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소셜코리아] 멀쩡한 성인이 옷에다 실례라니… 당황스러웠다

제때 먹고, 씻고, 용변 볼 권리조차 박탈당한 우리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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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조카가 어느 날 지역신문 기사를 하나 보여줬다. 너무나 형편없는 자기네 학교 급식 사진이 ‘드디어’ 신문에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교내 방송으로 교장 선생님이 사과도 했으니 이제 급식이 맛있어질 것 같다며 신나 했다. 진수성찬 급식을 몰라보고 시금치 투정이나 했던 초등 시절의 자신을 나무라는 뒤늦은 성찰까지 덧붙였다.

밥에 진심인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 출연한 코미디언 김신영씨는 예능과 영화 현장의 차이를 묻는 인터뷰 질문에 “식은 밥이 아니라 항상 따뜻한 밥이 나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도 얼마 전 ‘직원 사기진작’의 일환으로 구내식당에서 점심 특식을 제공한다는 공지가 떴다. 흰 쌀밥에 국수국(?), 군만두 반찬이라는 탄수화물 3종 세트, 맛없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김치볶음밥과 오므라이스조차 맛이 없었던 일련의 충격 후 발걸음이 뜸했던 구내식당이었다. 코로나19 유행 기간 내내 이곳은 한산하고 엄숙했다.

하지만 별 기대 없이 조금 이른 시간 찾아간 그곳, 배식 줄이 건물 출입구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고, 식판을 들고도 자리 잡기는 전쟁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 강남 맛집도 이 정도는 아니잖아? 사람들은 예상 못 한 열기에 당황하면서도 특식 전쟁에 뛰어든 서로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깟 특식이 뭐라고… 근데 다들 밥에 진심이구나. 그래 이 맛에 회사 다니는 거지. 뭐 엄청 큰 걸 바라는 건 아니잖아?

“제때 밥 먹게 해달라”

 

그렇다. 12첩 수라상은 아니더라도 제때 따뜻한 밥 한 끼 먹기, 눈치 보지 않고 깨끗한 화장실에서 용변 해결하기, 무더위에 지쳤을 때 잠깐 시원한 바람 쐬며 앉아서 쉬기. 대단한 사치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이들이 굳이 권리인지 생각할 필요 없이 누리는 것들이기도 하다.

법률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국정감사 준비를 하는데 점심시간이 너무 짧아서 밥을 제대로 못 먹고, 화장실 개수가 적어서 줄 서다가 휴게시간이 끝나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마땅히 쉴 곳이 없어서 나무 그늘 아스팔트 길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웠다는 이야기 역시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도 이런 것들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이들, 혹은 감내하면서 일하는 이들이 있다. 비데와 안마의자를 설치해달라거나 디저트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화장실 좀 만들어달라고, 제때 밥 좀 먹게 해달라고, 제발 앉아서 쉴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플랜트건설노조 경인지부가 지난 6월 발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4공장 실태조사 결과와 여러 언론이 전한 작업장 모습에 분노보다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아니 화장실을 못 가서 멀쩡한 성인이 옷에다 실례를 했다고?

연세대학교에서는 노동자들의 시위 소음 때문에 학습권을 침해당했다며 재학생이 노동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500여 명의 청소노동자들이 일하는 캠퍼스에 샤워 시설 딸린 휴게실은 단 두 곳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들의 지하 휴게 공간에 에어컨과 환풍기가 설치된 것은 작년 여름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이 일어난 이후였다.

일하는 동안 더러운 것을 만지고 땀을 흘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땀 냄새와 엉겨 붙은 머리, 끈적임을 씻어내고 퇴근길 동료 시민을 만나는 것조차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드라마 <미남당> 제작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요구한 것은, 밥 좀 제시간에 먹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 수면 시간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동료 인간에게 이렇게 무례해도 되나

‘노동자’이기에 앞서 1인당 국민총소득 3만 5천 달러를 넘겼다는 나라의 ‘시민’이 이런 상황을  감내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직무 유기가 아닐 수 없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로 하여금 노동자들이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휴식 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시설”을 갖추도록 정하고 있다. 또한 환경미화 노동자를 위해 세면·목욕, 탈의·세탁시설을 갖추도록 정해두기도 했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내달 8일부터 시행 예정인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사업주의 휴게시설 설치를 의무화하고, 적용 대상과 위반 시 처벌조항까지 마련했다. 하지만 여전히 적용 제외되는 사업장이 많고, 면적이나 거리, 성별 분리 여부 같은 구체적 설치 기준이 제시되지 않았기에 노동인권 단체들의 우려가 크다. 실효성 확보를 위해 후속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아쉬움과 별개로, 대체 이런 규제가 어디까지 촘촘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몰려드는 것도 사실이다.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고, 용변이 급하면 화장실에 가야 하고, 땀과 먼지로 뒤덮이면 씻어야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상식이자 인간 유기체의 본능인데, 일일이 법으로 대상과 규격을 정하고 처벌조항까지 마련해야 한다니 말이다. 동료 인간에게 이 정도로 무례해도 되는 것일까?

 

필자소개: 이 글을 쓴 김명희는 예방의학 전문의로서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관심 영역은 건강불평등, 노동자건강권, 보건의료의 공공성이다. 한국건강형평성학회의 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사회역학>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예방의학의 전략> <과로자살> 등의 번역서와 <보건의료 사유화: 불편한 진실> <한국의 건강불평등>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 등의 책을 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