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 특별 인터뷰

오래된 활동가의 호기심과 연결
– 백도명, 어떤 차이와 어떤 공감

박한솔, 남준규 ∥ 노동건강연대 상임활동가

 

 

노동건강연대에 들어온 지 한 달 남짓한 때, ‘과학의 이름으로 약자의 곁에 서는’ 이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너무 멋있다며 사무국에서 호들갑을 조금 떨었는데, 인터뷰 주인공이 노동건강연대와 연이 깊으신 인물이었더라고요. 어느덧 시간이 흘러 병아리 활동가는 ‘근속 1년’을 앞두고 있는데요, 거의 한 해 전에 떤 호들갑의 대가로 「노동과건강」 100호 한 꼭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전수경 편집위원장이 함께 인터뷰에 가주신다고 해서 덥석 미끼를 물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저 혼자였습니다. 베테랑끼리 만나면 인터뷰가 재미없게 나온다나요. 절대 혼자서는 못 갈 것 같아 제 뒷자리에 계신 남준규 활동가를 급하게 찾았습니다. 이렇게 1, 2년 차에 갓 접어든 박한솔, 남준규 두 활동가가 질문과 고민을 안고 백도명 (전)상임대표를 만나고 왔습니다.

백도명 선생을 이야기할 때 따라오는 수식어를 많이 보셨을 겁니다. ‘노동자들의 의사’, ‘피해자와 함께하는’, ‘대항과학자’ 등 다양한 수식어는 그가 걸어온 길에 붙은 이름입니다. 노동자 건강권이 결국 인권의 문제라고 말하는 그는 2003년에 노동건강연대 상임대표를 맡았고, 그해 여름에 「노동과건강」이 복간되었습니다. ‘복간을 준비하며’라는 꼭지에서 그는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기준을 이야기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볼 수 있는 열어짐과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닫힘”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나눌 수 있겠다고 말이지요. 2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이름도 얼굴도 새로운 활동가들을 마주한 그는 여전히 ‘역지사지’의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백도명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

석면유해성 연구(1992)
포스코 광양제철소 태인동 지역주민 건강조사 보고서(2004)
진폐환자 요양관리 실태조사 및 진폐합병증 범위에 관한 연구(2005)
시화·반월공단 주민 건강영향연구(2006)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역학조사(2009)
수정만 stx조선산업단지 환경영향평가서 전문가 검토(2009)
제주의료원 간호사 유산 관련 역학조사(2011)
가습기살균제 피해 조사(2012)
원전 주변 주민 건강영향조사(2014)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옥시 영국 본사 항의 방문 동행(2015)
라돈침대 피해신고자의 암유병 현황 분석 조사(2020)

● 날짜: 2021년 6월 2일 수요일
● 장소: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 인터뷰: 남준규, 박한솔 상임활동가

 

“서울대입구역에서 5511번 버스를 타고 수의대/보건대학원 앞에서 내리면 됩니다. 전화를 주면 마중 나가 같이 가도록 하면 어떠할까 싶네요.”

백도명 선생이 메일로 보내준 자세한 설명이 무색하게 두 길치 활동가는 정거장을 헷갈렸습니다. 하필 낮 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랐던 날이라 카메라 가방까지 메고 있던 남준규 활동가가 땀을 좀 뺐습니다. 보건대학원 건물 앞에 다다르자 마중을 나와계신 백도명 선생이 보였습니다. 저희 얼굴을 모르시니 인사를 할 듯 말 듯 엉거주춤, 저희도 백도명 선생을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라 긴가민가했습니다. 첫 만남의 어설픈 공기를 큰 인사와 꽃다발로 조금 덜어내고, 점심 담소를 엿볼까 싶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밥만 먹었습니다. 인터뷰는 식사가 끝난 뒤, 백도명 선생의 연구실로 자리를 옮겨 진행했습니다.

