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지지 말고 인정하지 말고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
이 책은 18대 대선은 결과표가 나온 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거결과에 대한 흥분 또는 아쉬움이 있을 것이고, 한 해를 떠나보내는 감상의 언어가 충만할 때입니다.
2012년은 곳곳에 노동자들이 눈물과 분노를 묻어 놓았습니다. 좋은 소식들을 떠올려 보려 해도 잘 안 되는군요. 시청 앞 대한문의 쌍용차 노동자들, 거대자본의 불법에 맞서 싸우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자들부터 뉴스에 한 줄짜리로라도 등장하지 못하는 많은 현장이 있습니다. 구사대를 강요당하고 동료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유성기업노동자의 자살, 부당해고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았지만 다시 정리해고를 당하고, 다시 싸우고 있는, 투쟁 2천일이 넘는 콜트콜텍 노동자들, 교육현장에 없어서는 안 될 업무를 하면서도 1년마다 재계약의 불안을 겪고,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는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 .
하루도 빠지지 않고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죽어가는 현실 또한 평범한 사건사고 기사조차 되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건설현장 화재로 노동자 4명 사망, 용광로 쇳물이 엎어진 현장에서 2명의 노동자사망, 화학공장에서 8명의 노동자 사망, 여의도 두배크기 제철소에서 3개월 사이 5명 노동자사망, 대형 조선소마다 잇따라 발생한 하청, 이주노동자의 사망 …. 주요사고 몇 가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대기업이 연관돼 있습니다. 죽지 않아도 되는 죽음, 죽지 않을 수 있는 죽음 들입니다. 많은 경우 명확한 고용관계가 아니라 3차, 4차, 5차, 하청의 하청으로 이어지는 불법착취, 책임회피 속에 노동자들이 죽어갔습니다.
택배노동자, 퀵서비스노동자, 청소노동자 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위탁, 개인사업자, 사장 이라는 이름으로 일하다가 사고로 죽거나 과로로 죽었습니다.
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책임자를 찾아내 고발작업을 하는 것도 어느 기업 소속인지 파악하기 어려워 포기해야 할 만큼 비정상적인 다단계 고용구조가 퍼지고 있습니다. 일자리 갖고 장난치는 나쁜 사장, 나쁜 기업이 너무 많습니다. 가을부터 노동자사망이 이어진 대기업제철소 자료를 찾다보니 이 현장에서 일할 노동자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초보자환영’ ‘기술을 배워 사업체 차릴 수 있다’는 문구가 들어 있습니다. 나쁜 일자리에서 일하다가 죽어가는 노동자가 너무 많습니다.
한해가 새로이 오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노동자가 투쟁하고 있는 거리, 너무 많은 노동자가 너무 긴 시간 일하는 일터, 너무 많은 노동자가 너무 많이 죽는 그 자리, 복잡해서 사장조차 찾기 어려운 피라미드 같은 고용 구조.
늘 놀라고 늘 분노하고 늘 대안을 찾을 수 밖에 없는,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노동자의 투쟁과 죽음들 앞에서 무뎌지지 말자고 인정하지 말자고 다잡는 마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아직 충분히 외치지 않아서 충분히 싸우지 않아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폼나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던 노동자들의 투쟁이 길어지고 깊어지면 사회를 깨우는 종소리가 됩니다.
내면의 무관심과 냉소를 떨쳐야겠습니다. 적어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저는 그렇습니다. 싸우는 자만이 변화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익숙한 습관을 떨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이 계절이 아니고서는 쉬이 가질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묵은 해를 보내는 심정을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며 각오를 다지고 하는 일이 의욕만큼 잘 되지 않습니다. 김장을 하고 시래기를 말리고 나물 삶아 겨우살이 준비하듯이 산짐승들이 겨울잠 들어가듯이 우리네도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며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는 농부의 글을 읽었습니다. 반듯하게 오려 스크랩 해 두었습니다. 부산스럽게 어제와 같은 하루가 가듯이 한 해 마지막 날을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