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공사 근골격 질환자 요양 ‘방해’

정비사 31명 무릅.손목 등 통증 심각
공사쪽 노조.근로공단에 “보류”공문

서울시지하철공사가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다는 판정을 받은 31명의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내자, 이에 대한 승인 보류를 요청하는 공문을 노동조합과 공단에 보낸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서울시지하철공사 노동조합 지축차량지부는 23일, 공사쪽이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이아무개(35)씨 등 31명의 요양신청을 막기 위해 노조에 “요양으로 자리가 비면 비정규직을 고용해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고, 근로복지공단엔 “노조의 일방적인 조사로 객관성이 없다”는 등‘사실과 다른’ 의견의 공문을 보냈다고 밝혔다.

근골격계 질환은 허리, 무릎, 어깨, 손목 등 몸의 한 부분을 단순 반복해 쓸 때, 혹사당하는 근육과 관절에 참기 힘든 통증이 오는 병으로, 공기업 노동자들이 이 병으로 무더기 산재신청을 내기는 1996년 한국통신(KT)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산재신청을 낸 노동자들은 지하철 3·4호선 전동차 1110량을 정비하는 지축차량기지 정비사들로, 노조는 지난해 3월부터 한림대 산업의학과 권영준 교수팀과 함께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실태 조사를 벌여왔다.

권 교수팀은 조사 대상 29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현장분석 △임상진단 등의 기초조사를 통해 근골격계 질환으로 의심되는 환자 35명을 가려냈고, 이들을 정밀조사해 31명을 근골격계 질환자로 최종 판정했다.

이에 대해 공사는 지난 19일 노조에 “31명이 한꺼번에 요양을 가면 그 자리를 비정규직 등으로 채워야 해, 사람들이 돌아올 때 일자리가 없어진다. 이는 노사간의 심각한 문제이므로 (이달 말) 조합장 선거가 끝날 때까지 집단 요양신청을 보류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또 근로복지공단에도 공문을 보내 “이번 요양신청이 노조의 일방적인 조사로 객관성을 잃었고, 요양신청이 받아들여질 경우 많은 노사 문제가 야기된다”며 요양승인 여부에 대한 결정을 보류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박양진 근로복지공단 서울강남지사 보상부 차장은 “건강 검진 내용을 정밀 검토한 결과, (검진 과정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에 공단은 검토 결과를 토대로 25일 전문가 회의를 열어 요양신청을 받아들일 방침이다.

노동자들을 검진했던 권영준 교수는 “조사 결과 환자로 판명된 사람들은 지금의 작업환경에서 계속 일을 하게 되면 신체 관절을 못쓰게 될 정도로 건강상태가 심각하다”며 “공사는 하루 빨리 환자들이 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작업환경을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종태 공사 급여복지팀장은 “이번 일은 노조가 사쪽과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일을 추진해 회사가 이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며 “아픈 사람들이 빨리 적절한 조처를 받을 수 있도록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2/24]

노동자건강권단체 항의성명

골병으로 고통받는 재해노동자에게 일자리까지 뺐겠다는 비도덕적 만행을 공사는 즉각 중단하라!!!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 보장! 근골격계 질환의 근본적인 예방대책 마련!

지난 2월 20일, 서울지하철공사는 지축 정비 지회 노동자 31명에 대한 근골격계 직업병 판정을 보류할 것을 근로복지공단에 요구하였다. 요구의 근거는 노동조합이 독자적으로 조사한 것이므로 이번 조사의 객관성에 문제가 있으며, 직업병 요양에 수반하는 여러 노사문제를 처리해야 하니 노동조합 선거가 끝날 때까지 직업병 판정을 연기하라는, 실로 억지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공사의 주장처럼 이번 조사의 객관성에 문제가 있다면, 근골격계 직업병으로 진단받은 노동자들이 꾀병이라도 부린다는 것인가! 노동조합 선거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요양에 수반되는 문제들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병들지도 아프지도 말라는 것인가! 게다가 공사에는 직업병 판정을 유보해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렇게 뻔뻔스러운 요구를 공공연하게 들이미는 의도는 무엇인가.

