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기록하고 되짚다1
속 깊은 대화 :
앞이 보이지 않게 된 노동자들과 함께 한 1년
대담 참여자 : 김명희 / 편집위원,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상근연구원
박혜영 /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비가 내리던 지난 6월의 어느 날, 서울의 한 카페에서 노동건강연대 박혜영, 전수경 활동가들과 ‘메탄올’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년 노동자들의 메탄올 중독사건이 세상에 알려진지 1년이 넘었다. 이 날도 두 활동가 모두 ‘다음 스토리펀딩’의 마무리를 장식할 토크 콘서트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사건을 알리는 언론 인터뷰는 많이 했어도, 오랜 시간 차분하게 앉아 자신의 지난 활동을 돌아보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야기는 길어져서, 점심을 먹고 자리를 옮겨서도 계속되었다. 인터뷰는 편집위원인 김명희가 진행하고,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영펠로우 류한소가 기록과 정리를 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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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병원을 찾아갔던, 가서 만난 것
김명희: 이번 메탄올 사건의 발단부터 지금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피해자들과 함께 이 문제를 다뤄왔는데, 뭐가 제일 보람 있었고, 제일 아쉬운 건 뭐였는지 얘기해주세요.
박혜영: 가장 보람 있었던 건, 무작정 병원을 찾아갔던, 가서 만난 것. 여섯 명 중 두 명은 병원에서 만났고, 두 명은 수소문도 하고, 트위터에 어떤 간호사가 올린 글 보고 쪽지 보내서 무작정 찾아가게 되었고… 하루하루 피해자 찾느라고 인터넷을 얼마나 뒤졌는지 몰라요. 두 명은 나중에 사무실로 제보가 온 건데요. 사실 처음에 엄청 경계를 하셨는데 일단 만나서 얘기를 들은 것. 가족이나 지인 이외의 첫 사람인 거라서. 뭐랄까, 사건으로 다가갔다기 보다는 인간의 삶으로 다가갔다고 그래야 되나? 그런 경험을 한 것 같아요. 흩어져있는 피해자들과 관계를 맺는 게, 활동하는 내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는데, 계속 관계 맺음을 했어요. 그래서 더 자세한 상황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되었고, 피해자들도 서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서, 그게 보람 있는 것 같아요. 아쉬운 건, 노동계에서 폭넓게 이 사건을 함께 대응하지 못한 것. 처음에는 뭔 상황인지,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몰라서, 각자 대응하다가 굵직한 요구 같은 걸 못 만든 게 아닌가 아쉬움.
김: 제대로 대응을 못했단 건 어떤 거죠?
박: 피해 당사자들은 만났지만, 사건이 일어났던 인천, 부천 지역과 상황을 공유하고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일을 못했어요. 인천 지역은 건강권 운동을 하는 분들이 계셔서, 이 분들이 적극적으로 해주셨죠. 노동자들은 자기가 메탄올을 쓰는지조차 모르는데 메탄올 피해자 찾는다고…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부천은 그것조차 안했거든요. 그걸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상의할 수 있는 조직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작년 10월 초에 추가 제보 들어오고 나서야 답답한 마음에 부천을 무작정 갔죠. 가기 전에 민주노총에 물어봤을 때, 부천 지역에는 조직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고, 그래서 한국노총부터 찾아갔죠. 비정규센터랑 이주민 센터도 찾아갔어요. 이 사건을 알고 있는 데가 없더라구요. 그 때 후회를 했죠. 진작에 찾아왔으면 어땠을까. 물론 이 사건을 혼자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기는 했지만… 나중에, ‘누가 운 나빠서 눈이 멀었다며?’, ‘그런 일이 있었다더라’는 얘기가 공장 주변에 돌았다 하더라구요. 김영신, 전정훈 씨도 사건이 알려진 지 9개월 만에 알려지고, 현장이랑 멀리 있어서 그리 된 게 아닌가 싶어요.
