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살인법’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002년 한 해에만 2,605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습니다. 2003년 상반기에는 예년보다 사망 노동자 수가 더 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나라 어디에선가는 8명의 직장인들이 자신의 업무 때문에 사망합니다.

다른 나라 노동자들도 이렇게 많이 죽는다면 참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직장인들이 자신의 업무 때문이 이렇게 많이 죽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산업재해 사망 만인률’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직장인들이 자신의 업무와 관련하여 사망하는 숫자를 만명을 기준으로 환산한 수치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재사망 만인률 수치가 대략 3 정도 됩니다. 일본이나 영국 등 선진국은 산재사망 만인률이 대략 0.1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선진국 직장인들보다 자신의 업무 때문에 사망할 확률이 30배 가량 높다는 뜻입니다.

후진국이라고 해서 이 수치가 특별히 높은 것도 아닙니다. 이 수치가 단 단위까지 올라오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산재 사망 만인률이 소수점 이하에서 통계가 잡힙니다. 사회혁명이 발생해서 통제가 전혀 불가능한 국가의 사망률 수치가 단 단위까지 올라오는 일이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3 정도나 되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규모로 노동자들이 사망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기업의 무책임입니다. 거의 모든 산업재해 사망 사고는 기업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예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기업이 그 의무를 게을리 해서 노동자가 사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살인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규모로 기업의 살인 행위가 이뤄지고 있는데도 정부가 제대로 관리감독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인방조입니다.

2000년 10월, 영국에서 열차 탈선으로 4명의 승객이 사망한 사고에 대하여 3년이 지난 2003년 7월 영국 경찰은 철도회사와 선로보수회사, 철도회사의 고위직 임원 6명에게 살인죄를 적용했습니다. 철도회사가 선로 교체와 속도 제한 조치와 같은 기본적인 의무를 게을리해서 사고가 발생한 것은 살인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검찰 역시 이들을 재판에 기소할 예정인데, 만일 유죄가 확정되면 이 사람들은 종신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그동안 기업이 살인죄의 적용을 받아 기소된 적이 여러번 있었고 지금까지 5개의 기업이 살인죄로 처벌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중소기업이었습니다. 대기업에 대해서는 단 두 건의 기소가 있었으나 모두 기각 당했습니다. 그러자 영국에서는 현행법상 기업에 대한 살인죄 기소가 어렵다 판단하고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이 ‘기업살인법’ 제정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기업살인법’은 블레어 총리의 공약이기도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기업살인법’이 가장 먼저 만들어져야 할 곳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산업안전보건법의 내용에 대해 기업체 경영진들과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서 한 중소기업체 사장이 농담처럼 “사람이 두어 명 죽는 게 낫지 산업안전보건법은 까다로워서 도저히 못 지키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법대로 모든 안전설비를 하는 데에는 수십억원의 비용이 들지만,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을 때에는 기껏해야 1억 남짓의 비용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것도 대부분 산재보험에서 지불됩니다. 우리 사회와 같은 기업 경영 풍토 속에서 유능한 경영자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비용 부담을 이유로 마땅히 해야 할 안전조치를 게을리 해서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에는 기업을 살인죄로 처벌할 수 있는 ‘기업살인법’이 제정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부끄러운 ‘산업재해 왕국’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을 위해 유익한 일입니다.

시사자키 칼럼 하종강이었습니다.

하종강 (200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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