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도 다치지도 않고 일하고 싶다”
사지로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규
[현장] ‘죽음의 땅’에서 ‘산재 천국’으로 둔갑한 전남 여수산단

조호진 기자

▲ 폭발.화재사고가 발생한 LG화학 SM공장.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를 달라”

여수건설노조 사무실에 걸린 표어다. 동양최대 화학공단인 여수산업단지(이하 여수산단)에서 용접, 배관 등의 직종에서 일하는 120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산재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자신들의 처지를 이렇듯이 절박하게 호소하고 있다.

소위 ‘노가다’로 불리는 이들은 산재사고를 막기 위해 파업도 해보고 관계당국에 건의도 했지만 돌아온 것은 안전불감증에 의한 잇따른 산재 사망사고였을 뿐이라며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 생계를 잇기 위해 작업현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이 언제 희생될지 모르는 현실에서 동료의 죽음이 남일 같지 않다.

여수시가 발표한 71년부터 2001년까지 여수산단의 산재사고 현황에 따르면 88명의 노동자가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건설노조는 지난해에 20여명의 노동자가 산재와 환경사고로 숨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해로 인해 ‘죽음의 땅’으로 불리던 여수산단이 이제 ‘산재천국’으로 둔갑하면서 불안감을 더 조성하고 있다.

예견된 인재, 죽음의 행렬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

▲ 숨진 노동자의 아들은 영정으로 아빠를 만났다.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여수산단 산재사고의 희생자 대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다. 정규직 노동자가 회피하는 위험한 작업을 떠맡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화학공장의 특성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업현장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결국 원청 회사의 안전조치 미흡과 하청업체의 공기단축에 의한 대가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목숨으로 치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산재사고로 또 목숨을 잃었다. 노동계는 예견된 인재에 의해 또 한 명의 귀중한 목숨이 산재사고 제단에 바쳐졌다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하지만 사고 회사측은 적법한 도급계약에 의해 시공된 공사였다며 사고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기고 있어 유족과 노동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지난 12일 낮 12시 20분께 여수시 적량동 LG화학 SM공장에서 알칼리 드럼내부를 물로 청소작업 하던 도중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드럼 안에서 작업하던 황영환(44·여수시 군자동)씨가 그 자리에서 불에 타 숨지고 장정영(48·여수시 여서동)씨 등 2명이 중화상을 입고 전남대병원과 여수제일병원으로 각각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여수건설노조는 사고가 발생하자 사고회사 정문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투쟁속보를 통해 “더 이상 죽음의 행렬을 방치할 수 없다”면서 “안전불감증으로 예고된 참사를 방치한 노동부와 LG화학을 규탄한다”고 항의했다.

또 성명서를 통해 여수산단이 “2002년도에 여수산단 20여명의 노동자가 각종 사고와 직업병으로 죽어가고, 수많은 노동자가 부상당하는 산업안전보건법이 무시된 사각지대”라면서 “여수산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으로 작업을 하면서도 산업안전에 대한 대책 없이 현장에 투입되고 있다”며 이번 사고를 안전불감증에 의한 인재사고라고 주장했다.

노조는 이와 함께 △여수산단과 동부지구 전체사업장 특별안전점검 실시 △폭발사고 철저한 조사와 인재형 사고 재발방지 대책마련 △폭발사고 관련한 모든 책임자 처벌 △원청 및 하청 기업의 관리감독과 명예감독관 현장활동 보장을 요구하면서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전면투쟁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여수환경운동연합은 13일 “여수산단에서 발생하는 환경·안전 사고는 신설, 보수, 점검을 하는 동안 사고발생 가능성이 높은 것이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사전예방조치 없이 작업을 강행하다가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고 정부당국과 회사측을 규탄했다.

이 단체는 또 “노동자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생산활동에만 열을 올리는 여수산단의 현실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면서 “여수산단의 모든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여수시, 영산강유역환경청, 전라남도, 입주업체대표, 환경사회단체, 인근주민, 지역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종합적인 대책기구를 구성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공기단축에 의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졌는가”

▲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죽음의 행렬이 멈추어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여수건설노조는 15일 낮 1시께 부터 LG화학 SM공장 정문에서 700여명의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산업재해 추방 여수건설노조 결의대회’를 가졌다.

이날 참석한 노동자들은 “산재은폐 강요하는 사업주를 구속하라” “형식적인 안전점검 근로감독관 파면하라” “재발방지 약속하고 안전대책 수립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동료 노동자의 죽음을 분노했다.

또 사망한 황씨의 부인 박미자(46)씨를 비롯한 유족들이 집회장 분향소에 도착해 오열하며 몸부림치자 노동자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또 황씨의 외동아들(5)은 아버지의 영정을 손으로 어루만지는 등 아버지의 사망사실을 모르고 있어 주변을 가슴아프게 했다.

