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내가 싸우는 이유는 현장을 바꾸고 싶은 게 밑바닥에 있기 때문이에요
– 박영일 산재노동자협의회 대표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주택가 골목, ‘소망교회’라는 작은 교회지하. 도로에서 서너 계단을 내려가면 , 칠이 벗겨지고 갈라진 나무현판이 걸려있다. 유리문을 밀자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수천 부의 신문을 쌓아놓고 접고, 봉투에 넣고, 묶는 작업을 하느라 분주하다. 30여 평 남짓한 사무실이 종이먼지로 부옇다. 작업대로 쓰는 탁구대의 초록색 매트 한쪽에 흰 우편봉투들을 보니 한국노총 로고가 찍혀 있다. 맞은 편에는 민주노총 로고의 봉투도 보인다. 민주노총은 정기 발행하는 기관지, 한국노총은 3.8여성의 날 포스터 발송을 의뢰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이다. 바쁘다고, 멀다고 한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다. 동네빵집에서 사온 빵을 한 아름 안겼더니 함박웃음들이다.
신문을 봉투에 넣고 있던 박영일 대표가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요?” 웃으며 나온다. 탄탄한 체구와 울림통 큰 음성에서 오는 활기가 그의 첫인상이다. 알고 지낸지 10년이 넘은 그와는 공유하는 추억이 많다.
몇 해 전 겨울, 빵집 앞을 지나다가 “아이들 갖다 주세요” 하며 크리스마스 케익을 건네줄 때 그걸 받아 든 나는 참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의 차를 타고 지방에서 회의를 마치고 상경하는 길, 깊은 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를 몽땅 털린 적도 있다. 우리 일행의 가방들은 고속도로 가장자리 풀숲에 가지런히도 버려져있었다. 가방 안에 들어있던 노동법전들이며, 회의 자료가 도둑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노동자의 자살에 관련한 자료가 잔뜩 들어있는 가방을 열었을 때 그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도둑은 쩨쩨하게도 필자의 지갑에서 전 재산 2천원을 빼갔다.
“산재노협 사무실 입구”
? 산재노협 소개를 부탁합니다.
으아… 다 알면서 쑥스럽게
? 에 처음 소개하는 거야, 정식으로 해주세요.
산재노협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지나간 후 만들어졌어요. 산재를 직접 겪은 당사자들이 모여서 산재보상법을 몰라서 우리처럼 피해 받는 노동자가 없게 하자고 교육받고, 만들어졌죠. 목적은 산재를 알리고, 병원에 방문해서 치료권리를 알려주는 사업을 하죠. 병원방문사업과 상담은 중요한데 20년 넘게 하다 보니 다른 사업도 고민을 해야겠어요. 폭넓게. 재활이나 현장복귀사업도 계획에는 있었는데 10년 째 아직도 고민하고 있죠. 지난 1월에 총회를 하고 새 집행부를 꾸렸고요, 사업계획을 얘기했어요.
? 회원들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나요? 여성회원은 못 본 것 같아요.
네. 회원 중에 여성은 없어요. 후원회원 중에는 여성이 좀 있네요. 나이는 제가 서른 여섯으로 제일 어리고요, 40대, 50대가 많아요. 90%가 사고를 당한 환자고요, 근골격계 직업병이 있는 분도 조금 있어요. 경제, 생활고 문제가 크죠. 결혼한 사람이 거의 없는데 회원 두 분이 최근 결혼을 했어요. (부인들 중) 한 사람은 캄보디아, 한 사람은 베트남에서 왔대요. 다 돈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회원들이 부러워하죠. 한국 말 배우려고 노력한다고 하대요.
? 산재 상담 사업이 제일 중요한 일이겠죠?
전국에 산재 이름 달고 브로커하는 조직이 26개라고 해요. 저기 대림역 앞에만 가도 ‘중국노동자 산재보상’ 간판을 볼 수 있어요. 우리는 브로커하는 데가 아니니까.
