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내 곁에 산재] 손이 잘려나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전수경 활동가
에어컨이 없는 반지하 작업장에 선풍기가 돌아간다. 왼손은 봉투를 잡고 오른손으로 책자를 봉투에 넣는다. 왼손을 쓸 수 없는 강송구씨는 손가락 두 개가 있는 오른손이 요긴하다. 왼손이 거의 없는 박용식씨는 오른손으로 일을 다 한다. “온다고 말만 하더니 이제야 왔네. 빨리 끝내고 삼겹살에 소주 먹으러 가자.” 작업장에 도착한 나를 맞이하는 입가엔 반가운 웃음이 가득하다. 작업 속도가 빨라진다. 새참으로 사간 팥빙수가 녹고 있다.
강송구·박용식씨의 작업장은 ‘산재노동자 자활공동체’라는 곳이다. 이들은 2005년 우편발송 대행업체를 만들어서 사업자등록을 했다. 노동조합, 사회단체들이 만드는 신문, 홍보물, 월간지 같은 일감을 받았다. 서울시 구로구 남구로역 근처 반지하 작업장에 많을 때는 15명 남짓한 장애인이 모여 일을 했다. 건설현장에서 눈을 다친 노동자가 한 명, 봉제공장에서 허리를 다친 노동자가 한 명 있었다. 그 외는 금형이나 사출 공장에서 손을 다친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손 모양, 손가락 수는 다 달라도
여러 번 손을 다쳐 열 손가락 중 한두 손가락이 남아 있는 노동자가 여럿, 팔꿈치 아래 어느 부분에서 손목 흔적만 있는 노동자가 여럿, 한 손은 성하고 다른 한 손은 손가락이 거의 없는 노동자가 여럿이었다. 손 모양, 손가락 수는 다 달랐지만 분업할 때는 분업, 협업할 때는 협업이 체계적으로 맞춰지는 전문 발송업체였다. 매출을 올리면 산업재해 상담, 병원 방문을 위한 활동비로 일부를 떼어놓고 나머지를 일한 만큼 나누었다. 병원 방문과 상담은 산재 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는 후배 노동자들을 만나러 가는 활동이었다. 요일별로 조를 짜서 수도권 일대의 병원으로 다친 노동자들을 만나러 다 녔다.
“병원에서 서로 만나잖아. 그러면 생각해. ‘어, 쟤는 손목이 없네. 나는 그래도 손가락 하나는 있는데. 쟤보다 내가 낫네.’ 새끼손가락 하나가 부러졌다고 난리를 치는 애가 들어왔어. (손가락 없이) 주먹만 남은 내 손을 디밀었더니 조용해져. 이렇게 서로 위로하는 거야.” 박용식씨는 말한다. “못다 한 얘기도 많고, 화나고 다 부수고 싶거든. 자살도 많이 해.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모여서 얘기하고 상담도 하잖아. 그래서 자살을 안 해.” 병원에서 퇴원한 노동자들이 작업장으로 찾아와서 못다 받은 산재급여 상담도 하고, ‘노동자’에서 ‘장애인’이 된 뒤 겪는 후유증을 털어놓고 간다.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게 작업장 문은 늘 열려 있다. 반지하 계단 옆 넓은 창문에도 빛이 잘 들어온다.
강송구씨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서울에 올라왔다. 열 살 때 몸의 왼쪽에 마비가 온 뒤로 걸음도, 왼손 사용도 힘들었다. “시골엔 할 게 없잖아. 부천, 안산 공장을 찾아다니면서 일자리 좀 달라고 했지. 일을 안 줘. 한 손으로 일할 수 있냐고. 부천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서 하고 싶으면 해보라 하더라고. 문 연 지 얼마 안 된 공장인데, 일한 지 한 달 됐나? 반장이 좀 와보라고 불러서 물건을 빼는데 오른손이 딸려 들어가. 소리를 질러도 사람이 안 와. 시끄러우니까. 팔은 계속 기계 안으로 딸려 들어가는데.” 1992년이었다.
박용식씨는 서울에서 공고를 졸업했다. “바로 취업했지. 일머리가 있었거든. 금속 밀링 하는 회사에 들어갔는데 하루는 저녁에 관리자가 도와달래. 꼭 내가 안 해도 되는데 요거까지만 해주자 하고 기계를 만지는데 왼쪽 팔이 딸려 들어가더라고. 소리를 질러도 안 와. 시끄러워서 안 들리니까 누가 와서 기계를 세울 때까지 몇 분이 지나갔는지 몰라.” 병원으로 온 어머니를 보고 울음이 터졌다. 그 후로는 울지 않았다. 병원에서 만난 노동자들과 산재 보상을 공부했다. 1993년 일이다.
쥐어지지 않는 주먹이라도 함께라면
강송구씨는 성하던 오른손마저 잃었고, 박용식씨는 왼쪽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위태롭게 연결돼 있다. 손목을 남기고 손등이라도 남기는 수술을 하기 위해 두 사람 모두 2년이 넘는 시간을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다. 배의 살을 떼어내고 다리의 살을 떼어내서 팔에, 주먹에 붙였다. 강송구씨는 손을 다친 다른 동료들을 만나 우유 배달을 했다. 박용식씨는 호프집도 해보고 주점도 해봤다. 음식 솜씨가 있어서 장사도 잘될 줄 알았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 만난 노동자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고 산재 상담을 하고 노동조합의 전국 집회에 깃발을 들고 나갔다. 1987년쯤에 만들어진 단체에는 장애 입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더러는 떠나갔다. 주먹을 들고 ‘노동해방’ 같은 구호를 외쳤던 것도 같다. 쥐어지지 않는 주먹이었지만 모여 있어서인지 부끄럽지 않았다. 그렇게 만나서 흩어지지 않은 노동자들이 ‘산재노동자 자활공동체’를 꾸려나갔다.
남구로의 작업장을 정리하고 구로역 인근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작업장도 작아졌지만 가장 섭섭한 건 주방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내가 해주는 밥을 두 그릇씩 먹었잖아.” 주방 담당이던 박용식씨는 자신이 만든 끼니마다 왁자하게 밥을 먹고 막걸리를 마시던 기억이 뿌듯하다. “일도 못하면서 일부러 밥 먹으러 왔잖아.” 다정다감한 강송구씨는 박용식씨의 밥이 맛있었다고 칭찬한다. 흰쌀밥이 수북하게 올라온 대접과 두부김치, 제육볶음 같은 것이 식탁으로 쓰던 작업대에 올라왔었다.
산재 노동자의 아이들에게 해주고픈 말
해가 갈수록 운영이 어려워졌다. 종이신문이 이메일 뉴스레터로, 월간지가 온라인 웹진으로 바뀌면서 인쇄소 트럭이 작업장에 오는 일도 줄어들었다. 자동화 업체들이 대형 일감을 가져가는데 수작업을 하는 발송업체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 일감뿐이다. 사람을 줄이지 않기 위해 일하는 날을 줄이고 나누는 돈을 줄였다. 버티던 노동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강송구, 박용식, 이종선(가명)씨는 마지막까지 작업장을 해보겠다고 남았다.
셋이 남아서 꾸려가는 발송대행업체는 일주일에 하루이틀 일감이 있을 뿐이다. 공동체가 흩어진 지금 함께 나갈 수 있는 집회도 깃발도 없다. 흩어진 이들의 소식이 더러 들려온다. 사고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많다.
강송구씨는 가정을 꾸려 초등학교 1·2학년 남매가 있고, 박용식씨도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있다. 아들은 아빠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 한다. 박씨의 아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아빠는 자신도 보듬으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한 따뜻한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