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들을 미치게 하는가”
정신과병원 찾는 직장인 늘어 … 과로에 시달리고, 노조활동·비정규직 차별로 고통받고
매일노동뉴스 김미영 기자
지난해 우리나라 직장인 35만4천221명이 정신과병원을 찾았다. 건강보험공단의 ‘국내 남녀 직장가입자 정신질환 현황’에 따르면 정신과 진료를 받은 직장인은 2000년(16만3천213명)보다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업무 등으로 인한 격심한 스트레스로 적응장애를 겪는 직장인은 2003년 2만7650명에서 지난해 6만1021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또 강박장애로 병원을 찾은 직장인도 2003년 6539명에서 2007년에는 1만1764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신질환이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돼 보상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근로복지공단은 정신질환을 요통이나 뇌심혈관계질환처럼 별도의 통계로 집계하지 않고 ‘기타질병’에 포함시켜 놓고 있다. 공단 관계자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같이 산재사고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산재를 신청한 경우는 많지만, 우울증이나 적응장애 등 직장인에게 주로 발병하는 정신질환은 업무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LG전자 전 직원 ‘왕따 메일’ 소송(정국정씨 사건)이나 청구성심병원·하이텍알씨디코리아의 노조탄압에 따른 집단우울증 등 법원에서 정신질환을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하는 추세가 늘어남에 따라 최근 공단에서도 전문가들과 함께 정신질환의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업무로 인한 정신질환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치거나 그만 두거나
12일 금속노조 류현석 포스코지회장은 우울증과 적응장애 등 정신질환으로 근로복지공단 여수지사에 산재요양신청서를 제출했다. 전직원 1만9천명 가운데 조합원은 20여명에 불과한 ‘유령노조’가 있는 포스코에서 의욕적으로 ‘민주노조’ 활동을 시작한 류 지회장이 포스코지회 설립 6개월만에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류씨는 지난 3월 포스코와 포철기연(포스코 자회사)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금속노조 포스코지회의 초대 지회장으로 선출됐다. 96년에 입사해 11년간 줄곧 냉연공장 생산직으로 일해왔던 그는 지난해 10월 느닷없이 냉연공장 사무직으로 전환배치됐다. 하루 종일 모니터화면을 응시하고 있어야 했다. 회사는 “2냉연공장 압연라인의 PL Looper 저장량 확대와 관련한 저장량 및 사행량에 대해 기초 데이터를 수집, CRT화면을 조회하고 현장관찰하라”고 지시했지만 처음 맡은 업무에 대해 그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업무지시 불이행’ 경고장이 수차례 날아왔다. 하루에 한 번꼴로 공장장이나 주임들과 돌아가면서 면담을 요구했고, 그들은 류씨에게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냐’, ‘너 때문에 사무실 직원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라고 말하며 노조탈퇴를 노골적으로 종용했다. 밥을 함께 먹어주는 동료도 없었다. 결국 포스코지회 조합원 2명은 직장을 그만 두고 나갔다.
주변에서 류씨에게 ‘우울증 아니냐’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고, 지난 5월 순천의 한 정신과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상태가 심각하다’며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것을 권했고, 류씨는 지난 7월 한 달 간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처음에 정신과진료를 받아보라고 권할 때는 거부했습니다. 미친 사람 취급받는 게 싫어서요.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스스로를 다 잡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류씨는 지금도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정신건강 좀 먹는 차별과 해고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도 지난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해 비정규직법 시행에 따른 집단해고로 촉발된 파업은 400일을 훌쩍 넘었다. 그동안 수십명의 징계해고와 구속, 수백억에 달하는 손해배상가압류 등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가고 있지만 해결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동료와 가족에게 이유 없이 분노를 터뜨리던 증상(폭발장애 및 우울증)으로 정신과치료를 받고 있는 김 위원장은 약물복용 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노동건강연대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300일 이상 투쟁중인 이랜드일반노조·KTX와 새마을호 여승무원·코스콤비정규직지부 조합원 120명을 상대로 실시한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35%가 정신건강에 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또 18.3%는 즉시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오랜 기간 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진행해온 이들은 주로 우울증·적응장애·대인기피증의 증상을 보였다.
사회적 차별이 만든 정신질환, 해법 찾아야
류현석 포스코지회장이나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위원장 모두 정신과병원에서 진단을 받기 전에는 모두 개인의 성격 탓으로 돌려졌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이들은 회사 또는 사회라는 집단이 만든 차별 속에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난 5일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 발표회’에서 토론자로 참석한 이영문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사회계층 간의 갈등·빈곤·직접적인 스트레스·상실의 문제는 정신질환 발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정신건강을 헤치는 직접적인 원인이 사회적 문제에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치료 역시 사회적 해결책이 제시됐을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사업주는 근로자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 하도록 의무화 하고 있으며 노동부령에서도 사업주가 “작업환경과 작업내용·작업량과 근로시간 등에 따른 직무 스트레스는 최소화 할 수 있는 개선대책 및 건강증진 프로그램을 시행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사업주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도 직장인의 정신건강 관리에 보다 적극적인 정책추진이 필요한 때이다.
스트레스 높으면 실직확률도 높다
직무스트레스가 높은 남성노동자는 정상인보다 실직할 가능성이 1.5배 높다. 저임금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고용불안보다도 실임금이 낮을 때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고용불안에 따른 스트레스보다 실직과 더 밀접한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대 의과대학 산업의학센터와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직업의학연구소가 2003~2004년 전국 노동자 5천6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남성의 경우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고용형태로 스트레스를 받는 노동자는 그렇지 않은 노동자보다 실직자가 될 가능성이 2.74배 높았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보상이 낮은 문제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했을 때 무려 3.57배 이상 실업발생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직무자율성 결여(1.62배), 조직문화(1.48배), 동료 및 상사와의 관계갈등(1.6배)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실업발생에 영향을 미쳤다. 반면에 물리적 환경(심한 소음과 낙후된 시설)으로 인한 직무스트레스가 높은 집단에서 실업발생이 낮았으며 조직체계(부서간 갈등)로부터 받는 직무스트레스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였다.
여성의 경우도 물리적 환경에 의한 직무스트레스가 높을 경우 실업발생이 낮은 결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노력보상불균형 영역의 직무스트레스가 높았을 때 정상인에 비해 2.96배 실직가능성이 컸다. 1년간 병원을 이용한 경험이 있는 노동자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실직발생이 2배 이상 높았다.
하지만 고용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실업과 별다른 영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연구팀은 “여성의 경우 비정규직이 보다 보편화되어 있고 정규직 여성도 고용불안정성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연구팀은 또 “그동안 직무스트레스가 스트레스 증상을 유발하고, 이로 인해 실업의 발생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는 있었지만 직무스트레스의 어떠한 세부 영역이 실업과 관련이 있는 지 밝히는 연구는 없었다”며 “이번 연구결과는 실업을 예방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팀은 이에 따라 기업은 관계갈등이나 조직문화로 인한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국가는 고용불안정성이나 노력보상 불균형 영역의 스트레스 관리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