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죽음의 덫 ‘직무 스트레스’

지난해 9월 LG카드의 한 채권지점을 맡고 있던 김아무개(41) 차장은 ‘급성간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과 직장동료들에 따르면 그는 봄부터 불어닥친 카드사 유동성 위기로 회사가 조직개편을 거치면서 할부지점에서 채권지점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그런데 바뀐 업무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김 차장은 실적에 대한 압박으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5차례나 평가회의를 하는가 하면, 전체 48개 채권지점의 실적순위가 매일 공개되기도 했다. 곧바로 평가나 보상에 반영이 되는 만큼,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사망하기 1주일쯤 전부터 김 차장으로부터 눈이 침침하다거나 피로를 느껴 쉬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예상하진 못했다. 원래 B형간염 보균자이긴 했지만, 평소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사망이라고 확신하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낼 채비를 갖추고 있다
2004년 01월 16일

글 황보연 기자 (hbyoun@economy21.co.kr)

ㆍ1. [인터뷰] 조정진/ 한림대 성심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ㆍ2. 과로사에 울고, 산재법에 울고
ㆍ3. [테스트] 스트레스 자가측정

뇌혈관·심장질환 사망자 증가세…기업환경 급변, 업무 부담 커진 게 주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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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나 스트레스로 인한 사망자가 도통 줄지 않고 있다. 노동부에 따르면 과로와 관련성이 높은 ‘뇌혈관 및 심장질환’(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는 2002년 한해 동안 760명에 달했다. 99년 420명, 2000년 658명, 2001년 703명 등으로 과로와 관련된 사망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에도 1월부터 9월까지 집계된 사망자수가 636명이어서 전년보다 훨씬 늘어날 조짐이다.

전체 업무상 질병 중에서 과로로 인한 질병이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다. 2002년에 업무상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총 1227명으로, 그 중 뇌심혈관계 질환 사망자는 62%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 우종민 교수는 “국내 직업병이 진폐증이나 중금속 중독 등 1차 산업형에서, 반복작업이나 스트레스로 발생하는 작업 관련성 질환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성과주의·고용불안, 스트레스 증폭시켜

과로사는 90년대 들어 국내에서도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과로사는 원래 연일 밤샘작업을 하는 등 평소보다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 극도로 피로해져 사망에까지 이르는 것을 말한다. 주로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나타나지만, 잠을 자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 버리는 돌연사도 있다. 예컨대 일본의 경우 1991년에 일어난 과로사 사례를 분석한 결과, 1년에 3천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주목할 만한 것은 과로사를 유발하는 요인이 좀 더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LG카드 김 차장의 죽음은 IMF 이후 구조조정이 상시적으로 일어나고 성과주의가 도입되면서 나타난 전형적인 사례다. 단순히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피로가 축적되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가 훨씬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구조조정이 강도 높게 이루어진 금융권에서 이런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모 카드사에서 할부금융을 맡고 있던 최아무개(40)씨는 2002년 말에 잠을 자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사인은 심실부정맥으로 역시 실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다.

구조조정으로 인한 퇴직자의 공백을 메우느라 과로를 하다 사망한 경우도 있다. 지난 99년 서울은행의 중부지점 과장으로 일하던 이아무개(48)씨는 외환 담당자가 퇴직하면서 업무량이 늘어난 데다, 감원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위해서 예금유치와 거래선 확보를 위해 무리하게 일하다가 간세포암 진단을 받았다. IMF 이후 전체 직원의 40%가 희망퇴직 등으로 은행을 떠나면서 심리적 압박이 컸다는 것이다.

한국여성개발원 정진주 박사는 “최근 몇 년 동안 구조조정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나 일터에 남은 사람이나 극심한 고용불안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용 없는 성장’이 현실화되면서,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당분간 일자리 부족 현상은 지속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나온다. 이 밖에 기업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업무의 전문성과 강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스트레스를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직무 요구도 높은 고긴장 집단 특히 위험

