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 빠르지만 ‘50년 뒤진’ SBS 뉴스
산재보험료 ‘불법적 준조세’로 보도…아무리 중소기업 어렵다지만 해도 너무해
우리나라는 해마다 산업현장에서 재해로 숨지는 노동자가 2,500명이 넘는 ‘산재왕국’이다.노동자 1만명당 산재로 인한 사망자 수를 나타내는 ‘만인률’에서 한국은 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독보적인 1위다. 국제노동기구(ILO) 노동통계연감에 따르면 지난 2000년 한국의 만인률은 1.96명이다. 노동자 1만명 중 2명이 해마다 산재로 죽는다는 소리다.
신자유주의의 종주국이며 강력한 노동통제국가인 미국의 만인률은 우리의 1/4 수준인 0.5명에 불과하다. 프랑스는 이보다 더 낮은 0.45명이고 철강금속 등 제조업이 많은 독일도 0.34명에 불과하다. 대처 수상 이후 신자유주의 강풍이 몰아친 영국은 0.08명으로 산재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우리 노동부의 산업재해 분석에 따르면 지난 97년부터 2002년까지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는 97년 2,742명, 98년 2,212명, 99년 2,291명, 2000년 2,528명, 2001년 2,748명, 2002년 2,605명으로 늘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이 산재왕국인 이유는 한국의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언론이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의 주요 공장에서 노조가 자발적으로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시간을 늘리고 있다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부추기고 있다. 반면 한국의 노동조합은 왜 이 같은 세계적인 추세에 동참하지 않느냐고 나무라는 사례가 많다. 이는 무지에서 비롯된 말이다.
노동자 목숨 담보로 한 산재보험료 내기 싫다고?
한국과 유럽의 노동시간은 비교할 수도 없다. 2002년 프랑스 노동자의 연간 평균노동시간이 1,453시간이고, 독일이 1,361시간이었다. 같은 시기 한국의 노동시간은 2,410시간이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유럽의 노동자들에 비해 1년에 무려 1,000시간을 더 일하고 있다. 이런 한국 노동자에게 유럽처럼 노동시간을 더 늘리라는 말은 사회적 살인행위나 다름없다. 일 많이 하기로 소문난 일본의 노동자들도 1년에 1,825시간 정도 일하는데 그친다.
산업현장의 상황이 이러한데 우리 언론은 황당한 뉴스만 내보내고 있다. 지난 11일 ‘한시간 빠른’ SBS 8시뉴스에는 산업재해와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 ‘중소기업 준조세 부담 크다’는 제목의 이 기사의 첫 문장은 “한 푼이 아쉬운 중소기업들이 사회보험료와 각종 부담금 같은 이른바 준조세 때문에 더욱 경영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는 앵커의 말로 시작했다. 이어 직접 취재를 한 기자의 첫마디는 “서울 근교의 사무용 가구제조업체입니다. 이 업체는 지난해 산재보험료로 분기에 1,240만원씩 냈습니다” 였다.
SBS의 눈에는 노동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 산재보험료가 준조세로 보이는 모양이다. 우리 국민들은 그동안 기업과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준조세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들을 주로는 썩은 정치권의 비자금 요구나 관리들이 요구하는 뇌물 정도로 생각해왔다. 준조세의 개념을 좀 더 확장해도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나 각종 기부금 정도이다. 그런데 SBS는 졸지에 기업주가 부담하는 산업재해보험료와 국민연금보험료, 작업장환경평가료까지 불법적 준조세로 만들어 버렸다. 중소기업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 나갔다.
중소기업 어려움, 재벌기업 이기주의가 주원인
정작 중소기업이 어려운 주원인은 다른데 있다. 한국의 재벌기업들이 노비문서나 다름없는 하청계약 관행으로 중소기업을 마른 수건 쥐어짜듯 몰아세우는 것이 오늘날 한국 중소기업 위기의 근본이라는 사실쯤은 상식이다.
계약갱신 때마다 이유도 없이 납품 단가를 낮추고, 원청회사의 제품을 시도 때도 없이 강매하고, 현금 대신 늘 6개월짜리 어음으로 대금을 결재해 유동성 위기에 처한 중소기업들의 목줄을 조이는 것이 재벌이다. 어렵사리 중소기업이 신제품이라도 내놓으면 몇 달 안 돼 기술자 빼내 자기 제품인양 복제품 만들어 시장 선점해 버리는 재벌들만 없으면 우리 중소기업주들은 두 다리 펴고 잘 수 있을 것이다.
SBS는 이 기사의 작은 제목을 ‘기협중앙회, 사회보험료 요율 인하 요구’라고 달았다. 아예 기업 홍보실을 자처하고 나서는 편이 나을 것 같다. ‘8시 뉴스’는 SBS의 간판 뉴스다. 그래서 ‘한시간 빠른’이란 미사여구도 붙어 있다. 그런데 시간만 빠르면 뭐하나, 관점은 50년이 뒤져 있는데….
이정호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국장
2005-01-14 오전 9:11:41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