 

꽃다발을 건네받으며 의아해하는 백도명 선생의 모습. 동선상 밥 먹는 곳까지 꽃다발을 들고 다니셔야 했는데, 아는 사람을 만나니 꽤 쑥스러워하셨다는 후문.

 

박_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이후에 계획하고 계신 것들이 있으세요?

백_ 사실 학교에 있으니까 가르치는 일을 했잖아요? 직업병이든 무엇이든 그게 어떤 것인지는 교과서대로 가르치지만, 우리나라가 겪어왔던 일들이나 좀 다른 점들 내지는 ‘현실적으로 이렇게 하는 게 맞겠다’ 이런 것을 조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정리하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요. 아마 퇴직하고 1년 정도는 걸려서 해볼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필요한 곳에 가서 조사든 환자를 만나든, 하던 일을 비슷하게 조금씩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_ 보편적인 흐름 외에 한국이 겪은 일들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던 거예요?

백_ 단적인 예로, 굉장히 분명하게 ‘이건 전형적인 직업병이야’, ‘석면으로 인해서 석면폐가 문제가 됐어’ 그런 케이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단이 잘 안 되거든요? 그랬을 때 ‘아, 단순하게 교과서대로 하는 게 전부 다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 안 되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좀 다른 내용, 필요한 내용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되죠.
문제가 해결되려면 원인과 대안이 같이 지목되어야 해요. 원인만 지목하면, 많은 경우 이미 사람들이 알아요. 근데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그냥 문제를 갖고만 있었던 거예요. 직업이나 환경적인 요인 중에 전형적인 건 텍스트에 많이 정리되어있어요. 그런데도 해결이 안 되는 이유를 가만히 보면 결국 그런 거예요. 대안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그냥 사람한테 돈을 주고 도와주면 되는 건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지, 바꿔야 하는 건지 아니면 책임을 묻거나 바꾸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대안을 같이 고민해야 하더라고요. 원인을 지목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게 우리나라 나름대로 정리되어야 할 것 같아요.

남_ 그 대안이라는 게 기술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노동건강연대에서 말하는 ‘불평등문제’에 기반한 대안일 수도 있을 텐데 어떤 식의 정리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백_ 그죠. 지금 말씀하신 대로 ‘노출되지 않으면 괜찮아, 더이상 다루지 마’ 또는 ‘밸브 잠그고, 다르게 작업하면 돼’ 이런 것도 대안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노출됐는데 그건 문제가 없는 거야?’ 내지는 ‘앞으로 다시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이 사람만 그런가? 다른 사람들은 어때?’ 그런 식의 질문이 생기게 되죠.
그게 단순히 우연에 의한 게 아니라 불평등과 구조적인 면 때문이라면, 이번에는 해결이 되어도 다시 상황이 바뀌면 똑같은 식으로 흘러갈 수 있어요. 이런 문제를 일부는 풀어봤다고도 생각이 들고, 많은 부분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대안을 만들고 풀어나가는 과정도 한 번에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고요. 단계나 계단처럼 올라서야 하는 것 같아요. 해보고 부딪히면 다시 또 올라가서 다시 해야 하는 거죠.

박_ 요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삶에서 투입한 노력에 비례하는 결과가 항상 나오지는 않지만, 운동은 더 그런 듯해요. 선생님은 그럴 때 절망감이나 어려움 같은 것들을 어떻게 견뎌내셨나요?

백_ 맨 처음에는 직업병 운동에서 보상만이 대안이었어요. 보상받느냐, 안 받느냐. 그렇게 되면 아주 위험한 사람들은 일부 보상이 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논란이 많이 돼요. 아직도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들한테는 해줄 게 아무것도 없고요. 문제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으니까요. 근데 문제는 계속 있는 거예요. ‘왜 예방은 안 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사회가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보상’을 하고 나면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넓혀지는 시점이 오더라고요. 바뀐다는 느낌이 들었던 게 세월호였어요. 그분들이 ‘우리는 보상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원인 조사를 요구한다’라고 말하는 게 굉장히 신선했어요. 재해를 당하고 나서 그 원인이 무엇인지 조사해달라는 것은 그전에는 별로 없었거든요.