병원에 방문하고, 인터넷을 통해서나 요새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가 알려지면서 직업병 상담이 들어와요. 여기 서울남부지역도 노동조합 네트워크 통해서 상담을 많이 하기로 했어요. 구로 지역에 IT 노동자가 13만 명이라고 하니까요.
? 아까 들어올 때 보니 우편발송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재정사업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96년에 우편발송대행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 때 대표로 있던 분이 재정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민주노총 출범하고 나서 발송사업을 따왔죠. 대선 때 권영길 버튼 발송도 하고,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회원들이 할 수 있는 일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열망으로 2005년 로 발전했어요. 취지는 치료를 받아도 재활이 없고, 중증장애로 직장을 갖지 못해서 그 분들이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재활을 하려고 하는 거죠. 원래는 산재노협과 따로 분리해서 사업체를 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자활공동체를 하면서 장애인고용지원금을 받게 되었어요.
산재노동자 공간이, 장애인 복지가 이 정부 들어와서 많이 줄었어요. 장애인 고용지원금이라 해도, 장애 6급 이하에, 일한지 4년이 넘으면 지원금을 끊어요. 취업연수가 오를수록 줄이고요. 그래서 올해부터 지원금이 줄어서 자체적으로 임금을 보존해줘야 해요. 법정 최저임금은 맞추려고 하는데 일거리가 꾸준히 오는 게 아니라서… 몰릴 때 몰리고. 노동조합이 주 고객이니까 시기가 겹칠 때가 있죠. 신문이나 포스터가 나오는 때가 비슷하니까요.
? 발송 사업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하고 싶지만 대표님 개인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산재노협에 어떻게 오게 됐나요.
다 아는 얘기잖아요.
? 아니에요, 다시 해 주세요. 자세히 들은 적 없어요.
98년 4월 17일 오전 9시 57분 사고를 당했어요. 시간, 그 시간을 잊어버리지 않아요. 인천 길병원으로 갔더니 손목을 절단해야 한다고 하길래 광명성애병원으로 갔어요. 산재를 회사에서 한 건 알고 있었는데, 6월인가 병원에서 산재노협을 알게 됐어요. 회사에서 불리한 내용을 요양신청서에 쓸 수도 있으니 잘 봐야 된대요. 그 때부터 산재노협하고 친해지고 7월에 사무실에도 놀러가고, 10월에는 회원가입을 했어요.
산재노협의 도움을 받으면서 오게 되었어요. 전혀 몰랐던 걸 알려주고 불리한 걸 확인해주니까요. 원무과에 확인하러 가니까 최초 신청서에 나의 부주의라는 내용이 있어요. 민사소송을 하게 되면 큰 영향을 미치는 내용이래요. 산재교육에서 대응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열심히 작업 중인 산재 노동자들의 모습”
? 무슨 일을 하다가 손을 다친 건가요?
군대를 가려고 할 때 구청에서 방위산업체를 권했어요. 16명이 일하는 데였는데 선반 깎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배운 적도 없는 프레스 일을 하라고 하더라구요. 난생처음 해보는데 한 달 안돼서 손을 다쳤어요. 제일 억울한 게 자동차에 관심이 많고, 자동차 만들 때 엔진 깎는 데 일하다가 … 스물 셋, 왜 다친지도 몰랐어요. 느낌이 없으니까. 손이 따라오는 느낌이 나서, 보니까 프레스에 닭발처럼 손이… 꿈을 접어야 하니까 사람들 만나기가 싫었고, 친한 친구도 안 만나다가 유일하게 만난 사람이 산재노협 사람들이죠.
산재노협에 왔을 때, 장애가 생기고 대인기피증이 걸렸는데 산재노협에 오니까 더 심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두 손으로 마우스를 쓰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비장애인들하고 있을 때보다, 여기서는 손을 꺼내놓고 있을 수 있어서 편하게 해 주고 교육 받으면서 산재는 이렇게 하는 구나 알면서.
