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좋은 급식, 조리사 노동권이 먼저
학교급식 조리노동자의 건강과 작업환경실태
최이윤정 기자
2004-02-26 18:01:58
“식판 20kg의 무게를 하루에 70번씩 4회를 들어야 하는 고된 노동으로 인해 인대가 늘어났지만, 학교 측으로부터는 눈에 띄지 않는 재해에 대해 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9년 째 조리노동자로 살아온 하영숙씨(전국여성노조 서울지부 학교급식지회장)의 말이다. 지난 24일 전국여성노동조합과 노동건강연대가 주최한 ‘학교급식 조리종사원의 건강 및 작업환경 개선을 위한 토론회’에서 학교급식 조리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실태가 드러났다.
이미 외국에서는 이 직종을 작업관련한 사고가 높은 직종으로 보고하는 등 사회적 관심을 기울여왔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학교급식과 관련해 학생, 학부모 등 소비자 위주의 조사만 진행됐을 뿐 조리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조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각종 질병 시달려도 산재 적용 안돼
학교급식 조리노동자의 대다수가 비정규직이다. 2003년 하반기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조리노동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노동건강연대 비정규팀 정최경희씨는 “조리노동자 대부분(97.9%)이 일용직으로 채용돼 있어, 고용 불안정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조리노동자들은 사고, 질병의 위험이 높고 휴식시간도 보장이 안 되는 고된 노동환경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이용하거나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열악하다. 조리노동자의 75% 이상이 ‘소음, 고열, 다습한 환경이 심각하다’고 응답했으나, 소음방지 시설이나 안전장화 등의 장비 지급은 거의 전무한 상태다.
병가나 산업재해보상보험(이하 ‘산재보험’)도 무용지물인 상황. 병가의 경우 ‘필요하다’는 응답은 98.4%에 이르렀지만 실제 이용률은 9.8%에 불과했다. 이유는 “병가를 사용하기 위해 대체인력을 노동자 자신이 구해놓아야 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학교에서 급식을 담당하는 조리노동자들은 격심한 노동강도로 인해 각종 질병에 노출돼 있다. 많은 조리노동자들이 이미 손, 손목의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있으며 피부질환, 생리장애 등의 발생률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고 발생률도 34.2%에 달한다. 그러나 대부분 치료비를 본인이 부담하고 있으며, 9.1%만이 산재보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조리노동자의 작업환경 열악
조리노동자의 작업환경이 이토록 열악한 것은,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가사노동’에 대한 폄하의식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리노동자 하영숙씨는 “음식을 하는 일을 그저 여성들이 집에서 하는 일쯤으로 치부할 뿐 고된 노동이라고 보지 않는다. 흔히 ‘엄마들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 때문에 노동으로 인정 받지도 못한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또 대부분 조리노동자들이 나이 든 중년 여성이기 때문에 “(산업재해도) 나이 들어서 자연히 오는 퇴행성 관절염 정도로 치부해 버려 산재보험을 적용 받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최경희씨는 “정규직과 같은 처우 개선, 병가 보장, 산재보상보험법 적용의 현실화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면서, “급식 시설의 현대화보다 더 시급한 것은 노동 강도를 적정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토론회에 참가한 노동부 산업안전국 산업보건환경과 이복임 전문위원은 “이렇게 열악한 상황인 줄은 몰랐다”면서 “앞으로 예방 및 작업환경 개선 쪽에 조리노동자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도록 협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복임 전문위원은 또 현재 산업안전보건법 상 소음, 근골격계 부담 작업 등에 대해서는 “사업주의 예방 의무화 조항에 조리노동자의 작업환경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산업안전보건법 상에는 예방의무를 지키지 않은 사업주에 대해서는 5천 만원 이하의 벌금, 5년 이하의 징역이 부과되는 등 처벌조항이 있다. 이를 지키지 않은 사업주에 대해서는 노동조합이 고발할 수 있다.
전국여성노조 박남희씨는 “조리노동자는 ‘감시의 대상’ 이 아니라 안전하고 질 좋은 급식을 제공하기 위한 주체로 상정되어야 한다”면서, “학교급식개선대책위의 비정규직 종사자에 대한 처우개선과 관련한 안건에 조리노동자의 작업환경 개선 부분이 포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국여성노조 이혜순 사무처장은 “관련부처인 교육부와 노동부가 서로 책임을 미룰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법의 제,개정과 관리, 감독 강화에 협조할 것”을 당부했으며, 최상림 위원장은 “노동부, 교육부와 관련 NGO들이 보다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조사를 추진해 달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