박_ 의학이나 과학이 노동자 건강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기술적인 것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데,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고 그동안 활동하신 건가요?

백_ 음… 그런 게 필요한 것도 있죠? 그런데 기술적인 게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정하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자면, 삼성 반도체에서 백혈병이 생겼을 때 삼성에서는 발암물질을 쓰지 않았다, 측정상 아무 이상이 없다고 주장했거든요. 무엇이 발암물질이고, 그걸 어떻게 측정하는지는 기술적인 논리인데, 발암물질이라는 것이 두부모 자르듯이 딱 끊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어떤 물질은 사람한테는 위험성이 잘 조사가 안 되었지만, 동물한테는 조사된 물질도 있고, 동물한테 조사된 것도 근거의 범위들이 다른 것들이 좀 있고. 실제로 전체 스펙트럼을 다 보고, 어떤 식으로 측정이 되었는지 보면 빵꾸가 굉장히 많아요. 이러한 지점에서 기술이 모든 걸 담보하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기만 해도 논리가 무너질 수 있거든요. 그 논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목적으로 이용하는지에 따라서 다른 건데, 기술을 만능주의처럼 이야기하게 되면 ‘아니다’라고 말하는 역할을 제가 했던 것 같아요.

박_ 선생님께서 ‘가치판단에 따른 선택을 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라고 말씀하신 걸 본 기억이 나요. 그게 어떻게 어렵지 않을 수 있으셨어요?

백_ 글쎄요. 모르겠어요. 전문가 내지는 지식인의 한계점이라 할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말하는 게 틀리지만 않으면 상대가 누구든지 제대로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내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결정이나 의견을 내리는 게 어려워지는데, 판단의 근거를 검토했을 때 내가 한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은 것 같아요.

활동가들에게 손수 커피를 내려주고 계신 백도명 선생의 모습. 평소에 혼자 커피를 드실 때는 이 기계를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박_ 전문가, 지식인을 언급하셔서 드리는 질문이에요. 전문가 혹은 지식인, 노동조합이 2021년 지금 노동자건강권 운동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백_ 우선은 ‘전문가’라는 게 전문가와 비전문가로 딱 구분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았거나, 깊이 할 수 있거나 등 경험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요. 시민과학자 내지는 시민이 직접 조사나 측정에 참여하는 것도 가능한 것 같아요. 측정의 기전이나 표시하는 방식에 전문용어나 수식이 많아서 공유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과정에 역할을 담당해서 참여하는 건 누구든 다 가능할 것 같아요. 전문가의 논리가 어떻게 보면 아주 복잡하지는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전문가들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기 분야를 나누는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고 전문가 역할이 없어지는 건 아니고요. 다른 사람이 다 대체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같이 하는 방식이 되겠죠?
노조하고 전문가의 역할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었는데 이제 노조가… 뭐라 그럴까. 우리 사회에서 ‘고용’이라는 권력관계가 단순히 노동이나 시간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인격적이거나 개인적인 삶을 다 지배해요. 그 문제를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우니까 집단으로 노조를 통해 구성원들의 관계를 민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이었죠. 예전의 노조는 단순히 노조라기보다는 노조 활동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구성원 간 관계에 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경험보다는 좀 더 이해에 치우친 듯한 활동들이 되어버리니까 한계나 문제가 생길 수가 있겠죠.
직업환경의 유해인자 ―화학물질이든 부담스러운 활동이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든 독성물질과 인체공학적인 문제들과 사회심리적인 스트레스― 가 그냥 그 자체로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과 결부되어요. ‘일’이라고 하는 게 할 수 없이 사회적인 조건과 유해인자가 결부되게끔 매개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조건, 매개하는 조건을 바꾸지 않는 한 상당히 어려운 거 같아요.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집단적인 활동을 통해 노조가 맨 처음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바꿔나가는 작업이 필요하지요. 이런 면에서 전문가나 노조의 역할이 필요한데, 현재 시스템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보기보다는 이해관계의 문제만을 다루는 집단이기주의처럼 되니까 전문가도 노조도 욕을 먹는 것 같아요. 그런데 뭐, 그런 문제는 언제든 있었겠죠?