? 다친 시간을 얘기하는 걸 보니… 그 시간이 자주 생각나고, 힘들지는 않은가요?
시간 때문에 그렇지는 않아요.
? 그러다가 산재노협에서 일하게 된 거군요. 젊고, 컴퓨터도 할 줄 알고요.
99년부터 재정국장으로 일하게 됐어요. 남한테 뭔가 해주고, 도움 준다는 게 좋았어요. 대인관계도 마음이 열리고, 비장애인 만날 때보다 에너지가, 인간은 교육 받으면서 발전된다고, 억울하면 얘기해야 하니까 싸워왔어요. 많은 모임도 보고,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반올림(삼성백혈병대책위)’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반올림에서 없으면 안 되는 조직이 되었는데… 경찰과 싸우면서 벌금도 많이 받았죠?
반올림의 집행부라서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요. 삼성과의 싸움이었고 힘들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걸, 아는 걸 나누는 거 정도죠. 정부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지만 내가 싸우는 이유는 현장을 바꾸고 싶은 게 밑바닥에 있고, 정부와 자본이 공권력으로 막아도 우리의 요구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요새 반올림하면서 벌금 받은 것은 3번이고요, 나머지는 대추리, 평택, 개별 싸움의 현장에서 받은 거예요.
? 힘들게 하는 만큼 보람을 느끼나요?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나요?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고, 보람이 아니라 현장이 바뀔 때까지, 요구를 관철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에요. 유족들이 나를 보고 힘을 받았다고 할 때 다행이다 생각은 하죠. 삼성이 대기업이고, 우리 움직임이 얼마나 영향을 줄까 생각했는데 반올림 카페보고 연락 오면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일류기업이라고 하면서 현장노동자들한테 실태를 숨기고, 하나씩 보면서, 상상을 깨는 정도의, 악랄하게 잔혹하게, 죽음의 현장이에요. 언론을 은폐하고, 가장 큰 문제는 건마다 삼성 죄를 묻지 않고, 현장이 개선되지 않고… 우리한테 왔을 때 막강해요, 정부를 휘어잡는 파워를 느껴요. 많은 노동자가 20대에 죽었고, 노동착취… 죽음을 대신해서 부를 얻고, 개선시키지 않고 변화도 없어요.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는 것에 분노합니다. 노동자건강은 생각 안 하고 숨기고 있었고, 죽음만 원할 뿐 자기 부를 위해서.
“박영일 산재노협 대표”
? 반올림 활동에 시간을 많이 내느라 산재노협 내부를 챙기는 시간이 부족하진 않나요?
일주일에 2~3일 투여했는데 산재노협이 다시 살기 위해서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분노를 느낄 수 있는 사업을 잡고 싶어요. 내부 고민을 갖고 반올림에 들어가야 하는데 몸 대주기로 한 건 아닌지. 뜻을 갖고 의도를 갖고 고민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정책을 내는 데가 따로 있고, 집회동원 해 주는 데가 아니라 우리가 뭘 해야 할지 만들어야 하는데 역량이 부족해요.
? 산재보험을 개혁하자는 움직임이 최근 사회복지 이슈를 타고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산재보험이 더 악랄해지는 것 같아요. 사회보장이 아니라 자본가들 악법으로 변질되는 것 같고… 투쟁이 부족한지, 그동안 민주노총이나 연맹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데.
당사자들은 지금도 산재보험이 있는 줄도 모르는데 제도개혁도 아는 자들, 경험한 자들 얘기잖아요. (제도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너무나 노동자의 치료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악법으로 있고, 개혁이 돼야 하고. 당사자 조직이 없어서인지 산재보험내용이 전문가 통해서만 얘기될 뿐, 실제 실태는 반영되지 않아요. 우리 내용, 고민을 모를 거고.
