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는 왜 인권을 말하고 있나
인권위 출범 2년 노동문제 진정 잇따라…약 50건
절박함 안고 찾은 인권위, ‘문턱’ 높아 ‘상실감’ 커
노동자와 인권(人權).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 인간 선언’을 하며 스스로 몸을 불사른 지 3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노동자와 인권’이란 화두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지난 2001년 11월 정부 독립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출범한 뒤, 노동문제에 대한 진정이 잇따르고 있다.
인권위에 따르면 진정사건을 인권침해, 차별 등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노동문제 진정 건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인권위, 해당 노조 등을 통해 대략 유추한 결과, 50건 안팎으로 집계된다. 올 8월까지 인권위에 접수된 진정사건이 모두 6,121건인 점을 감안하면 노동계가 제소한 건수가 많지는 않다. 하지만 지난해 10여건에서 올 들어 30건이 넘어서는 등 해가 갈수록 진정건수가 늘어나고 있어 앞으로 ‘노동과 인권’ 문제는 큰 쟁점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자주 언급하듯,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왜 노동자들은 3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인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노동관련 정부기관 제 역할 못해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노동부, 경찰, 법원 모두 두드려봤지만 삼성이라는 큰 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삼성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고 그 고통이 어떠했는지 알리고 싶었죠. 명분없는 구조조정으로 한 인간의 권리가 어떻게 박탈됐는지 낱낱이 공개하고 싶었습니다. 인권위는 우리에게 마지막 ‘보루’ 같은 존재입니다.”
삼성생명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해복투) 임언정씨는 긴 한숨부터 내 뱉는다. 조합원 30여명이 지난 5일부터 8일 동안 중구 을지로 1가에 위치한 인권위에서 농성을 벌였다. 지난 5년 동안 해볼 수 있는 투쟁은 모두 다 해봤지만 여전히 그들은 해고자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손배가압류만 남았으며 ‘마지막’이라는 모진 마음을 먹고 국권위 진정과 함께 단식농성을 진행했다. 해복투는 “지난 98년 구조조정 당시, 삼성생명이 임신, 출산여성, 장기근속, 기혼, 고졸, 사내결혼 중에 있는 여성노동자들을 집중 해고했다”며 “여성인권 유린, 여성차별”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이 법원에 제기한 ‘해고무효소송’은 이미 패소했으나 투쟁은 멈출 수 없었고, 당시 몰랐던 여성차별 등 상황을 이제서야 인식, 인권위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지난달 30일 남대문경찰서가 삼성생명을 대신에 허위 집회신고를 냈다며 이 부분에 대한 조사를 인권위에 진정해 놓은 상태다. 해복투 임언정씨는 “그 동안 노동부, 언론, 경찰에게 당할 만큼 당했다”며 “인권위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용기를 내 본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막연한 ‘희망’으로 인권위 문을 두드린 노동자들은 많다.
지난달 2일, KT의 5,500여명 대대적인 구조조정 과정에서 ‘명예퇴직 종용’을 받았다며 22명이 인권위에 진정을 했다. “인권위는 양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봅니다. 이미 다른 문제로 노동부, 법원의 힘을 빌려 봤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거죠. 노동부와 법원이 우리 같은 없는 사람 편이겠습니까. 제 역할도 못하는 정부기관에 기대고 싶지 않습니다.” 인권위에 제소한 KT 명퇴자 ㅂ씨의 솔직한 말이다. 이들은 인권위에 대한 신뢰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노동문제와 연관된 정부기관의 불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비정규직, 인권의 사각지대
“아직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노동법도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해결될지 모르겠지만 갈 곳이 인권위밖에 없었습니다.” 보건의료노조는 지난달 7일 서울대병원이 최근 간병인 무료소개소를 사설업체로 전환한 데 항의하는 간병인들에게 폭력과 협박을 일삼았다며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인권위에 제출했다. “이게 특수고용형태 노동자의 현실입니다. 사측의 협박을 당해도 부당노동행위 논란조차 되지 못해요. 노동자가 아니거든요.” 노조 최경숙 조직국장은 ‘맞고, 협박’을 당해 인간적 모멸감을 느낀 이들이 찾아갈 곳이 인권위 ‘하나’밖에 없다는 점이 더 서글프다고 토로한다.
이처럼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뿐 아니라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노동자들도 인권위를 찾는 횟수가 많다. 바로 차별의 문제 때문이다. 정규직과 동일한 노동을 하지만 임금, 근로조건이 현저히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대학 시간강사, 건설일용노동자, 학교급식시설 일용직 영양사, 임시직 환경미화원 등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인 ‘평등’을 주장하며 인권위를 찾았다.