박_ 과거에는 고용이라는 관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를 노동조합이 품으려고 했었다면, 지금은 좀 더 조합원을 챙기는 식으로 가는 거네요. 요즘 ‘MZ세대의 새로운 노조’가 기존 노조와 별개로 노조를 만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새로운 흐름은 어떻게 보시나요?

백_ 제가 사실은 정확하게 다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긴 한데요. 노사 관계가 가지고 있는 힘의 역학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들과 여러 가지 측면으로 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차별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잖아요? 남녀 간의 문제, 외국인, 지역주의… 그런 모순들과 다 연결되어있는 것 같아요. 그동안 우리 사회가 힘의 역학 관계를 평등하게 하는 사회가 아니라, 그냥 기존에 있었던 걸 그대로 인정하거나 그 안에서 작동되는 식으로 끼리끼리 좋은 게 만들어지는 사회였던 것 같아요.
신세대가 그런 면에서 뭐라고 할까요. 좀 이상하게 이야기가 되는데, 평등함, 공정성 이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하게 되잖아요. 페미니스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남자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교육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많은 논란이 있는데요. 결국은 저는 역지사지를 하면 기존의 힘이나 논리가 가지고 있는 모순들은 드러난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노동에 이 문제를 지적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또 권력자예요. 아버지로서, 남자로서, 내지는 그럴듯한 사회적 인물로서 굉장히 큰 권력자예요. 아이들한테 대하는 거라든가 하는 걸 거꾸로 역지사지해보면 내가 밖에서 이야기하는 것의 부당함을 똑같은 지적을 받는 그런 거거든요. (웃음) 그런 면에서 새로운 세대가 노조를 따로 만들고 지적하는 것도 의미는 있는데, 서로가 역지사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_ 역지사지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웃음) 페미니즘을 잠깐 언급하셨는데, 노동건강연대는 예전부터 여성노동자의 건강권에 관심이 많았더라고요.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과는 좀 달랐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백_ 맞아요.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소위 반응이, 대안이 뭐냐 하면 ‘모성보호’예요. 여자를 특별하게 취급하는 것이지, 그 환경을 개선해서 남성과 똑같이 일할 수 있게끔 하는 게 아니었어요. 다른 후속적이고 더 근본적인 대안없이 모성보호를 하라는 건 일 시키지 말고 집에 가서 쉬게 하라는 말이지요.

박_ 그런 분위기였는데도 계속 여성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이야기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백_ 그게 문제니까요. 사실은 지금도 제대로 잘 되고 있진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가령, 유산이나 기형 문제가 어떤 특정 직업에서만 막 높은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문제가 꽤 있는데, 특정 직업으로 보자면 간호사나 병원 내 여러 직종을 보면 높아요. 반도체 종사자도 높아요. 그러니까 뭔가 문제가 있는 거거든요? 화학물질이든 교대근무이든 근무환경이든 문제 될 수 있다는 걸 아는데, 그걸 드러내놓고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하기까지가… 아직 잘 못하지요. 아까 얘기한 모성보호 식으로 ‘일 시키지 마’ 이렇게 되니까요.
이번에 코로나19도 아프면 쉬고, 이상하면 쉬라는 거 아녜요? 그런데 유급휴가가 없으면서 그냥 쉬고 접촉하지 말라고 하면 그거 뭐 굶어 죽으라는 이야기지요. 쉼에 대한 대안이 없는데 그냥 접촉하지 말라는 건 굉장히 모순적인 대안이 되죠.