‘원 직장 복직’이 안 되고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치료받을 권리가 없는데… 전문가끼리 만들어서 공단이 결정권을 갖고. 내용 자체를 확 고쳐야 할 것이고, 바꾸자고 하는 내용도 같이 해 봤으면 좋겠고요.
내용을 잘 모르는데 그렇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개혁의 이유가 뭔지, 정말 밑에 있는 노동자 얘기를 들은 건지, 현실적으로 권리와 대안을 만들어야 해요. 내용은 좋은데 당사자가 보면서 전문가 위주가 아닌 밑바닥 의견을 반영했으면 좋겠어요. 너무나 전문가 중심이면 원망을 들을 거예요. ‘원 직장 복직’을 주장하는 게 경미한 사고가 아닌 경우에는, 안 다친 사람도 구조조정 하는 판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그걸 바꾸려면 여러 가지 포괄적으로 바꿔야 하는데, 손가락이 없는데 작업할거냐, 원하는 게 뭐냐, 이런 부분들이 현실성이 없어요.
? 앞으로 전망, 활동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개인적 전망은 부딪치면서 싸우면서…뭐 있겠어요?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게. 부딪치는 과정에서 바꿔야죠. 우리는 매일 뒷북만 치고 억울해요. 우리 요구안이 먼저 나왔으면 좋겠어요. 일 터진 다음에 천막치고 농성하지 말고. 전문가 위주가 아니라 각계각층 넓혀가면서, 시민과 연결고리를 만들고 지속적으로 가는 것. 전문가 중심 개혁이 아니라 시민이 호응하고… 이상적이지만 필요해요. 산재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석면처럼 주위에서 관심이 퍼지는 것, 당사자만이 아니라 시민도 혜택을 받게.
5년째 대표를 하고 있는데 이번 임기가 마지막이에요. 이제는 고민하는 조직이 돼야죠. 산재노동자운동이 말 그대로 산재노동자 누구든 위해서 가장 약한 점을 해결하고 고민을 나누는 조직, 발판을 만드는 작업, 상담을 하니까. 산재승인이 아니라 산재가 발생하지 않는 사회가 돼야 가장 이상적이죠. 조직적으로 같이 고민하면서. 공간이 협소해서 공동체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회비, 후원금이 부족하죠.
– 지속적인 재정사업 일들을 만들어야 함. (예) 9시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할 수 있는 지속적인 일. 금액이 적더라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 함. |
지난 1월에 열린 에서 발췌해 보았다. 산재노협의 회원들은 대부분 손을 다친 후 장애가 남아있다. 우편발송 작업에서 필요한 자동화공정을 손으로 다 하려니 힘이 부친다. 더 많은 작업을 수주하는데도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자동화기기를 구입하려면 큰 돈이 필요하고, 현재로서는 기부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작업환경도 좀 더 일하기 좋은 환경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여력이 없다. 무엇보다 무거운 우편물을 옮기는데 계단은 큰 방해물이다. 작업공간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야 하는 이유다. 산재노협에서 재정사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절실한 이유는 그들의 힘으로 만든 사회복지이자 고용창출이기 때문이다.
고용지원금이 대폭 깎이면서 공동체문화도 사라지고 있다. 작업 중 점심시간은 직접 식사준비를 하고 밥상을 차리는 밥상공동체의 향기가 풍기는 훈훈한 시간이었다. ‘일도 안 하면서 왜 그렇게 많이 먹냐’는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밥을 많이 먹어서 사랑받았던 나에게는 더 그러하다.
그러나 2011년 정부의 고용지원금이 삭감된 점심시간의 풍경. 한두 명은 식은 도시락을 꺼내고, 대부분은 근처 식당으로 간다. 식재료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식사는 각자 해결하는 시스템이 되었다. 웃음과 수다가 오고가던 공동체의 밥상이, 한 끼를, 자기만의 밥그릇을 해결해야 하는 차가운 현실에게 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