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비 노동자’를 아십니까?’-“이제는 재료가 아닌 인간이고 싶다”

지자체들, 행자부 지침 맞추려 명목상 일시직 사실상 상시고용
저임금에 근로기준법 위반도 태반…“실태 파악…상용직화 시급”

매일노동뉴스

‘재료비’라고 들어보았는가. 무슨 비품 사용목록이 아니다. 민원서류발급, 공원관리원, 청사관리, 식당 조리원 등 지방자치단체에 고용된 사실상의 상시고용직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급여 항목이다. 월급도 아니고 일당도 아닌, 그래서 상용직의 절반수준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서 허덕이는 ‘재료비 노동자’의 실태와 문제점, 그리고 해결책을 살펴봤다.

“시청에서 일한 지 7년만에 재료비 노동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동안 인간이 아니라 재료로 취급됐구나!’ 하고 생각하니 설움이 북받쳐 오르더군요. 연월차 수당이 없어 60만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받는 것도 참기 힘든데….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경기도 화성시청에서 7년째 민원서류 발급원으로 일하는 박 아무개 씨. 박씨는 시 예산상 재료비로 책정돼 있는 소위 ‘재료비 노동자’다.

행정자치부 ‘지방자치단체 예산편성 기본지침’에 따르면 재료비 항목에는 광물 및 기타 특수한 물건의 구입비, 동물·식물 및 식물종자 구입비와 사료 구입비 등이 이에 해당되지만 ‘일시사역인부 예산편성’도 재료비에 속한다. 박씨 같은 경우, 바로 일시사역인부에 해당되는 것이다. 과천시 ‘비정규인력 관리규정’에 보면 좀더 자세한 설명이 있다. 규정 제2호(정의)에는 “비정규인력이라 함은 조례나 규칙 등에 의해 채용하는 전문인력… 300일 이상 사역하는 상용인부, 70일 이상 280일 미만 채용된 재료비 인부”라고 적혀 있다. 이처럼 ‘재료비 노동자’는 규정에 의하면 단기간 근로 계약을 맺고 있는 노동자를 말한다.

이런 ‘재료비 노동자’들이 각 지방자치단체에 상당수 근무하고 있으며 행자부지침, 규정과 달리 장기 고용된 상태로 있으면서도 저임금에 근로기준법조차 적용 받지 못해 논란이 되고 있다.

경기도노조는 정부가 상시고용 `재료비 노동자`의 실태를 파악해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하고 이들을 상용직화 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상시고용 재료비 노동자 현황파악 어려워

‘재료비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70일 이상 280일 미만의 단기간 고용된 노동자로 예를 들면 공공근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각 시의 예산에 맞춰 고용인원이 결정된다.

고양시청 예산담당부 한 관계자는 “지난해 1년 예산으로 46억원 정도가 책정됐고 인원은 공공근로를 포함해 650여명 정도로 추정한다”며 “부서마다 일정 정도 유연성을 두고 있어 정확한 수치 파악은 어렵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여기에 포함된 재료비 노동자들은 모두 단기고용 형태”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단기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산도 문제지만 이 가운데 3년, 7년씩 상시 고용된 노동자들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게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막상 시청 각 부서를 살펴보면, 재료비 노동자들은 모두 단기 고용 형태라는 시 예산담당자의 설명과는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예산은 재료비 형태로 책정돼 있지만 상용직 노동자와 같이 장기간 근로를 하는 ‘재료비 노동자’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경기도 고양시청 공원관리 부서에서 일하는 7명의 재료비 노동자들은 지난 99년 11월 입사해 지금까지 3년 넘게 일하고 있다. 화성시청 민원서류 발급 부서 17명, 식당조리 부서 7명, 수원시청 청사관리부서 15명, 오산시청 준설원 1명 등 경기도 내 각 시청마다 파악된 상시 고용 ‘재료비 노동자’들이 적게는 1년 미만부터 길게는 7년까지 장기 근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상시 고용된 ‘재료비 노동자’들의 현황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경기도노조(위원장 김헌정) 김인수 법률국장은 “조합원 모두 노조가 설립된 뒤, 본인이 재료비 노동자라는 것을 알게됐다”며 “(행자부)지침에 재료비 노동자를 상시 고용하지 못하도록 명시돼 있어 시에서 ‘쉬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국장은 또 “시 예산에 단기·장기근로 노동자가 혼합돼 있어 실태 파악이 더욱 어렵다”며 “경기도 내 시청 중에도 노조가 있는 곳만 겨우 파악이 되고 있어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살펴보면 엄청난 수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저임금에 근로기준법 적용 못 받아”

실제 행정자치부 ‘지방자치단체 예산편성 기본방침’에 보면 “일시사역인부를 어떠한 명분으로도 상시 고용하는 등 편법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행자부 지침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는 행자부 지침에 따라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재료비 노동자’를 사용하고 있으면서 정작 또 그 지침을 어기는 ‘기현상’을 연출하고 있다.

더구나 상시 고용된 ‘재료비 노동자’는 저임금에다 상당수가 근로기준법도 적용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 재료비 노동자는 상용직 임금의 절반도 못 받습니다. 다른 이유 없이 재료비 노동자이기 때문인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고양시청 공원관리원으로 일하는 유 아무개 씨는 긴 한숨만 내쉬었다. 왜 똑같이 일했는데 같은 일을 하는 상용직 동료 최씨 월급의 절반 밖에 받지 못하느냐는 게 그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도 답을 알고 있다. 유 씨처럼 재료비 노동자의 월 평균 임금이 낮은 것은 시에서 이들에게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등 상용직 노동자와 차별적인 대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료비 여성 노동자들의 실태는 한층 더 열악하다. 월 60만원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받고 있어 ‘생활고’를 겪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 중에는 전적으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60만원도 못 받고 있으니 생활이 되겠습니까?” 화성시청에서 민원서류 발급원으로 일하는 박 아무개 씨의 하소연이다. 이들은 지난 98년 IMF 이후 70만원 ‘박봉’에서 그나마 10∼20만원씩 임금이 삭감된 상태다.

더구나 이들은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연월차·보건휴가도 사용하지 못했으며 주휴수당도 지급되지 않은 등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먼저 법을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재료비 노동자인 화성시청의 민원서류 발급원들은 지난해 경기도노조에 가입한 직후 노동부에 근로기준법 위반 진정을 냈으며 “시는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수당 등 체불임금 6,0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아내기도 했다.

* 상시고용 재료비 노동자 제도개선 절실

이렇듯 기형적 현상으로 보이는 상시 고용 재료비 노동자들의 문제는 지난 98년의 구조조정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비정규직센터 이혜수 노무사는 “지난 98년 IMF 당시 각 지방자치단체 등 정부기관이 인력이 불필요해 구조조정을 했던 게 아니라, 내부 지침에 따라 현장 상황과 상관없이 인건비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목적이 더 컸던 것”이라며 “사람이 없어졌다고 일이 없어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혜수 노무사는 또 “인력이 부족한 부분에는 일시사역인부, 공공근로, 민간위탁 등 고용이 불안정하고 저임금의 비정규 노동자들로 무분별하게 채워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기도청의 한 관계자도 “경기도 인구가 늘지만 행정자치부의 상용직 배정 인원은 정해져 있어 재료비로 부족한 인력을 충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게 경기도노조의 지적이다. 노조 김인수 법률국장은 “정부가 탁상행정에서 벗어나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며 △상시고용 ‘재료비 노동자’의 실태를 파악해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하고 △이들을 상용직화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법률원의 강문대 변호사도 “(재료비 등이)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며 “내부에서 근기법 위반, 상시고용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정책적으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김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