박_ 방금 하신 ‘그게 문제니까요’ 이 말 너무 좋네요. 캐나다에서 트뤼도 총리가 구성한 내각에 소수자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으니까 기자가 왜 이렇게 구성했냐고 질문을 던졌을 때 총리가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라고 말한 일이 떠올랐어요. 거의 그 느낌이었어요. (웃음)

 

박_ 너무 저희가 궁금한 것만 여쭤보는 것 같은데, 선생님 최근 관심사 같은 게 있으세요?

백_ 지금 노건연에 들어와서 활동하니까 어때요? 배운 게 뭐가 있어요?

박_ 배운 거요? 배운 건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저는 노동이나 해고같이 전형적인 노동운동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주로 관심을 가졌어요. 그러다가 노동건강연대에 왔는데, 막상 들어와서 보니까 건강 문제가 훨씬 더 큰 범주고, 복잡한 층위가 있다는 걸 알았고, 계속 배우고 있어요. 더불어서 여기 남준규 활동가는 노무사이시거든요. 예전부터 노건연에 전문직인 분들이 많이 계셨더라고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직업적인 전문성이 어떤 걸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노건연의 기존 활동 기조가 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뭐가 있을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백_ 인권 감수성을 높이면 할 거는 많아요.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나중에는 결국 ‘인권’의 문제인 거 같아요. 그런 걸 뒤집어보고, 들여다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할 일은 굉장히 많아요.

남_ 저도 활동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아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불평등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김용균 노동자가 돌아가셨을 때 그 일을 계기로 노동건강연대에 인연이 닿았는데요, 처음에는 ‘노동자가 적어도 일하다가 죽지는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들어왔어요. 그런데 여러 선생님이 결국 ‘건강 문제는 불평등의 문제’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긴 한데, (일동 웃음) ‘불평등의 문제’라는 말이 와닿았어요. 불평등이 건강에도 영향을 주지만, 여러 불평등과 불평등한 구조가 있다는 걸 근래에 많이 느끼고 있어요. 최대 고민은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하는 게 옳은 것인가에 대한 거예요. 제 친구들한테 뭐라고 이야기를 해줄까 이런 고민도 있고요.

백_ 글쎄 말이에요. 본인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든, 불평등에 처하게 하는 것은 뭐가 없는지부터 이야기를 꺼내면 친구들한테도 훨씬 더 와 닿을 거란 생각을 하긴 하는데요. 모르겠어요.
요즘 ‘그린뉴딜’이라고 이것저것 하는데, 기존에 갖고 있던 부정의·불평등 중에 환경적으로 다시 봐야 할 것들이 전부 그린뉴딜에 포함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아주 선택적으로, 돈이 될 수 있는 것들만 포함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더 문제를 악화시키거나 나 몰라라 하는 느낌이 들어요. 요즘에는 소각장이 도심에는 하나도 없어요. 대개는 아주 한적한 시골 농촌에 만들었죠. 그러고 나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니까 ‘좀 참아라’ 이거거든요. 모두가 살기 위한 측면에서는 소각장이 돌아가는 게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다음 세대에 환경문제를 넘겨주거나, 다음 세대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인데도 농촌에 있는 세대에 환경문제를 넘겨주거나 하는 경우들이 꽤 많더라고요. 그런 거는 참… 내가 살면서 부끄러워해야 하는 불평등인데. 잘 모르죠. 나 자신도. (웃음)

박_ 밀양 송전탑이 생각나네요.

백_ 그렇죠. 지금 집에 들어앉아서 따뜻하고 유쾌하게 잘 사는 게 사실은 다른 문제를 떠넘기고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걸 자각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박_ 요즘 관심 있는 일이나 사회적 문제가 있으신가요?

백_ 지난번에 가습기 살균제 무죄판결이 나서 다시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변호사들과 같이하는데 이야기할 게 많네요. 쉽진 않은데, 그게 지금 해야 하는 거고, 글쎄 다른 건 또 뭐가 있는지… (웃음)

박_ 중요한 일을 맡고 계시네요. 무죄판결에 대한 반박 내용을 새로 구성하셔야 하는 건가요?

