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내 곁에 산재] 다리를 절단했다, 역도 ‘무제한 체급’으로 몸을 만들었다

공업고 현장실습부터 시작해 조선소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추락해 오른쪽 다리 절단… 산재연금은 딱 최저임금 수준

전수경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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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열여덟의 전나라수는 현장실습을 나갔다. 정보통신을 배우고 있기에, 기대를 했다. “케이티(KT)에 실습 나갈 줄 알았는데 전기회사에 나가서 형광등 가는 일을 했어요.” 그래도 돈 버는 게 좋아서 실습을 그만둔 적이 없다. “친구들은 나이키, 노스페이스 옷 입는데 나는 못 입으니까 돈 벌어서 입고 싶었어요.”

스무 살부터는 본격적으로 돈벌이에 나섰다. “백령도에 들어가서 비닐하우스 설치도 하고, 고속도로 아스콘(아스팔트 콘크리트) 까는 일, 차선 도색하는 일… 팀을 짜서 다녔어요.” 가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버지 친구가 기술을 가르쳐주겠다고 불러서 송풍기를 설치하는 공사장도 따라다녔다. “거기서 우연히 아버지도 만났어요. 아버지가 있는 줄 모르고 갔는데 만난 거죠. 술도 마시면서 말도 통하고 기술도 아버지가 많이 가르쳐줬죠.” 집에 잘 안 계셔서 만날 수 없던 아버지를 노동의 현장에서 만났다.

인천이 고향인 나라수씨는 지방에서 일하면 숙소도 제공되고 친구들 만날 일도 없으니 돈을 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많이들 가거든요. 인터넷을 보니 현대중공업 1차 협력사라고 뜨더라고요. 울산으로 갔어요.” 막상 가니 1차 협력사 밑에, 재하청업체 밑에, ‘물량팀’이라는 비정규직 팀의 막내 잡부 일이었다.

수술만 14차례… 사장은 산재 신청 말려
“한방에 네 명씩 살아요. 방값은 5만원씩 내고, 쌀은 팀장이 사다줘요. 반찬은 우리가 사먹고요. 일도 배우다보니 재밌어요. 어쩌면 (원청업체에 직접 고용되는) 직영도 될 수 있으니까.” 배 만드는 일 가운데 가용접을 해서 뼈대를 세우는 ‘취부’ 일을 배웠다. 3년 동안 업체를 세 번 거쳤다.

2013년 비 오는 봄날이었다. “아침인데, 조선소는 비 오는 날엔 일을 안 하거든요. 반장이 불러서 저것만 옮기고 들어가자고 하더라고요.” 어깨에 자재를 둘러메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미끄러웠다. 발이 엉켰다. ‘쾅’ 소리. “추락했어요, 2층밖에 안 됐는데. 비 오는 날 작업하면 안 되는데,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오른쪽 발목을 다쳤다. 구급차에 실려 회사 산업재해 전담 병원으로 실려갔다. 떨어진 순간부터 하청업체 사장은 산재보험 청구하지 말자고, 공상(노동자가 업무 수행 중 다쳤음을 이유로 회사가 민법상 손해배상을 하고 합의하는 것) 처리하자고, 평생 책임진다고 막무가내로 나라수씨를 졸랐다. 큰 부상인 것처럼 보이지 않던 다리가 쉽게 낫지 않았다. 사장한테 욕먹어가면서 산재를 신청했다.

발목이 변형되고 통증이 찾아왔다. 눈물이 쏟아질 만큼 아팠다. 여러 병원을 옮겨다니며 검사에 검사를 했다. 수술만 14차례 했다. “아픈데 원인을 모르겠대요. 마약성 진통제로 버티다가 결국 원인을 찾아냈는데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이라는 병명이래요.”

의사는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했다. 바람만 스쳐도 자지러지게 아픈 다리를 끌고 다시 산재 심사를 받으러 갔다. “정말로 아픈지 꾀병이 아닌지 의사들이 눌러보고 만져봤어요. 그 자리에서 기절했어요.” 어느 병원은 ‘엉덩이 아래로 다 잘라내야 한다’고 했다. 어느 병원은 ‘허벅지는 조금 남길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 병원에서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잘랐다.

