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문화 바뀌어야 노조활동가가 산다”
건강악화 악순환…건강검진 받아도 사후관리 안돼
“지금 위험신호가 오고 있다”…개인적·조직적 ‘건강관리’ 과제
“꼭 일어날 겁니다.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요.”
정종태(40) 재능교육교사노조 전 위원장이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지금 위암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위암 판정을 받기까지 그는 그의
병을 잘 몰랐다. 먹는 것도 없는데 자꾸 복수가 차올라 병원을 찾았더니 이미
말기였다.
투병을 하면서도 그는 씩씩한 말 한마디와 씩 웃는 표정으로 오히려 보는 이들을
위로했지만 가슴 한 켠의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을 지워주지는 못했다.
그는 그 험하디 험한 비정규직 투쟁의 최전선에 서서 수년간 노숙농성,
단식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고 하는 싸움이다. 하지만
노조활동가들에게 몸을 돌볼 여력이란 없다. 정 전 위원장 그 역시 평소
건강검진은커녕 단식 후 보식을 하거나 쉬는 건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단 정 위원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이번 사안은 노조활동가 모두에게
주는 ‘위험신호’인지도 모른다. 지난 98년 직부장이 과로로 사망하면서
노조활동가의 건강권 문제가 조명을 받긴 했지만 6년이 지나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그래서 ‘진짜’ 위험하다는 그런 신호 말이다.
이남신(40) 이랜드노조 전 위원장. 그도 올해 초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했고 수술도 성공리에 끝나 지금은 회복기를
거치고 있다. 그도 노조 상근활동만 만 6년째인데 이랜드 역시 노조활동 하기가
녹록치 않은 사업장이다. 이랜드노조는 2001년 263일간의 파업을 벌이는 등
싸움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김 전 위원장은 “임단협이나 장기파업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며 “나 역시도 집에 잘 들어가지 못하는 등 몸을 돌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또 얼마 전엔 김주환(37) 민주화섬연맹 전 조직국장이 폐결핵 판정을 받았다. 그
역시 여느 노조활동가들이 그러하듯 발병할 때까지 심각성을 잘 몰랐다. 폐결핵
진단 전 그는 코오롱 등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한뎃잠을 자며 직접 조직 일을
담당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자는 게 일쑤였다. 그런 생활이 수개월
지속됐다. 지난 6월 너무 몸이 피곤해서 병원을 찾았더니 폐결핵이란다.
다른 노조활동가들의 조직업무의 경우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 민주노총 활동가들이 최명아 전 조직국장의 묘소를 찾았다. ⓒ 매일노동뉴스
실제 노조활동가와 비슷한 조건의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환경재단(상임이사 최열)이 녹색병원(원장 양길승)에 의뢰해 지난 4~8월 시민단체
활동가 204명(16개 단체)을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실시한 결과, 44%(90명)가 질병
또는 질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반 직장인 평균 5.9%보다 7배
높은 수치다.
노조활동가들은 더 심하면 심했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여 이번 조사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민주노총 건강검진 그 이후
그렇다면 민주노총이 수년간 실시해온 상근자들의 ‘건강검진 그 이후’가
궁금하다. 민주노총은 수년째 성동주민의원(원장 윤여운)에서 매년 상근자들의
건강검진을 하고 있다. 최명아 전 조직부국장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
▲ 한 활동가의 건강신호등과 내시경, 초음파 등의 건강검진 결과표 ⓒ
매일노동뉴스
건강검진이라면 노조활동가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먼 나라 얘기로 치부되는 게
현실이다. 특히 ‘종합’이란 말이 붙으면 감히 엄두도 못 낸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가능했던 것은 성동주민의원이 건강검진 비용의 절반을 부담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에서 보장하는 기본적인 건강검진 외에 위내시경 등 몇 가지가
추가된다. 고가의 ‘종합’건강검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웬만한 상태는 모두
체크된다고 한다.
민주노총은 사무총국과 각 지역본부에 상근자 수만큼 한 사람당 6만원씩 건강검진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는 지역본부는 서울본부가
거의 유일하다. 다른 지역에서는 성동주민의원과 같이 비용을 저렴하게 해주는
병원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은 일단 고무적이라는 평가다. ‘조직적 차원’에서 정기적인
건강검진이라도 받는 것 자체가 한 발 크게 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동주민의원에서 건강검진을 받는 노동·시민사회단체는 2003년말 현재 21개
단체, 445명이다. 이 가운데 노동계는 민주노총(49명), 금속연맹(32명),
공공연맹(33명), 서비스연맹(2명), 시설노조(5명), 민주노총 서울본부(16명),
전교조(51명) 등이다.
성동주민의원은 처음엔 말로 건강검진 결과를 설명했는데 별로 경각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몇 년 전부터는 ‘건강신호등’을 통해 건강검진 결과를 알리고
있다. 건강신호등이란 빨강(치료요망), 노랑(주의), 녹색(양호)으로 건강상태를
나눠 해당자들에게 해당 스티커를 붙여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생활습관이나 증상에 따른 조치사항도 첨부한다.
노조활동가의 건강관리 성공기(?)
한혁(34)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은 지난해 ‘빨간’신호등 받아들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건강이 이 정도로 나빠졌을 줄은 몰랐다. 그는 지방간, 고지혈증,
위염 등 술, 담배, 과로 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질병에 노출된
상태였다.