이같이 잇따른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인권 찾기’ 움직임에 인권위는 지난 3월부터 공공부문 비정규직 차별에 대한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토대를 만들기 위해 공공영역이 민간영역을 선도한다는 의미에서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공청회를 거쳐 정책 권고를 할 계획이다. 인권위는 기존 진정된 사건만 처리하던 소극적 활동에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노동과 인권 ‘불가분’
인권위에 진정을 낸 노조들은 공통적으로 “노동문제와 인권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 같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인권은 당연한 권리인데도 자칫 무감각하게 잊고 지내듯 노동자들 또한 인권의 문제를 별개로 취급해왔던 측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권위가 생기고, 노동과정, 노조활동 등에서 노동법과 고소고발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발생하면서 서서히 ‘인권’을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발전노조도 마찬가지다. 노조는 지난해 4월, 38일간 파업을 중단하고 업무에 복귀한 뒤, 회사 쪽이 조합원들을 상대로 ‘불법파업 참가를 시인한다, 징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서약서를 강요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참 막막했습니다. 노조의 정당한 투쟁을 회사는 서약서를 통해 부정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서약서를 작성한 조합원 4,500여명은 인간으로써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를 갖고 어디에 호소를 하겠습니까. 헌법에 노동 3권과 인권의 문제가 언급됐듯이 노동문제와 인권은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습니다.” 발전노조 김현진 홍보실장은 “노조 활동을 하다보면 회사의 반인권적인 모습으로 “이건 아닌데” 할 때가 많았지만 딱히 호소할 때가 마땅치 않았다며 인권위가 그 ‘빈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밖에 노동자들은 아무리 집회를 하고 선전을 해도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던 언론이 인권위에 내기만 하면 보도를 해주는 것도 인권위 진정의 주요 이유라고 지적했다. 또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인정을 받으면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는 점과 전혀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 진정 과정이 간편하다는 측면이 노동자들을 자주 찾게 만든다고 전한다.
그러나 국가인권위 ‘문턱’도 높다
상당수 노동자들이 인권위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이들의 진정이 모두 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인권위를 마지막 ‘보루’라고 찾아온 노동자들의 상실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르면 진정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이 크게 두 가지다.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또는 구금 보호시설의 업무수행(국회의 입법 및 법원?헌법재판소의 재판을 제외한다)과 관련, 헌법 제10조(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인권) 내지 제22조(표현의 자유)에 보장된 인권을 침해당한 경우와 법인, 단체 또는 사인(私人)에 의해 평등권 침해 등 차별행위를 받았을 때다. 이에 따라 공공부문이 아닌 사기업의 인권침해는 진정 대상이 될 수 없다. 또 진정 사건이 재판, 수사기관 수사 중이거나 법률에 따른 권리구제절차가 진행 또는 종결된 경우는 해당이 안 된다.
삼성생명해복투가 이미 재판이 끝난 5년 전 구조조정 문제를 인권위에 진정한 것은 조사 대상에 오를 수 없는 것이다. 또 사기업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던 노동자를 대상으로 작성된 ‘블랙리스트’도 인권침해의 측면보다 이로 인한 불이익 등 차별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 밖에 법원, 검찰뿐만 아니라 노동위원회에서 조사 중이거나 종료된 사건은 인권위가 다시 거론할 수 없다.
“(5년 전) 그 때는 인권위가 없었잖아요. 또 법원에서 다툰 것은 해고무효소송이었지만 인권위 진정은 차별이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인데 왜 조사대상이 아닌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해복투는 인권위에 대해 기대가 높았던 만큼, 실망도 컸다고 한다.
지금까지 제출된 노동문제 진정 약 50건 가운데 절반가량이 대상 불가 등의 이유로 조사조차 시작되지 못하는 등 인권위 ‘문턱’은 노동자들에게는 높은 상태다.
이에 대해 다산인권센터 송원찬 상임활동가는 “인권위가 인권의 개념을 너무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며 “다른 국가기관에서 조사된 것을 인권위가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공권력의 인권침해를 감시한다는 인권위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인권위 보다 적극적 활동 기대
인권위 또한 이러한 한계들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니겠냐는 입장이다. 인권위 육성철 사무관은 “출범한 지 2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6,000여건의 진정 사건이 쏟아지는 등 사회적으로 ‘인권’이 많이 목말랐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조사 대상도 한정되고 어렵게 조사해도 법의 구속력이 아닌 권고로 그치고 있는 등 한계를 인정한다”고 토로했다. 육 사무관은 이어 “조사관 1명 당 100여건의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인권위의 또 다른 현실”이라며 “노동계, 인권단체들의 애정 어린 비판들은 겸허히 수용하겠지만 ‘당장 무엇을 해라’는 등 밀어붙이기 요구는 솔직히 답답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인권위가 현재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전진을 위한 비판’을 해달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노동계와 인권단체들은 인권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이 가능하다고 꼬집는다. 다산인권센터 송원찬 활동가는 “인권위 스스로가 문제가 많은 법에 얽매이기보다 좀더 다양한 해석을 통해 점진적으로 바꿔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또 파병, 비정규직 등 설사 정부 정책과 다르다 할지라도 충분한 근거를 통한 정책권고 등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인권을 보호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는 사람이 자신들의 권리가 무엇이고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지난해 말 서울의 한 대학에서 ‘1인 1건 인권위 진정으로 인권을 배우자’라는 수업이 진행돼 눈길을 모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노동자들이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동계가 ‘인권’에 대한 교육과 모의 인권위 진정 등을 계획해 보는 것은 어떨까.
매일노동뉴스 김소연 기자 2003-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