절단장애인이 되어 정부가 운영하는 인천 산재병원에 입원했다. “전기 만지다가 하반신이 마비된 형, 롤러에 깔린 형, 공사장에서 발목이 절단된 동생들…. 심리상담한다며 모아놓고 ‘당신은 장애 몇 급인데 연금은 얼마 받겠네’, 이런 거 가르쳐주더라고요.”

취업 막막… 말뿐인 ‘장애인 우대’
당시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병원을 방문했다. “병실 대표로 (장관이랑 만나는 자리에) 나가래요. 사진도 찍고, 병원비 본인부담금이 너무 많다, 500만원이 나왔다고 얘기했죠. (장관이 본인부담금을) 없애주겠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정말로 없어질 줄 알았어요.” 그 뒤로 장관은 소식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재활로 컴퓨터나 목공을 배우라고 했다. “나는 몸 쓰는 일을 좋아하는데, 두 손은 성하니까 무조건 컴퓨터만 하래요.” 노동법·산재법을 혼자 공부해 병원에서 필요한 동생들한테 가르쳐주고, 손이 없는 형님들 목욕도 시키고, 화장실도 같이 가줬다. 산재를 안 해준다는 상담이 오면 해당 업체를 찾아가기도 했다. “노동자면 산재 처리해주는 게 당연한데 왜 안 해주냐”고 따졌다. 바로 산재 처리가 됐다. 병원에 입원한 산재 환자들끼리 서로에게 인권위원이 되고 사회복지사가 돼줬다.

2019년 산재 치료가 끝나고 병원을 나왔다. 연금으로 한 달에 58만원이 나왔다. 최저임금을 받다보니 연금도 딱 최저다. 다치고 잘린 서른 살, 병원에서 알게 된 스무 살 동생들이 재산으로 남았다. “이 카톡방은 ‘절단’ 방이에요. 한 명 빼고 다 절단.” 나라수씨가 카톡방을 열어 보여준다.

일을 찾아야 했다. 비영리 공익재단 ‘아름다운재단’에서 산재노동자 생계비 지원을 조금 받았다. ‘학교보안관 구함, 장애인 우대’ 공고를 보고 전화했다. “다리가 좀 불편하다고 했더니 걸을 수는 있냐, 티가 나냐 묻더라고요. 절단됐지만 잘 걷는다고 했죠. 전화 준다고 끊더니 연락이 없어요. 장애인 우대는 왜 붙여놓는지.” 일을 구할 수 없었다. 산재병원을 먼저 나가서 운동하는 형이 장애인 역도를 소개해줬다. 운동을 시작했다. 재미있었다. 무제한 체급으로 몸을 만들었다. 에스케이(SK)에코플랜트 장애인선수단에 취업했다.

나라수씨는 인천 송내역에서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역에 있는 서울시장애인체육회까지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의족이 보이지 않으니 지하철에서도 서서 가야 했다. 반바지를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힘든 날 택시를 타면 ‘쯧쯧’ 소리를 듣지만 어쩔 수 없다.

장애인아시안게임 출전이 꿈
절단수술을 하고도 독립적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혼자 살았다. 방값이 모자라 어머니와 합쳤다. “제가 낼 때도 있고, 어머니가 낼 때도 있고, 생필품 같은 건 서로 보태서 사고.” 어머니는 월급 받는 병원 청소 일을 찾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방문을 열더니 “태어날 땐 다리가 둘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작은 일도 도와주려고 한다. 나라수씨는 돈을 모아서 다시 혼자 살 방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가 있어서 운동을 평소처럼 하기는 어려웠다. 수도권 운동시설은 모여서 방역지침 때문에 연습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집에서 쉬지 않았다. 2021년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웨이트리프팅, 파워리프팅 동메달 두 개를 땄다. 최근엔 190㎏을 들었다. 2022년 중국 항저우 장애인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나가고 싶다. 스포츠용 의족을 쓰면 좋은데 비싸서 바꿀 수 없는 게 문제다.
‘나라수’는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라고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나라수씨의 오른쪽 다리는 십 대에서 이십 대까지 고된 노동을 버텨줬다. 다리가 사라진 자리에 회복력이 돋아났다.

“무제한이라 괜찮아요.” 그는 쟁반 가득 빵을 쌓아놓고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