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02 :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2021

 

노동건강연대는 2021년 봄 기획강좌로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 엉킨 실을 어떻게 풀 것인가〉를 2021년 3월 4일부터 4월 15일까지 진행한 바 있습니다. 일곱 개의 강좌를 꾸려 한 주에 한 번씩, 총 7주간 온라인으로 여러분들과 만났습니다. 코로나19는 노동건강연대 활동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온라인 기획강좌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워진 팬데믹 시대 속에서, 회원들과 나누는 시간을 그리워하며 마련한 강좌에 많은 분이 뜨겁게 호응해주셨습니다. 우리 사실 다 비슷한 마음이었던 걸까요? 쏟아지는 좋은 반응에 힘입어 기꺼이 강사로 나서주신 일곱 분의 선생님 중 네 분에게 강의 내용을 원고로 옮겨주십사 부탁을 드렸습니다. 강의 내용을 복기하고 싶었던 회원님들부터 미처 참석하지 못하셨던 회원님들까지 모두 모시고, 다시 한번,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강의를 시작합니다!

 

불평등과 건강 정치

김창엽 ∥ (사)시민건강연구소 소장

 

한국에서 정치는 흔히 현실 정치를 가리킨다. 누구나 선거나 투표를 떠올리고 국회의원과 난장판 국회를 상상하기 쉽다. 사정이 이러니 ‘건강 정치’라는 말은 생소하기 짝이 없다. ‘노동 정치’나 ‘환경 정치’처럼 정치를 비교적 넓은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도 “건강에 무슨 정치?”라고 반문하기에 십상이다. 건강을 개인 사정으로, 그것도 의학이나 생물학적 몸과 연결해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의 사회적 이유

유전으로 타고나거나 태어날 때 결정되어 평생을 가는 체질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틀림없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건강 숙명론이 나온 배경이며, 한편으로는 건강을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첫째 이유이다. 통틀어 ‘생물학적’ 요인이라 하면 이는 건강과 수명을 결정하는 한쪽 기둥이라 할 만하다.

이 글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이런 생물학적 요인이 건강과 질병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리 건강 체질로 태어나더라도 가난하고 영양이 부족하면 일찍 병들고 수명이 짧아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회적인 질병은 산재를 비롯한 사고다. 사고에 유전자와 건강 체질이 다 무슨 소용이며, 평소의 건강검진과 건강식품 따위도 무력하다. 생물학적 요인은 쉽게 고칠 수 없지만, 사회적인 것들은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점도 덧붙인다.

사실 사고는 건강을 결정하는 ‘사회적 요인’의 한 가지 대표일 뿐이다(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사고라고 할 때는 비교적 짧은 시간과 외부 충격이라는 의미를 포함하지만, 많은 건강 손상을 ‘느린 사고’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느린 사고란 오랜 시간에 걸쳐 건강을 해치는 외부 요인이 몸과 마음에 작용해 질병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산재로 인정받는 근골격계 질환의 이유와 시간을 생각해 보면 ‘느린’이라는 표현에 동의할 수 있으리라.

사회적 요인에서 ‘사회적’이 중요한 이유는 한 마디로 불평등 때문이다. 소득과 빈곤에서 보듯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인들은 평등하지 않으며, 불평등한 사회적 결정요인은 불평등한 건강으로 바로 이어진다. 여러 사회에서 연구된 결과를 종합하면, 소득과 빈곤, 교육 불평등, 노동조건, 고용 불안정 등이 건강 불평등을 초래하는 중대한 요인들이다. 여러 사회적 결정요인은 당연히 서로 맞물려 있는 다차원적 위험이기도 하다.

사회적 결정요인의 뿌리

빈곤이나 비정규 노동이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에서 자살률이 높고 암에 더 많이 걸리며 정신건강이 더 나쁘다. 장시간 노동과 나쁜 노동환경을 피해야 건강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은 이보다 더 명확하다. 이처럼 사회적 결정요인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명확하고 일관된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개인 차원의 논리로는 간단하다. 가난을 벗어나 더 부유해지고 학력을 올리고 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면 되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에 있다. 한 개인이 비정규 노동을 벗어나고 쾌적하고 위생적인 집에서 살며 안전한 현장에서 일한다는 대안은 대부분 비현실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결정요인이 내포하는 두 번째 ‘사회적인 것’의 의미와 만난다. 사회적이란 한 개인에게 미치는 외부 요인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 구조 또는 사회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는 차원도 있다. “저 사람은 사회성이 부족해”라는 말과 “한국은 권위주의 사회야”라는 말에 담긴 사회라는 말은 서로 연결되되 관점이 다르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전자는 개인의 속성을 후자는 사회 전체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를 들어 저임금 노동자와 저임금 노동 구조(또는 체제) 간의 관계가 이에 해당한다.

사회적 결정요인이 ‘불건강’의 뿌리라면 한 사회의 구조와 체제는 ‘뿌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원인의 원인 또는 근본 원인이라고 불러도 괜찮다. 위험한 건설현장이 사회적 결정요인이라면 좀처럼 그런 곳이 줄어들지 않는 해당 기업과 노동시장의 구조가 뿌리의 뿌리, 원인의 원인에 해당한다. 구조의 범위를 넓히면 근본을 해결하는 데 몇 단계 더 심층의 뿌리와 원인을 드러내야 할지도 모른다.