게다가 몸무게가 계속 불어 무려 90kg에 육박했다. 의사는 불규칙적인 식사 등
잘못된 식습관을 고치고 자신에게 적절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며 술, 담배는
기본적으로 끊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올해 초부터 식습관을 확 뜯어고쳐 식이조절에 들어가고 하루도 빠짐없이
1시간30분씩 운동을 했다. 그 결과, 올해 건강검진 결과 녹색신호등을 받았다.
건강검진을 받은 지 6년 만에 처음이었다. 게다가 몸무게도 65~66kg 가량으로
감량에 성공했다. 건강검진을 받고 본인의 건강상태를 호전시킨 대표적인 예다.
김정근(48) 민주노총 조직쟁의실장도 대표적으로 건강 회복에 성공한 경우다. 김
실장은 서노협 시절 건강검진을 받았다가 건강상태가 몹시 안 좋다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도 조직활동이란 게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술, 담배를
하며 토론하고 조직하고… 위가 상당히 안 좋았는데 의사가 3개월치 약을
지어주며 땀 흘리는 운동을 꼭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란다.
김 실장은 달리 할 수 있는 운동이 없어 그저 달리기만 했다고 한다. 물론 술,
담배를 완전히 끊지는 못했지만 식사는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했다. 그가
녹색신호등을 받은 것은 꽤 오래 전 얘기다. 또 그는 민주노총 내 마라톤 동호회
회장이기도 하다.
건강검진 ‘사후관리’ 제대로 안돼
하지만 이들의 경우는 소수에 해당된다. 이른바 조직문화가 쉽게 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노조활동가들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어쩌면 내일도
밤새 술과 담배와 함께 조직생활을 하고 불규칙한 식사로 건강을 해칠지 모른다.
성동주민의원에서 수년간 건강검진을 받았지만 그것이 곧바로 ‘건강’으로
이어지진 않는 듯해 보였다. ‘사후 관리’가 개인적으로, 조직적으로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성동주민의원의 노동·시민사회단체 445명 대상 건강검진 결과, 건강이
양호한 녹색신호등이 40.4%로 절반에도 못 미친 반면 주의를 요하는 노란신호등은
51.7%로 절반을 넘었고 건강 위험신호인 빨간신호등은 7.9%를 차지했다. 나타난
질환 중 간장질환이 47.2%로 많았으며 위장질환이 38.2%로 뒤를 이었다. 모두
술과 담배, 식사습관과 밀접한 질환들이다.
김주환 민주화섬연맹 전 조직국장은 “지난해 건강검진에서 안 좋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뒤로 별로 신경을 쓰진 못했다”고 말한다.
윤여운 성동주민의원 원장도 사후관리가 잘 안 되는 것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그는 “건강신호등을 처음 실시할 때는 경각심을 보이는 등 효과가 있나 싶더니
이후는 다시 무덤덤해하는 것 같더라”라며 “노조활동가들 스스로가 경각심을
느끼고 건강관리를 하도록 하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노조활동가들의 건강권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결국 ‘운동권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데 공통적인 목소리로 나온다. 또한 개별적인 노력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조직적인 관리도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유병홍 공공연맹 정책국장은 “젊었을 적에는 몸을 굴려도 괜찮았지만 40~50대
들어서면 급격히 나빠진다”며 “노조에서 단협으로 요구하듯 우리도 스스로
건강검진을 철저히 하고 노동시간 단축, 노동강도 약화, 동호회 활동 지원 등
개인적으로, 조직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서울본부 사무실 내부에 붙어 있는 건강식단표 ⓒ 매일노동뉴스
운동문화 바뀌어야…대책마련 시급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 정종태 전 위원장,
이남신 전 위원장, 김주환 전 국장 등은 모두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란
공통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나이가 젊어도 지금의 운동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악순환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쌓이고 쌓이다가 드디어 폭발하는 시기가
현재 온 것은 아닐까.
조태상 민주노총 산안부장은 “지금 위험 신호가 오는 것 같다”며 “조직적
시스템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진단했다. 그는 “노조활동가들이
사망이나 불치병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이르는 것을 어쩌면 우리 운동문화가
묵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며 “지금의 운동문화가 노조활동가들 자신에 대한
투자가 마치 사치나 자질부족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개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조직적 건강관리 계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노조활동가의 건강권 대책은 무조건 개인의 책임으로도, 반대로 조직의
책임으로만 미룰 것이 아니라 양자의 책임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아직 조직적으로 노조활동가의 건강관리에 나설 처지는 아닌 것 같다.
문제의식은 있지만 실천에는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석민 민주노총
교선국장은 “활동가들에 대한 건강 ‘보장’을 위한 고민은 있지만 대책은
없다”며 “우선 아직 건강검진을 받지 못하는 지역본부의 경우 대책이
시급하다고 보고 내년쯤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밖에도 정기적인 건강검진, 조직적 사후관리, 노동시간 단축, 안식년 휴가,
운동기구 마련, 동호회 지원 등은 어떨까. 찾고자 하면 대안은 많을 것이다. 또
건강검진을 저렴하게 받을 수 있게 적극 병원을 찾아나서는 것도 과제 중
하나라는 지적이다.
“우리 안에서도 뭔가 문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활동가들은 일요일에도 휴일도
없이 일하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풍토 말입니다.” 암 투병 중인 정종태 전
위원장이 강조한 말이다.
노동자들을 극단적 투쟁을 하게 만드는 사업주가 노조활동가들의 건강을 해치는
일차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지만 노조활동가 스스로도 본인과 동지의
건강권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는 곱씹고 곱씹어볼 대목이다.
연윤정 기자 yiyon@labortoday.co.kr
2004-09-21 오전 9:17:57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