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부터 이화평 노동건강연대 회원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인 그가 병원 진료실에서 혹은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경험했던 보람과 고민거리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몇 년 전 이야기지만 직업병을 전공으로 하는 의사로서 부끄러운 이야기가 있지만 소개하려 한다. 직업환경의학과 (구, 산업의학과) 전공의 혹은 전문의들은 산업 현장으로 출장검진을 가곤 하는데 나도 수년전 전문의가 되기 전에 한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비록 전문의 신분은 아니었지만 이미 삼사 년 간 직업병 진단과 치료에 관한 수련을 받은 전공의 ‘고(高)년차’였고, 많은 노동자들을 진료하고 상담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에 출장을 간 공장은 일반적인 검진을 하는 곳이라 특별한 곳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방문했다.

진료를 받는 분들은 이미 1년 전에 일반 검진을 받았기 때문에 각자의 기록부에 이전 검사 결과들이 적혀있었다. 한 아주머니의 기록부에는 작년 검진의 결과인 ‘이상지질혈증 주의’라는 내용이 적혀있었고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수치들이 높은 상태였다. 나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우선 ‘생활습관 개선’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생활습관 개선’이란 다름 아닌 운동, 금연, 혹은 식습관 개선과 같은 것들을 말한다.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역시 생각했던 대로 ‘습관’이 안 좋았다. 1년 전 이상지질혈증을 주의하라는 내용과 운동 및 생활습관 개선에 관한 서면 통보를 받은 뒤에도 보건소나 의원은 가본 적이 없었고 아무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는 듯 했다. 나는 마침 잘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생활습관의 문제와 개선 방법에 대해 이 기회에 좀 배우고 가시라는 생각에서 내가 알고 있는 개선 방법들을 아주머니 앞에서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왠지 이야기가 잘 안 통하는 것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생활 습관이 나쁜 사람들의 변명?

“아주머니, 이상지질혈증이라는 것은 콜레스테롤이 높은 상태를 말하는데 혈관에 문제를 일으켜서 질병을 가져올 수 있으니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우선 당장 약을 먹는 것보다는 운동을 몇 달 동안 규칙적으로 하고 나서 다시 검사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말씀하시길, “전 운동할 시간이 없어요.”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는 생활습관이 나쁜 사람들이 곧잘 내놓는 변명처럼 들렸다.

“그래도 시간을 내셔야지요. 혈관에 병이 생길 수도 있어요.” 생활습관이 불량한 아주머니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엄포를 좀 놓았다.

“일이 많아서 할 시간이 없어요.”

“그러면 밤이라도 좋으니 공원에 가셔서 한 바퀴씩 도세요.” 밤늦은 시간에 공원 운동장을 빠른 걸음으로 몇 바퀴씩 도는 아주머니들을 본 적이 있어서 그렇게 하시라고 권유를 했던 것이다.

“밤 10시에 일이 끝나고 집에 가면 11시에요. 1시간 동안 집안일 하고 자면 12시라서 밤에도 운동을 못해요.”

“이른 아침은 어떤가요?”

“6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동안 가족들 챙겨주고 나서 출근하고 8시에 공장에 도착하면 일을 시작해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마음이 있다면 길이 없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주말에라도 하세요.”

“주말에도 일을 해요.”

“일요일도 말인가요?”

“네.”

“아니, 그럼 한 달에 며칠을 쉬세요?”

“하루요.”

처음에는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으시던 아주머니는 그냥 포기하시는 듯했다. 나도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서 당황하다가 약을 드셔야 할 것 같다고 말씀 드리며 상담을 서둘러 마치고 말았다.

이 아주머니에게는 정말 고지혈증 치료약을 먹는 방법 외에는 아무런 개선방법이 없었다. 의사들은 현 의료제도 하에서는 교과서적인 진료를 할 수 없다는 불만을 많이 토로한다. 그러나 이 분은 교과서적인 치료법을 알아도 이를 따라갈 수 없는 ‘현실’을 가진 분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데로 하자면 생활습관 개선이 우선인데, 바로 약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가 참 어려웠다.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직장에서 월급을 좀 더 받기 위한 선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상황에서라면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생각하며 상담을 마쳐버렸다. 그러나 나중에야 그렇게 일을 많이 하고 나서 받는 월급이 어느 정도인지를 대충 알게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액수의 절반 정도 되는 적은 돈이었다. 긴 노동시간과 적은 월급. 그것이 문제였다.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지식도 있고, 실천해 볼 만한 좋은 치료법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현실’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좋은 기회를 만나 환자를 깨우쳐주려던 의사로서의 나의 노력은 말 그대로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오히려 나는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하루 몇 시간을 일하는 지조차 정확히 몰랐던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 이제는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전문의가 되고 나서 거대한 공단의 한 공장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지게차를 운전하는 한 노동자를 만났는데 역시 ‘생활습관 개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분 역시 보건소나 의원을 방문할 형편은 되지 못했다. 예전에 만났던 아주머니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생활습관의 문제뿐만이 아닌 노동시간의 문제도 있었다. 이 분의 말씀으로는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출근한 뒤 바로 일을 시작하는데, 일이 끝나고 집에 가면 밤 12시가 돼서 바로 잔다고 하였다. 하루에 6시간 잠을 자는 것 이외에 모든 시간을 일에 쏟아 붇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시지 말라고 했더니, 그렇게 해야 그래도 월급을 좀 더 쥘 수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요즘 일이 엄청나게 많다고 했다. 일의 내용을 들어보니 하루 종일 지게차로 엘시디 TV를 운반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외국에서 월드컵이 한창일 때라 TV가 굉장히 많이 팔려서 두세 달 정도 쉴 틈이 없이 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사정이야 있겠지만,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일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은 자신의 몸 상태가 상당히 안 좋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느낌으로 하루하루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일하고도 몸에 병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닐까? 규칙적인 운동이나 생활습관 개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보았지만, 그런 말들이 내 입을 통해서 나오는 순간에도 나는 왠지 움츠려드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전공의 시절과는 달리 전문의가 된 지 수년이 지난 지금, 일반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노동시간의 문제를 이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긴 노동시간과 관련된 건강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일을 중단하거나 직업을 쉽게 바꿀 수가 없으니, 당사자에게 알맞은 처방을 알아도 쉽게 해결할 수가 없다. 건강 문제를 상담할 때 일하는 시간과 교대 작업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지만, 각자가 처한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이러한 부분들이 의사인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한국도 이제 세계인들에게 인정받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 노동자들의 ‘삶의 현장’은 다른 분야와 함께 발전하지 않은 것만 같아서 항상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소위 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진정 바뀌어야 할 부분은 ‘노동시간 줄이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