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집배원들, 저임금·과로 이중고
비정규직 집배원, 전체의 50%로 늘어
고영일 기자
“집배원 대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입니다. 하는 일의 양과 시간은 정규직과 똑같지만 임금은 그들의 40∼60% 정도밖에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가 서울 S우체국 집배원인 서모(54)씨를 만나기로 한 시각은 지난 토요일(11월 1일) 오후 5시였다. 하지만 정작 서씨를 만난 시각은 오후 8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서씨는 이날이 토요일임에도 불구, 늦은 시간까지 우체국에서 업무를 봐야만 했다.
“하루에 집배원 한 명이 배달할 수 있는 등기 우편물의 수는 많아야 100여 통 안팎입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동료집배원 한 명이 지방세 등 등기우편물 2천여 통을 하루에 배달하다 쓰러져 병원에서 사망한 적도 있습니다.”
지난 1980년 서울의 모 우체국에서 고용집배원 업무를 시작, 우편배달의 길에 들어선 서씨는 그래도 이 날은 오히려 퇴근시간이 빠른 편이라고 설명했다. 서씨가 하루에 배달하는 우편물은 대략 2천여 통. 그러나 각종 요금청구서가 몰리는 날이나 연말연시, 명절 등이 되면 우편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동안 수십만Km를 오가며 약 600만 통에 이르는 우편물을 전달해오며 이 직업에 대해 나름대로 자부심도 많이 느꼈다는 서씨. 하지만 하루하루 늘어나는 과중한 업무량과 밤샘 노동 때문에 지금은 고질적인 소화불량과 근육통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경기도 A우체국 집배원 강모(56)씨 역시 지난해 연말 밤늦게까지 우편물을 분류하다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나 진단 결과 간암 말기로 판명, 현재 투병중이다.
강씨는 “지난 98년 정부의 구조조정 지침이 내려진 직후, 우체국 인력이 감축되면서 집배원들의 업무량이 크게 늘어났다”면서 “사정이 이러하니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것은 엄두도 못낸다”고 밝혔다.
서씨에 따르면 집배원들의 하루 일과는 보통 오전 6시 30분경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이들은 출근하자마자 당일 도착한 우편물을 분류한 뒤 3∼4개의 꾸러미에 우편물을 담아 오토바이에 싣고 배달을 시작한다. 이 때 가져 나오는 우편물 꾸러미는 40kg 정도. 꾸러미 안에는 00통신, 00카드, 00홈쇼핑이라고 적힌 게 대부분이지만, 요즘은 고향에서 보내는 선물들도 보인다고.
이들이 정해진 배달구역에 나가 배달을 완료하고 우체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시간은 오후 5시∼7시 사이. 이후 등기물 처리 내용을 기록하고 다음날 아침 배달할 우편물을 분류하는 작업을 해야하는데 이 작업을 마치면 시간은 밤 10시, 11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다.
게다가 앞으로 선거철이 다가오면 아예 우체국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도 있을지도 모른다며 서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듯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장시간 노동에 수많은 집배원들의 건강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최근 5년 사이 모두 200명에 가까운 집배원들이 질병과 교통사고 등으로 사망했고 1천여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허리디스크, 어깨 통증, 소화불량, 동상, 무좀 등의 각종 질병은 ‘분신’이고, 크고 작은 오토바이·빙판길 사고는 ‘연례행사’가 된 셈이다.
그러나 이 중 산재나 공상으로 처리된 사안은 불과 10%에도 지나지 않는다. 집배원들의 노동조건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현재 전국의 집배원은 모두 1만4천여 명. 지난 91년과 비교해 업무량은 배 이상 늘었지만, 수는 20% 증가에도 못 미쳤다. 이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6시간인 반면 휴일은 한 달에 2∼3일이 고작.
건강만큼이나 집배원들을 힘겹게 하는 것이 바로 비정규직 문제. 현재 전국의 집배원 수 가운데 50%인 7천여 명이 비정규직이다.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이전 전체 집배원 가운데 7% 정도이던 비정규직이 불과 6년 사이에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처럼 비정규직 집배원들의 수가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것은 98년 정부의 지침에 따라 우체국 현업인력 5천여 명이 우선 정리되고 그 자리에 별정직, 상시위탁직, 시간제 아르바이트 등 비정규직이 채용됐기 때문이다.
비정규 계약직이다 보니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이들에게는 호봉제도가 적용되지 않아 장기근무에 대한 실질적인 혜택도 없을 뿐더러 정규직에 적용되는 특별상여금도 없다. 게다가 시간외 근무수당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등 노동조건이 상당히 열악하다는 것이 강씨의 말이다.
“얼마 전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조의 한 간부가 비정규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분신 자살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본격 인식되었으면 합니다.”
하루 15시간이라는 긴 노동시간이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강씨는 그러나 “집배원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인권적인 노동환경이 하루빨리 철폐되어야 한다”면서 “특히 장기 근속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정규직 못지 않게 개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다한 업무로 사망하고, 쓰러지고. 망가지고, 임금 또한 제대로 받지 못하는 집배원의 현실. 이들에게 동절기 정규 근무시간인 ‘5시 칼퇴근’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