그 의도는 노동조합으로 보내온 또다른 공문을 통해 드러난다. 이 공문에서 공사는 지축 정비 업무가 근골격계 직업병을 집단으로 발생시킨 것으로 드러난다면 이 업무를 용역화시킬 것을 ‘심각하게 검토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31명이 집단 요양에 들어가면 그 빈자리를 비정규직 채용이나 부분 용역화로 메워서 ‘요양이 끝난 다음에 일자리가 없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집단 요양에 들어가면 근골격계 직업병 환자들은 물론 동료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도 보장할 수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사업주는 직업병 환자의 요양과 치료를 보장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예방 대책을 수립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서울지하철공사는 자기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는 것조차 모자라서 오히려 골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에게서 일자리를 빼앗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직업병이 집단적으로 발생한 업무 자체를 용역화시키겠다는 것은 또 얼마나 후안무치한 발상인가.

이번 조사에 참여한 273명 중 절반이 넘는 156명이 근골격계 직업병의 유소견자로 드러났고 이 중에서 무려 31명이 시급한 치료와 요양을 필요로 하는 환자로 나타나 요양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하철공사는 이토록 많은 노동자들을 골병의 위험으로 몰아넣는 고강도의 노동 조건을 고스란히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전가시키겠다는 것인가! 또한 집단 발병의 원인을 찾아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사업주의 책임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단 말인가!

게다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동료들의 고용안정을 위협받는 와중에서 과연 어떤 노동자가 자신이 직업병 환자임을 쉽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는 고용안정을 빌미로 하여 직업병 승인에 대한 노동자의 의지를 꺾고 현장으로부터 직업병 노동자들을 고립시켜보겠다는 서울지하철공사의 음험한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다른 모든 업종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울지하철을 비롯한 궤도 분야의 노동 강도 역시 인력 감축과 업무 다각화 등 구조조정의 미명 아래 나날이 강화되어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의 근골격계 직업병 투쟁을 통해 이러한 구조조정의 결과가 다름 아닌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에 대한 위협이라는 것을 수없이 확인하여 왔다.

그러나 서울 지하철 노동자들은 올해를 ‘흑자 경영 원년’으로 삼자면서 지하철공사가 제시한 [21세기 새로운 발전 도약을 위한 노사 협약서]를 72.6%의 압도적인 힘으로 부결시켜낸 바 있다. 더이상 구조조정의 일방적인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현장 노동자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번 근골격계 직업병 투쟁은 바로 그러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21세기 협약서] 부결 투쟁의 후반전이 되어야 한다. 근골격계 직업병 투쟁의 진정한 힘은 구조조정과 노동강도 강화로 인해 빼앗겼던 노동자의 건강과 현장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으로 만들어질 때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서울지하철의 근골격계 직업병 투쟁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아픈 사람이 당당하게 치료받고, 더 나아가 노동자 스스로 현장의 노동 강도를 완화시키는 주체가 되고, 그리하여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현장으로 바꾸어내는 투쟁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하는 것이다.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은 지난 부결 투쟁의 성과를 이어 공사의 어떠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현장 투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서울지하철공사는 환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직업병 승인을 미루려 했던 것을 즉각 철회하고 이에 대해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 또한 만에 하나, 지하철공사의 부당한 요구로 인하여 직업병 승인이 조금이라도 지체된다면 우리는 이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 서울지하철공사는 직업병 은폐 음모를 당장 중지하고 사과하라!
– 근로복지공단은 지축 정비 지회 31명 전원의 근골격계 직업병을 즉각 승인하라!
– 근골격계 직업병 예방을 위해 현장 인력 확충하고 노동강도 완화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