 어촌마을이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옮겨온 피난민들이 마을을 이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마을은 가난의 더께를 벗지 못했다. 석원의 또래 친구들 대부분은 중학교만 마치고 고기잡이배를 탔다. 쪽방촌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어머니는 외동아들 석원을 낳고 길렀다. 오직 석원만 야간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졸업 뒤엔 해양경찰이 됐다. 경비정을 타고 부두 순찰을 돌았다.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외아들 석원은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10여년 전, 석원은 경찰 일을 그만뒀다. 퇴직금으로 방앗간을 차렸지만 이내 망했다. 전직 경찰은 한동안 조개를 캐며 생계를 이었다. 석원이 지난 10년 동안 어찌 살았는지 알고 있는 이가 거의 없다. 4대강 공사장에서 일하다 죽었다는 사실만 또렷하다.
멀어진 가족 보고싶다던 50대
한밤 준설작업중 물에 빠졌지만
“살려줘” 외침도 엔진음에 묻혀
석원의 현장 동료인 백기연(가명)도 그 사연을 모른다. 낙동강 18공구에서 기연은 6개월 동안 석원과 짝을 이뤄 준설선을 탔다. 기연은 강바닥 모래를 퍼올리는 운전 담당, 석원은 배의 엔진을 돌리는 기관 담당이었다. 각자 2층 운전실과 1층 기관실에 들어가 6시간씩 꼬박 홀로 일했다. 그들 각자의 벗은 담배뿐이었다. 서로 농을 섞을 시간 따윈 없었다. 석원은 하루에 담배 3갑을 피웠다.
준설선 노동자들은 하루를 배에서 보내고 하루를 뭍에서 쉰다. 비번인 날엔 찜질방을 개조해 만든 5평짜리 숙소에서 부족한 잠을 몰아서 잔다. 유독 석원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홀로 차를 몰고 공사장 밖으로 나갔다. “누구 좋은 사람이라도 만나고 오냐?” 기연이 물었다. “잠은 안 오고 심심해서 우포늪 돌고 왔어요.” 경남 창녕 우포늪은 원시 생태가 살아있는 세계적 습지다. 4대강 공사 때문에 우포늪이 사라질 거라고 걱정하는 이가 적지 않다. 석원은 우포늪에 제 시름을 풀어놓고 현장에 돌아왔다.
» 지난 1월9일 경남 창원시 낙동강 17공구 공사 현장에서 야간작업중 숨진 이병태씨의 아들이 5월19일 오후 사고 현장을 찾아 둘러보고 있다.
한달에 한번 주말을 끼고 쉬는 날이면 석원은 고향에 다녀왔다. “어머니 만나고 왔어요.” 전북 군산에 노모가 홀로 지낸다고 석원은 말했다. 부인이나 아이들 이야기는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지난 설 연휴 직전, 기연과 석원은 좁은 숙소에서 모처럼 소주잔을 나눴다. 자식 자랑을 먼저 한 것은 기연이었다. 1남4녀의 사진을 꺼내 보였다. 어쩐 일로 석원이 말했다. “저는…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어요. … 보고 싶네요.” 그러곤 입을 다물었다. 기연은 더 묻지 않았다.
가족 이야기는 4대강 공사 현장의 금기다. 현장을 따라 전국을 떠도는 노동자들은 임시 컨테이너 숙소나 허름한 여관에서 몇 달씩 지낸다. 주 5일 근무는 남의 일이고, 한달에 하루 쉬면 다행이다. 멀리 떨어진 집을 찾아가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가족과는 점점 멀어진다. 아내·자식과 헤어진 남자들이 공사현장엔 모래처럼 많다. 그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할 도리가 없으므로 4대강 노동자들은 가족에 대해 입 다물고 더 묻지 않는다.
» 시공사별 4대강 공사현장 사망사고 현황
그래도 피붙이가 필요한 날이 있다. 3월22일, 기연은 휴가중이었다. 밤 11시께 기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회사였다. “백씨, 김석원씨 가족 연락처 알아?” “몰라요. 언제 가족 얘기를 한 적이 있어야 말이지. 왜요?” “물에 빠졌어. 가족을 아는 사람이 없네. 끊어.”