여수건설노조를 비롯한 노동계는 이번 사고가 인원감축에 의한 노동강도 강화와 안전불감증에 의한 인재사고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IMF이후 구조조정이 강행된 뒤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이 잇따르고 있다”며 “안전수칙과 안전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에만 매달린 부도덕한 기업이 불러온 산재사고”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수건설노조 문선식 위원장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공기단축에 의해 사라져갔으며 얼마나 많은 부상자가 평생 불구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노조에서 수 차례에 걸쳐 노동부와 회사측에 실질적인 안전예방조치를 취하여 줄 것을 촉구했으나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민주노총 전남동부지구협의회 김선태(41) 의장은 “산재사고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계속 희생되는 이유는 원청 회사의 인원감축과 공기단축이 가장 큰 이유다”면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위험한 작업을 기피하면서 하청을 넘겨받은 도급업체는 작업조건을 잘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무작정 투입하면서 산재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상황이다”며 관계당국과 기업에 안전작업 시스템을 시급히 갖출 것을 촉구했다.

여수건설노조 “회사가 사고현장 조작했다” 의혹제기

▲ 사고가 발생한 드럼의 맨홀. 노동자 황씨는 이 곳에 갇혀 숨졌다.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15일 사고 현장을 확인한 여수건설노조 관계들은 안전조치를 소홀히 한 채 노동자를 사지에 몰았다며 분개했다. 또 유족들은 회사측의 비인간적인 처사가 귀중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오열했다.

사고가 발생한 드럼은 한 사람이 들어가 작업할 수밖에 없는 좁은 구조였다. 이날 사망한 황씨는 비좁은 드럼 안에서 물 청소 작업을 하던 도중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사고에 의해 드럼에 갇혀 불에 타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수건설노조 이기봉(47) 부위원장은 “사고가 발생하자 회사측은 안전조치를 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밸브를 해체하고 가스배출구를 열어놓는 등 사전에 취할 조치를 사후에 취했다”고 주장하며 “회사측이 작업하기 전에 산소와 가스농도측정을 한 결과 제로(0)로 나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가스폭발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가”라고 회사측에 반문했다. 노조 측은 또 시신을 50분간 방치한 것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여수건설노조 조합원 김창석(45·제관공)씨는 “가스 주입구를 차단하고 출입구를 열어놓은 뒤 환풍기를 설치하고 작업해야 하는데도 회사측은 이런 과정을 생략한 흔적이 있다”면서 “이렇게 위험한 작업을 할 경우 48시간 가스제거 작업과 산소와 가스농도측정 그리고 스팀으로 24시간 가스제거 등을 한 뒤에 방진복 착용을 한 뒤 노동자를 투입해야 했다”며 안전조치를 무시한 게 사고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또 “회사들은 제품생산에만 초점을 맞춰 안전순서와 절차를 무시한 채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무리하게 투입하고 있다”면서 “여수산단 60∼70% 회사들이 이런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며 분개했다.

회사측 관계자들은 사고현장을 조작한 사실이 없다면서 구조작업을 위한 조치였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고원인과 책임문제에 대해서는 관계당국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산재사고 발생하면 하청업체에 떠넘기면 그뿐?

▲ 영정을 들고 사고현장에 도착한 노동자와 유족들은 회사가 사지로 몰아넣었다며 분개했다.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LG화학은 보상문제에 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하청업체가 모든 책임을 지도록 도급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족들은 도급업체와 보상문제를 협의해야 한다. 이번 사고를 책임져야 할 ‘(주)이손’은 보상능력이 열악한 영세업체로 알려졌다.

사고로 숨진 황씨의 큰형 황귀환(53)씨는 “너무 비참하게 죽은 동생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비통한 심정인데 LG화학은 모든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기고 있다”면서 “회사가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작업을 지시한 상황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법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점을 이용해 방관하고 있다”며 도덕불감증에 걸린 대기업의 모습이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여수건설노조 문선식 위원장은 “사고가 발생하면 원청 회사들은 법적으로 빠져나가도록 보장돼 있는 게 현실이며 하청 업체들은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다음 공사를 수주할 수 있다”면서 “부도덕한 대기업의 횡포에 의해 하청업체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희생되고 있는 만큼 사고회사 책임자의 처벌 등 근본적인 대책이 요구된다”고 강하게 촉구했다.

LG화학은 유족과 노조의 반발에 대해 “관계기관의 조사결과에 따라 잘못된 점이 있다면 해당 사항에 대해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며 “유사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보상문제와 관해서는 “안전사고 사업주인 (주)이손과 유가족간에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당사가 협의과정에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