법무법인 지평의 김성수 변호사는 “최근 법원 판례를 보면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및 자살 등이 과로사로 인정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실제 지난해 11월6일에는 롯데호텔 직원 김아무개(39)씨가 자신이 지배인으로 일하던 바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숨진 일이 있었다. 그는 유서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한 직장동료는 “호주머니에서 ‘우리 바의 명성이 무너지는구나. 영업도 부진하고…’라는 내용의 메모지만 발견됐다”고 전한다. 김씨가 지난여름 종합검진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최근 매출감소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부 학계에선 ‘직무 스트레스’가 과로사의 중요한 위험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직무 스트레스는 말 그대로 직업이나 직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말한다. 과로사가 일본에서 전해진 개념이라면, 직무 스트레스는 주로 서구에서 활발히 연구돼 왔다. 다시 말해 전자가 교대근무나 심야근무, 장시간 노동 등을 주된 요인으로 삼는다면, 후자는 부적절한 의사소통이나 역할갈등, 작업환경 등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원주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과 장세진 교수는 “직무 요구도가 높고 직무 자율성이 낮은 고긴장 집단에서,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런 고긴장 집단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심혈관질환의 위험도가 높다는 것이다. 또한 업무부담은 높은 데 비해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직무스트레스연구회가 2001년 국내 245개 기업의 6977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고위험군이 22%, 잠재적 스트레스군도 73%나 됐다. 이에 비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건강군은 5%에 불과했다. 여기서 고위험군이란 그대로 방치하면 심혈관질환이나 탈진, 극단적인 경우 과로사로 진행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과로사 전문가들은 정부와 기업 차원에서 적극적인 스트레스 관리에 들어가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이미 2002년 말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 제5조에서는 ‘근로자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하는 것을 사업주의 의무로 명시했다. 정신적 스트레스라는 항목을 새로 추가시킨 것이다.

기업·정부 차원에서 예방·관리 나서야

한국산업안전공단의 박정선 팀장(산업의학전문의)은 “뇌심혈관계 질환은 다른 직업병과 달리 아주 갑자기 발생하며, 생명을 앗아간다거나 영구적인 신체기능 장해를 유발해 중대사고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대신 작업 관련성 위험요인을 줄이고 고혈압이나 당뇨 등 기초질환에 대한 관리를 꾸준히 해 나가면 충분히 예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업이 직원들에 대해 적절한 스트레스 관리를 하게 되면 비용절감 차원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의 경우 스트레스성 질병에 따른 결근 및 생산성 저하로 나타나는 손실은 연간 3천억달러에 이르며, 그에 따른 비용은 종업원 1인당 연간 7500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2001년 예일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우울증이 있는 근로자가 보통 근로자보다 2배나 병가를 많이 사용하고, 또 회사에 출근하더라도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 장기간 추적연구에 의해 입증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P&G나 듀폰, IBM 등 선진 기업들은 이미 EAP(Employee Assistance Program)를 운영해 직원들의 정신적 고충을 덜어주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장에서 생긴 스트레스뿐 아니라 가정불화나 알콜중독 등 개인의 스트레스까지 기업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관리,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백병원 우종민 교수는 “국내 대기업 중에서도 최근 삼성전자가 직무 스트레스에 대한 현황조사 및 향후 관리 프로그램을 의뢰해 왔다”고 전한다.

한편 한국여성개발원 정진주 박사는 “직장 내 안전보건영향평가제를 도입해 근로자들의 참여를 적극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구조조정이 발생하거나 새로운 작업공정이 도입될 때, 직원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를 미리 예측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업무상 과부하 개념 93년 도입

과로사는 일본에서 처음 쓰여진 말로 지금은 ‘kharosi’(카로시)라는 국제적인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1969년 29세의 신문발송부 사원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죽은 뒤 5년이 지난 뒤에서야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았는데, 이것이 일본의 첫 과로사 사례로 기록돼 있다. 1970년대에는 18명의 신문사 노동자에게서 비슷한 사례가 확인되기도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돌연사’나 ‘직장사’라는 표현이 주로 쓰였고, ‘과로사’라는 용어는 1978년 일본의 우에하타 박사가 학술대회에서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과중한 노동부담으로 고혈압과 동맥경화증 등의 기초질환이 급속히 악화돼 뇌혈관질환과 심근경색증 등이 발생해 사망과 노동불능상태에 빠진 상태”로 과로사의 개념을 소개했다.

일본의 과로사는 국내에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고 있는 뇌심혈관질환보다 훨씬 더 제한적인 개념이다. 한국산업안전공단 박정선 팀장은 “일본의 독특한 직업윤리와 연관이 깊다”고 설명한다. 회사를 위해 죽을 때까지 몸바쳐 일한다는 각오로 연장근로수당도 받지 않고 서비스잔업을 하는 독특한 근무풍토가 과로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국내에선 1990년에 처음 언론에서 ‘과로사’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이 무렵 법원에서도 사실상 과로사를 인정하는 판례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93년 5월에 와서야 노동부의 업무상 질병인정기준에 업무상 과부하의 개념이 도입됐다. 이전까지만해도 심장질환에 대해서는 업무와 관련된 재해성 질환 정도로 봤기 때문이다.

93년 10월에 ‘노동과 건강연구회’ 부설로 ‘과로사 상담센터’가 개설되고 민변소속 변호사들이 적극적인 상담활동을 펴면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김은희 전 노동과 건강연구회 대표는 “9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당장 눈에 띄게 드러나는 제조업의 산재사고에만 대응해왔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소리소문없이 과로나 스트레스로 쓰러진 과로사 상담이 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