그날 밤 석원은 야간작업 도중 물에 빠졌다. 하필이면 늘 함께 일하던 기연이 없는 날, 석원은 죽었다. 기연을 대신해 배를 탄 운전기사는 밤 9시께 기관실에 석원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컴컴한 강물 위로 손전등만 떠 있었다. 석원이 비명을 외쳤다 한들 운전기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준설선의 엔진 소리는 모든 소리를 잠재운다. 엔진에선 소리 말고 열기도 나온다. 석원은 종종 더위를 못이겨 구명조끼를 벗어던졌다. 4대강 주변에서 일하는 노동자 모두 구명조끼를 입어야 하지만, 현장에선 무시된다. 사고 다음날 오후,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석원의 주검이 발견됐다.
컨테이너서 몇달씩 사는 공사판
한달에 한번 쉬기도 어려워
가족과 헤어진 남자들 수두룩
석원은 고향 군산의 어느 병원 장례식장에 돌아와 누웠다. 옛 친구들이 문상 왔다. 치매에 걸려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노모는 외아들의 친구를 붙잡고 말했다. “금방 군산 온다고 그랬는데… 군산 온다 그랬는데….”
외롭게 일하다 외롭게 죽은 이는 더 있다. 25년 넘게 포클레인을 운전한 최종상(47)은 현장 근처에 작은 방을 얻어 1년 동안 살면서 경남 밀양의 집에 거의 가지 못했다. 지난 4월15일 경남 창녕군 낙동강 18공구 현장에서 준설작업을 하다 포클레인과 함께 강에 빠져 숨졌다. 윤경삼(55)은 지난 2월부터 경북 구미시 낙동강 28공구 근처 모텔에서 지냈다. 평생 떠돌이 생활을 한 그는 지난 3월6일 임시도로가 무너지면서 포클레인과 함께 강에 빠져 숨졌다. 준설선 기사 하성길(60)은 경남 의령군 낙동강 19공구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가족은 거의 만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12일 익사했다.
준설선·포클레인·펌프카서
마지막 맞은 4대강 노동자들
외롭게 일하다 외롭게 떠나중산층의 꿈을 품었던 이들도 있다. 목수일을 하는 일용직 노동자 강철규(64)는 1970년대 중동에서 일했다. 돈을 모아 음식점을 열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 때 접었다. 지난 2월7일 다리 거푸집을 제거하다 넘어진 기둥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모처럼 가족을 만나 함께 식사한 설 연휴 다음날이었다. 30년 넘게 택시를 몰았으나 결국 일용직 노동자가 된 이병득(59)은 낙동강 18공구 자재물류창고 옥상에서 작업을 준비하다 지난 5월16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숨졌다. 김은복(39)은 지난해 3월27일 경남 합천군 낙동강 20공구에서 펌프카를 수리하다 차에서 떨어진 장비에 깔려 숨졌다.
죽음의 행진은 2년 전 여름 시작됐다. 2009년 8월16일 낙동강 24공구에서 공사 시작 전 지질조사를 하던 이아무개(40)씨가 보트가 뒤집혀 숨졌다. 이씨는 4대강 공사 관련 첫번째 사망자다.
권오성 송경화 박수진 기자 freehwa@hani.co.kr
여러 대형 건설사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4대강 구간별로 공사를 맡고 있다. 컨소시엄 지분이 가장 많은 곳이 대표 시공사다. 같은 공구를 맡은 대형 건설사들은 다시 여러 개의 하청업체에 공사를 맡긴다. 4대강 공사 현장 사망자 대부분은 하청업체 소속이다. 하청업체는 현장 노동자 대부분을 단기로 계약한다. 대표 시공사-나머지 원청 건설사-수많은 하청 건설사 등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구조 때문에 사고조사, 보상, 산재처리, 형사처벌 등의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하청업체는 개인사업자인 중장비 차주와 계약한다. 차주는 직접 운전대를 잡거나, 아래에 여러 명의 운전기사를 고용한다. 이렇게 고용된 중장비 기사의 산재 책임은 원청·하청 건설사가 아닌 차주에게 돌아간다. 송경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