백_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재판장이 보기에, 변호사가 보기에 따라 다르게 결론을 내리니까 같은 자료라도 상대방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일이 필요한 것 같아요. 새로운 자료를 가지고 구성하는 일도 필요하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꽤 오래되었긴 하지만 안 풀리는 그런 것들도 있으니까요.

박_ 그렇게 안 풀려서 마음에 담아두고 계신 사건도 많으시죠?

백_ 아, 교훈이 되는 사건이긴 한데 전라북도 남원 내기마을이라고 하는 곳을 조사한 적이 있어요. 조사해서 문제가 있다고 말했지만 결국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시 돌아보면서 ‘이게 왜 못 변했을까’ 이런 생각을 지금 많이 하게 되는데요. 처음부터 대안에 대한 틀을 갖고 가서 채우는 작업 없이, 그냥 원인 조사만 하고 ‘이게 문제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라는 느낌이 많이 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건 변한 게 있고, 어떤 건 내기마을처럼 하나도 안 변한 것도 있고. 그래서 변한 건 왜 변했을까, 안 된 거는 왜 안 변했을까 그걸 잘 정리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내기마을과 아스콘 공장

전북 남원시 이백면 내기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70여 명 중 1999년부터 2013년 사이에 17명이 암 진단을 받고(7명이 폐암), 15여 명이 사망했다. 주민들은 내기마을 인근에 자리 잡은 아스콘 공장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공장 가동 중단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했다. 국립암센터에서 수행한 사전 조사로 내기마을 폐암 발생률이 높은 것으로 드러나자, 2014년 질병관리본부와 남원시가 백도명 교수에게 역학조사를 맡겼다. 2년에 걸친 조사 결과, 아스콘 공장을 비롯한 내기마을의 주변 환경(고압송전탑 등) 요인과 유해 물질이 암 발병 위험요인으로 확인되었으나 남원시는 폐암 발생 위험요인과 아스콘 공장과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 남원시는 유해물질을 기준치 이하로 철저히 관리하겠다고 말했지만 적절한 방안은 없었다. 다른 대책 역시 가정 내 환기, 금연클리닉 운영 등 위험요인 제거와는 무관한 쪽으로 마련되었다.

박_ 바라던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다음을 향해서 갈 수 있는 이유가 있으세요? 이상윤 대표님은 오래 운동하려면 희망을 잃지 않되 ‘비관’을 기본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혹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키워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백_ 아까 원인 내지는 인과관계를 강조했는데요. 생각대로 안 되었을 때 ‘왜 그렇지?’, ‘뭘 잘못했지?’, ‘어떻게 다음에는 바꾸지?’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조금 나은 것 같아요. 단순한 비관이 아니라 무엇이 달랐는지 물으면서 배울 점을 찾는 거죠. 인생의 많은 것들을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죠. ‘애인이랑 이번엔 뭐가 달랐을까?’ (일동 웃음) 우연이나 개인적인 성향보다는 원인 중에 조금 더 구조적인 면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박_ 구조적인 문제를 보면서 노동건강연대나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많이 정계로 가시잖아요. 어떤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백_ 논의 자체는 정치권으로, 행정적으로 좀 옮겨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실행되는 과정은 또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논의가 실제 실행된다는 건 그 안의 시스템을 만드는 건데,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훨씬 더 길고 피드백이 훨씬 더 많지요. 올라가야 하는 스텝들을 생각하면서 진행해야 하고, 한꺼번에 쭉 되는 것 같진 않거든요. 그래서 논의는 됐지만, 실행이 순탄하게 되진 않는 것 같아요.

박_ 처음에 여쭤보려고 생각했던 것들은 웬만하면 다 여쭤봤네요.