사회적 결정요인이 불평등의 뿌리인 한, 건강과 질병은 의학과 의료, 보건 영역에 머무를 수 없다. 낮은 임금과 소득, 나쁜 주거, 작업환경, 장시간 노동, 비정규 노동과 고용 불안정과 대결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낮은 임금과 비정규 노동이 우연한 개인 사건이 아니라 구조 문제라면 사회적으로는 이 체제를 개혁해야 뿌리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

‘근본’ 개혁은 우리 사회의 해묵은 과제이니 여기서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건강에서 출발하자면 건강 불평등을 드러내고 이를 다른 사회적 불평등과 연결하는 작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야 한다. 그래야 건강 불평등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 뿌리 원인 또는 공통의 원인을 바꾸는 실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건강 정치

먼저, 사회적 불평등이 흔히 건강, 즉 몸으로 발현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하겠다. 소득 불평등, 교육 불평등, 노동조건의 불평등은 잘 알려진 사회적 불평등이지만, 통계를 통해야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사회적이며 그만큼 추상적이다. 임금 수준과 노동조건이 어떠니 하는 추상적인 불평등은 물류센터 노동자의 코로나19 유행이라는 건강(몸과 마음)의 불평등을 통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소득, 임금, 고용, 노동 불평등이 몸에 새겨져(‘각인’) 감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건강 불평등의 형태로 사회화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정의(또는 윤리) 측면에서 건강이 다른 사회적 불평등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소득이나 교육은 그 자체로는 정당함과 부당함, 정의와 부정의의 근거를 제시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일종의 도구적 가치들이다. 이와 비교해 건강은 (부분적이지만) 내재적 가치를 가지는 삶의 한 측면으로 볼 수 있다. 행복이나 안녕, ‘좋은’ 삶과 마찬가지로 건강은 내재적 가치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 (도구적) 인간 활동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한 가지 잣대로 쓰인다.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누려야 하는 건강의 권리를 차별한다는 점에서, 건강 불평등으로 이를 초래한 소득 불평등의 부당함과 부정의를 끌어낼 수 있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다른 불평등은 건강 불평등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중요한 사회적 과제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만에 하나 건강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소득과 임금 불평등을 용인하자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건강 불평등은 대체로 다른 사회적 불평등이 오래 축적된 후 가장 늦게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직 병이 나지 않았다고 해서 나쁜 냄새나 소음을 참으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며, 건강검진에 이상이 없다고 장시간 근무가 무해하다고 할 수 없다.

불평등이라는 건강 현상을 통해 사회적 요인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데, 대표적 예가 비정규 노동이다. 비정규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대안으로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말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경제나 고용, 노동만 고려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건강 불평등의 시각에서 보면, 정규 노동과 비정규 노동 사이에는 소득이나 물질적 조건을 비슷하게 맞춘(조정한) 후에도 건강 불평등이 나타난다. 비정규 노동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더 낮은 임금의 문제를 넘는다는 뜻이다. 건강 현상을 통해 비정규 노동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이는 비정규 노동을 둘러싼 정책과 실천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영향을 미친다.

건강 불평등을 ‘정치화’해야

건강과 질병은 개인사일 때가 많으나 건강 불평등과 질병 불평등은 집단과 사회의 현상이라 해야 한다. 누가 누구보다,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과 비교하여, 어떤 사회가 어떤 다른 사회보다 건강과 질병이 어떻다는, 말하자면 적어도 둘 이상을 비교해야 드러나는 분포이자 관계를 가리킨다.

집단과 사회적 현상은 개인이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내가 당한 사고, 가족이 진단받은 질병, 직장 동료의 검사결과가 직접적이고 경험적이라면, 불평등이라는 집단적 현상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일종의 지식이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피부에 와닿지 않고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예를 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정신건강이 불평등하다는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지? 건강 불평등이 흔히 규범, 가치, 이념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닌가 한다.

건강 불평등은 어렵다! 건강 불평등이 (모두가 중요성을 인정함에도) 좀처럼 사회적 과제가 되지 못하고 정책적 동력이 없는 첫째 이유다. 연구가 적지 않고 정부의 정책 목표에도 자주 포함되지만, 바뀌어야 하고 좋아져야 한다는 여론과 운동은 미미하다. ‘정치화’야 말로 불평등을 둘러싼 이론과 실천의 최대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정치화를 위해서는, 역설적이지만 지식과 ‘지식 권력’ 확대를 핵심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소득 불평등과 건강 불평등은 지식으로서 비슷한 속성을 지니지만, 지식 권력의 정도는 다르다.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믿으며 실천한다는 것이 권력의 크기를 나타낸다면, 소득 불평등의 지식 권력은 건강 불평등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건강 불평등의 정치화란, 그리고 그 단기 목표는 소득 불평등의 경우를 선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