“나 방송하면 피해자 줄일 수 있어요? 그럼 할래요”
김: 일로서 제일 어려웠던 건 뭐예요?
박: 기자들 상대하는 것 (웃음). 산업 담당 기자들한테 연락이 많이 와 가지고… 노동을 생판 모르는 기자들이 1부터 다 물어보니까.
김: 근데 그들이 왜? 노동 기자가 아니라?
박: 삼성 LG 얘기가 나와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헤아려보니까 5~60명은 넘게 만난 것 같은데, 왜 힘들었냐면, 사건이 일어난 맥락을 설명해야 되니까. 노동재해의 역사부터 설명을 해야 했어요. 제가 1년에 몇 명의 노동자가 일 하다가 죽는지 아시나요 물으면 안다는 사람이 한 5% 되려나? 위험의 외주화 이런 말은 들어봐서 아는데, 사망은 정말 몰랐다는 거죠. 1년에 2천명이 죽는 거는. 파견노동에 대해서도 한두 시간 인터뷰를 해 가면, 기사에는 대기업 하청 문제만 나와요. 초창기에는 언론에 피해자 인터뷰가 제법 나갔어요. 당사자는 몸도 마음도 아프고 힘든데, 자꾸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연락이 와.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힘겨워 하는 당사자 설득하고 같이 울고, 다독이고 또 가족들이랑도 양해 구하고, 한다 안한다 했다가 그 때 정말 마음이 힘들었죠. 가족들이 언론을 굉장히 꼼꼼하게 모니터링 하셨는데, 기사에 사실관계가 다른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거나 개인정보가 생각보다 많이 나가면 그걸 다 나한테 항의하세요. 기자랑 인터뷰 할 때 말씀하신 건데, 그거 고쳐달라고 나한테 뭐라고 하니까, 난 또 밤늦도록 기자들이랑 실랑이 벌이고, 고쳐지기도 하고 안 고쳐지기도 하고, 당사자들이나 가족한테 미안하고. 중간에 시사매거진 2580 촬영할 때, 아무도 인터뷰 못하겠다고 하고, 나도 공중파에 그렇게 나가는 건 지금 상태에서 많이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갑자기 새로운 피해자가 나온 거에요, 이진희 씨. 그 날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이현순 씨한테 전화가 왔어요. “나 정말 하기 싫은데, 또 다른 피해자가 나왔다면서요? 내가 방송하면 더 피해자 줄일 수 있어요? 나 그럼 할래요.” 하는 거에요. 그날 전화통 붙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네이버 기사에 댓글 다는 활동가
김: 그럼 본인이 활동가로서 성장한 부분은 뭘까요?
박: 이런 민망한 질문을… 저는 감성적인 사람이라서, 차분하게 정리하는 버릇은 생기긴 했어요. 자칫하면 관성에 따라 일하게 되는데, 이번 경험을 하면서 그걸 경계하는 훈련이 되었어요.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편협한지를 깨닫기도 하고…
김: 아,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박: 너무 부끄러웠어요, 진짜. 트위터, 우리가 보는 페이스북이랑 언론, 그 바깥의 세상을 맞닥뜨렸다는 생각이 들고, 편하게 운동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반성을 하고…
김: 지식인 사회에는 뭐가 제일 놀라거나 실망한 거예요?
박: 지식인 사회는 일단은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평론을 먼저 시작하는 것 같애(웃음). 민주노총도 그렇고…
김: 민주노총이 지식인입니까?