백_ 아 그래요? 그런 질문하려고 왔었어요? (웃음)

박_ 네. 그런 것도 하나 해주세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노동자 건강권 운동이란?” 이런 거요. 글자 수 제한은 안 드릴게요. (웃음)

백_ (웃음) 글쎄요. 뭐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나요. 음… 많은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게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이다. 내지는 비를 안 맞게 하는 게 아니라 같이 비를 맞고 가는 거라든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나도 건강하고, 나와 너, 우리가 다 건강한 구조를 같이 만들어나가는 일이지요. 이걸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건강’이라고 하는 게 실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많은 경우 노조나 특히 이런 활동하는 사람들이 사는 게 굉장히 불건강해요. 그렇게 본인이 건강하지 못하면 운동도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박_ 처음에 연락받으셨을 때 어떤 질문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아마 김명희 선생님이 연락드렸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냥 ‘활동가들이 인터뷰하러 갈 겁니다’ 이러셨던 건가요?

백_ 그런 것 같은데요. (일동 웃음)

박_ 연락받으셨을 때 선생님이 생각하셨던 게 혹시 있으셨어요?

백_ 글쎄요. 연락받았을 때는 활동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옛날이야기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거보다는 좀 더 뭐랄까 후기 같은 느낌이네요.

박_ 후기, 소회, 플러스 미래. 이런 질문이었죠. 저희가 궁금해했던 것들이어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했어요. 엄청 오랫동안 계속 한 길을 오셨으니까요.

백_ 그렇죠. (한숨)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기보다는… 같이 살면서 나누어주는 그런 게 있어야겠지요. 그게 실제 대답일 텐데,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박_ 계속 말씀하시느라 힘드셨을 것 같아요. (웃음) 아, 가기 전에 혹시 선생님 MBTI 알고 계세요?

백_ 저는 그걸 잘 믿지는 않아요. (남_ 해보셨어요? 문항 체크 같은 거) 해봤던 것도 같은데 기억을 잘 못해요. 사실 제가 MBTI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은데. (웃음)

박_ 저희도 엄청 심각하게 여쭤본 건 아니고요. (웃음) 궁금해서요.

백_ 왜요?

남_ 다른 게 아니라 선생님 인터뷰를 하자고 할 때, 제가 질문을 엄청 많이 고민했거든요. 가장 궁금한 건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하실 수 있는지였어요. ‘개인적인 요인이 있었던 걸까?’ 하면서요. MBTI가 일종의 성격 테스트잖아요. 원체 선생님이 타고 나신 성정 때문인지 궁금했거든요.

백_ 아아

남_ 취미나 좋아하시는 거 있으세요?

백_ 신문에 도서 섹션이 있어요. 한겨레는 금요일이고, 경향은 토요일 아침에 배달된 신문에 있는 도서 섹션을 읽으면서 내 생각과 맞춰보는 걸 해요. 그러다가 책의 내용이 잘 이해가 안 되거나, 잘못되었다거나,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궁금하면 그 책을 사서 한번 읽어 보는 게 재밌었어요. 하다 보면 일주일이 쫙 가요. 그럼 다음 주에 또 하고. (웃음)

박_ 선생님 취미도 되게… (웃음)

남_ 그냥 일반적으로 ‘독서’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글 읽기 같아요.

박_ 스타일이 드러나는 글 읽기네요.

남_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시고 마무리하면 어떨까요?

백_ 처음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궁금증이었던 거 같아요. 호기심이 어느 순간에는 다른 존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른 존재의 마음이 되어 보고, 다른 존재의 생각을 내가 해보는 것까지도 연결이 되더라고요. 그걸 통해서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노동자 건강권의 문제도 맨 처음에는 기술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돈이 없어서인지, 어떤 체계 때문인지 생각하다가, 나중엔 결국 인권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결국은 호기심에서 출발해서 상대의 마음에 가보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살고 있는지를 보는 과정에서 답을 얻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_ 역지사지네요.

백_ 비슷하죠?

박_ 해주신 답변 중 많은 부분에 역지사지가 묻어나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걸 느꼈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백_ (힘주어) 예. 알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