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23.5.11]
300㎏ 운반차 천번 밀어야 닿는 천원의 행복
다쳐도 눈치 보며 일하는 노동여건 바꾸려 노조 설립
다이소는 어디에나 있고 일상에서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있다. 얼마 전 비옷을 사러 다이소에 들렀다. 1천원 하는 화분과 2천원 하는 욕실매트를 지나치지 못했다. 사람들이 들고 선 저마다의 바구니도 ‘천원의 행복’인지 물건이 빨리 찬다. 서울 명동의 다이소 매장은 12층까지 있다. 미용·인테리어·캠핑 용품, 조리도구, 공구에 여행용품까지 쇼핑 순례객의 필수 코스라 한다.
2023년 5월7일 만난 이재철(56)은 다이소 물류센터에서 일한다. 오며 가며 보이는 다이소 매장들에 넘치도록 채워진 물건이 저절로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겠구나. 당연히 있는 듯 보이는 것의 뒤에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다.
이재철이 다이소 물류센터에 들어간 때의 나이는 쉰 살, 이제 7년차가 됐다. 명함을 받으니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다이소물류센터지회 지회장’이라 쓰였다. 이재철의 또 다른 직업은 광고사진을 찍는 사진작가, 만난 곳도 그의 스튜디오가 있는 서울 충무로였다.
낮에는 사진작가, 밤에는 물류센터의 물류 배분 노동자. 이재철이 인터넷에 ‘알바몬’을 쳐본 것은 사진 스튜디오의 수익성이 떨어져 부채가 생기고 어머니마저 혈액암으로 투병하면서였다. 잡지사에서 그래픽디자이너를 하면서 직접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사진이 좋은 평을 받으면서 전업 사진작가로 자리잡았다.
광고사진을 찍는 일은 사진을 의뢰한 기업의 역사와 제품 철학을 이해해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종합예술 같은 것이다. 그만의 사진 원칙이 생기고 좋아하는 일로 수익을 내니 성취감이 컸지만, 동시에 광고시장에 진입하는 경쟁자가 많아지고 광고주의 요구도 세분화돼갔다. 사진 스튜디오 유지비가 점점 늘고 어머니 병원비로 재정적 한계상황에 이르는데도 이재철은 사진을 놓고 싶지 않았다.
사진을 계속하고 싶어 생각해낸 것이 야간에 다른 직업을 갖는 거였다. 알바몬은 다이소 물류센터 야간노동으로 이재철을 안내했다. 물류센터는 24시간 시스템이다. 야간노동 시급에는 50%의 추가 수당이 붙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밤 9시30분부터 다음날 새벽 5시30까지 ‘물류센터 노동자’라는 새로운 역할이 시작됐다.
인력업체를 통해 시작한 노동계약은 2년 계약직으로, 다시 정규직으로 바뀌었다. 임금은 법정 최저임금이 기준이었다. 야간노동 수당을 위안 삼았다. 처음 다이소 물류센터에서 일하며 의아했던 점은 자기 스케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날의 업무 스케줄을 그날 말해줬다. 잔업이 몇 시간 있다고 미리 알려주는 일이 그리 어려운가?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점은 현장과 사무직 사이에 차별과 차이를 두는 작업 문화였다.
물류 라인이 돌아가는 현장은 늘 일손이 부족하고 물량이 넘쳐났다. 사무실에선 할당량대로 일하라고 지시가 내려온다. 계획대로 일하라 압력을 가하지만 현장 상황을 알려주는 의사소통은 막혔다. 현장에서 오래 일하고 숙련된 사람들이 중간관리자가 돼도 사무실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시스템이 없고 성과를 평가하고 강등하는 시스템만 있었다.
현장 노동자들은 몸만 힘든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전국 다이소 매장은 1500여 개에 이르고 두 곳의 물류센터에서 24시간 물건을 공급한다. 이재철이 일하는 물류센터에서 하루 22만 상자가 나가는데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 1천 번 정도는 롤테이너(운반차)를 밀어야 한다고 이재철은 계산한다. 미치는 노동강도다.
롤테이너 한 차의 무게가 200~300㎏쯤 된다. 롤테이너 바퀴가 모두 말을 잘 듣는 것도 아니다. 몸 쓰는 노동을 더 낮은 일로 보는 분위기가 물류센터 전체에 깔려 있었다. 사오십 대, 내몰려서 온 사람들이라고 관리하기 쉽다고 생각한 것일까.
산업재해는 회사가 취합해 신청하는 식이었다. ‘이건 산재 아니다’라고 회사가 말하는데 산재 신청하겠다고 버틸 수 있겠는가. 사고가 나면 ‘안타깝다, 지원하겠다’는 말보다 ‘별일 아니니까 돌아가시라’고 말하는 직원들을 보며 ‘이렇게밖에 못하나’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롤테이너를 밀다가 팔목 인대가 늘어난 이재철의 동료는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는 회사에 맞서 싸우다시피 해서 산재를 따내고는 재계약이 안 돼 회사를 나가야 했다. 이재철도 2022년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연골이 파열됐다고 했다. 수술을 했다. 치료가 다 끝나면 산재를 신청할 것이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이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선지 그런 이들이 재계약이 안 되거나 번번이 주저앉았다. 이재철도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저절로 당연하게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말이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나왔다. 사진을 ‘내 일’이라 생각하면서 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그런 마음이었다. 왜 눈치 보면서 일하지? 일해서 돈 받는 거지 구걸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어느 정도 작업환경을 만들어줘야 하고, 작업환경이 안 되면 협의해 갖춰야 한다.
2022년 9월부터 동료들과 노동조합을 만들 준비를 했고, 2023년 1월 설립 신고를 했다. 회사는 물류센터 노동자 모두와 일대일 면담을 했다. 팽팽한 긴장으로 터질 듯한 시간이었다. 기업도 정부도 노동조합을 몰아치지만 그래도 노동조합은 만들어지고 있다.
다이소 물류센터의 부조리한 관행이나 최저임금 등은 조금씩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 2023년 4월 말, 노동조합이 선전전을 하는데 직원 단체문자 알림이 왔다. ‘다이소는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원만히 나아갈 것입니다.’ 함께하는 사무장이 든든하고 조합원들이 고맙다. 5월4일에는 회사와 상견례를 했다.
항상 잠이 모자라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넘기고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는 새벽길엔 때려치우고 울고 싶은 적이 없었겠냐고 하면서도, 이재철은 노동조합 지회장이 되어 있다. 며칠 걸려 찍은 사진을 보며 ‘이 힘든 걸 해냈구나!’ 사진을 포기하지 않게 했던 그 마음이, 지금 노동조합을 하는 마음이다.
글·사진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