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진보평론
41호(2009년 가을호)를 발간했습니다
진보평론 41호 특집은 종의 기원 150주년, 다윈의 진화론과 진보의 패러다임입니다.
근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근대를 만들면서 근대를 벗어났던 동시대의 거장들이 있다. 그들은 ‘진화’-‘진보’라는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다윈은 ‘진화론’의 체계적 대가로, 맑스는 ‘진보’의 급진적 혁명가로, 근대의 진보적 패러다임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급진화했다. 그러나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항상 그 대가를 요구한다. 텍스트들이 그들의 손을 떠났을 때, 그들 자신이 그러했듯이 지식은 권력 사회적 층위들과 중첩되며 새롭게 읽혀진다. 그러나 소위 대가들의 텍스트는, 그것이 가진 권위와 명성으로 더렵혀져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오해와 오독을 생산한다. 특히,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지적 혁명의 천재들은 그 이름으로 인해, 또는 그 권위로 인해 무수한 지적 사기꾼들과 지식-권력의 설계자들에 의해 인용되며 가공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상과 문제의식, 지적 고뇌와 성실성을 읽어내는 대신에 그들의 지적 생산물을 주어진 권력 속에 삽입한다. 그래서 후세의 ‘-주의자’들은 위대한 지적 사기꾼들이 된다. 그 지적 사기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특히, 그들이 한 시대를 지배했던 지배적 독단에 대항해 싸우고 지배의 메커니즘에 반기를 든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는 오늘날 누구나 들어서 알고 있는 이름들, 다윈뿐만 아니라 예수와 맑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오늘날 상품화된 사회에서의 ‘상품’이 되듯이, 맑스와 다윈 또한 이 길을 피하지 못했다. 적대자들에게 그들은 그들을 이용하는 자들과 지식-권력의 메커니즘 속에서 오해되고 적용되어 왔던 ‘악명’으로 존재하며 찬양자들에게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이해 속에서 변용되면서 나름의 창조성을 부여하는 ‘힘’이 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게 더럽혀진 이름은 ‘맑스’와 ‘다윈’일 것이다. ‘다윈’은 우생학과 골상학, 사회생물학, 파시즘에 의해 더렵혀졌고 ‘맑스’는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배외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노동-생산력주의, 그리고 전체주의적 권력에 의해 더렵혀졌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오늘날 다윈만큼 잘못 이해되고 인용되고 적용되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윈만이 아니다. 맑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유독 그들의 이름은 더 격렬하게 더럽혀진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장 분명한 적들, 가장 강력했던 권력의 대항자로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윈은 종교의 적이며 맑스는 자본이라는 새로운 체제의 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윈도 맑스도 언젠가 맑스가 말했듯이 ‘맑스주의자라는 의미에서 그 자신은 맑스주의자가 아니’며 ‘다윈주의자라는 의미에서 그 자신은 다윈주의자가 아닌지’도 모른다.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면서 그가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종의 기원이 출판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세계 곳곳에서는 다윈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윈에게 꼭 축복일까? 특히, 오늘날처럼 생물학이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내면서 다른 학문을 주도하고 산업화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윤을 생산하는 학문 영역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생물학자들은 생물학 중심으로 지식의 통합을 주창하고 나서고 있으며 BT산업은 ‘황금알의 낳는 거위’로 GNR혁명을 주도하고 그 흐름 속에서 다윈의 후예들로서 백만장자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윈’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어쩌면 다윈이 없을 지도 모른다. 마치 오늘날 상업화된 교회에 예수가 없듯이 말이다.
다윈을 위대한 학자로 만들었던 것이 ‘진화(evolution)’로 번역된 ‘자연선택’라면 그를 오욕의 역사로 밀어 넣은 것도 ‘진화’로 번역된 ‘자연선택’이었다. ‘진화’와 ‘진보(progress)’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진보평론 41호의 글들은 진화와 진보가 동일한 개념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과학과 정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 속에서 착종된 변용들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집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 기념: 다윈의 진화론과 진보의 패러다임
* 진보와 진화: 철학사의 조명(최종덕)
* 진화와 진보(홍성욱)
* 진화-진보 담론의 빛과 그림자(강신익)
* 동양학과 진화론: 전통 유교담론과 진화론 내러티브의 진보적 재구성(김시천)
* 헛발질하는 말들의 폭력: 다윈을 재판하는 그리스도교의 헛발질에 대해(이정희)
정세
* 비정규법을 둘러싼 혼란, 무엇이 진실인가?(김혜진)
* 잔혹한 재개발의 기억: 야만스런 역사의 현장, 용산을 기억하리라(배성인)
* 쌍용자동차 투쟁평가Ⅰ- 쌍용차 투쟁의 전개과정과 의의(이종탁)
쌍용자동차 투쟁평가Ⅱ – 쌍용자동차 투쟁과 향후 민중운동의 과제(이현대)
일반논문
* 통합적 학문연구와 통섭의 기본방향: ‘해석학적 비판과학’으로의 학문 통합을 위하여(김세균)
* 노인장기요양 서비스 공급구조의 왜곡된 시장화: 시행 1년을 맞이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문제점(제갈현숙)
*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위한 몇 가지 테제들과 ‘보-녹-적 연대’(이광일)
반론
이득재씨에게 보내는 편지: 국민이라는 괴물 이득재씨의 서평,
「비‘국민화’의 회로는 정말 가능한가」에 대한 응답(니시카와 나가오(西川 長夫))
서평
* 빌헬름 라이히, 그리스도의 살해, “인민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라바를 원한다.”(최형묵)
* 강수돌· 홀거 하이데,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자본주의 작동원리를 내면화한 우리의 모습을 인정하는 데서 대안사회는 출발한다.”(황선길)
* 김영수, 상상력으로 민주주의를 혁명하라, “희망상실의 시대에 상상력의 정치를”(오창룡)
* 박준성,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 “한 역사학자의 삶,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이야기”(임경석)
진보평론 40호 특집 “여성·환경·노동운동 평가를 넘어 연대를 향하여”
진보평론 39호 특집 “전교조,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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