박 : 글쎄요, 지식은 많죠. 그 지식이 현장이랑 괴리된 것 같아요. 처음 사건 터지고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기대했거든요. 우리는 당사자들이랑 관계가 있고, 현장 노동운동에는 현장의 감각이 있으니까. 그런데 민주노총 현장에서는 이 일을 몰랐고, 중앙에서는 어땠냐? 민주노총이 직업환경의학회, 한국 산업보건학회, 한국 직업건강간호학회랑 같이 국회에서 토론회를 개최한다면서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토론회 할 건데 장소 좀 빌려봐 봐’. 그 황당함은 말로 못해요. 전문가들 모여서 토론회를 할 때인지 모르겠고,. 결국 토론회를 하더군요. 토론회에도 오라는 얘기조차 못 듣고, 포스터 보고 찾아 갔죠. 보고 있는데, 정말 저들이 이야기하는 것 때문에 사건이 발생한 건가? 예방책이라고 제시한 걸 하면 정말 예방이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분들도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하고, 여러 각도에서 분석을 했어요. 근데, 저들이 현장, 파견노동의 현장, 무정부상태인 그 현장을 정말 알고 있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어요. 또 파견 노동이 아니라 영세사업장 건강관리 문제, 메탄올 문제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동안 산업보건이라는 게 저런 식으로 되어 왔구나, 현실은 없고 서류만 있었구나. 토론회 다 끝나고 손들고, 피해자들은 이렇게 지낸다, 이거 좀 생각해달라, 이렇게 한 마디 하고 말았는데. 그 뒤로도 노동부에서 노동계랑 미팅을 엄청나게 했대, 한 달에 한 번 이상. 어떤 내용이 오고 갔는지는 지금도 몰라요. 들은 일이 없으니…
김: 그 노동계라 함은 민주노총?
박: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노동안전보건 담당자요. 그래도 피해자 문제는 내가 젤 잘 아니까, 상의도 하고, 다양한 각도로 하면 좋았겠지만, 그런 상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많이 아쉬웠어요. 좀 더 상의하고, 폭넓게 대안도 내서 현장을 더 들여다보는 활동을 했으면 어땠을까. 제가 사건 대응에 지쳐서 좀 휴식을 취하다가 9월 말에 전정훈 씨랑 김영신 씨 새로 제보받고 바로 기자회견 급하게 열었잖아요? 그리고 김영신 씨랑 같은 회사를 다니던 양호남 씨 누나를 만나러 수원에 JTBC 기자랑 가 있는데 민주노총에서 전화가 왔어. “내가 뭘 해야 되냐?” 이러는 거예요. 뒤늦게 부천 지역엘 찾아갔더니 이 사건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같이 선전전이라도 하자 했더니 유인물을 만들어 오라는 거야, 뿌려주겠다고. 지역에서 상의 해보고 의견을 내 보겠다,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어요. 우리는 지역 상황을 잘 모르기도 하고, 단순히 피해자만 찾는 것보다는, 파견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나 행동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갔는데.
김: 그러니까 민주노총 라인 안에서도?
박: 응. 한국노총도 다를 것 없고, 지역 비정규센터도 몰랐어. 외국인 노동자 센터도 몰랐고.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이 문제를 아는 데가 한 군데도 없었어요.
김: 신문에도 제법 나왔는데…?
박: 아니 한번이라도 얻어 걸려야 될 거 아니야. 얼마나 기사가 많이 나왔어? 시사프로그램도 다 나왔고. 저는 초반에 민주노총 중앙에서 부천이나 인천 쪽이랑은 이 문제를 가지고 상의를 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추가 피해자는 진짜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나중에 부천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부천이나 인천 지역에는 없는 거냐 한탄을 했더니, “거기 찾아가 봐” 그래서 뒤늦게 찾아간 거야.
김: 만약에 유사한 일이 또 벌어진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죠?
박: 팀을 잘 꾸려야 된다. 관성적인 연대, 대책위 같은 거 필요 없고. 해서도 안 돼. 대책위 같은 건 하면 실무만 늘어나. 정말 끔찍해. 현실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걸 찾아야죠. 지금 꾸리라 그러면 뭐 부천, 인천, 비정규센터 이런 데 찾아갈 것 같아. 안산 비정규센터도 포함하고, 파견 문제 하는 조직 포함하고. 하여튼 무슨 서울에 60개 조직 연대체, 이런 건 안 돼.
김: 기존에 하던 중앙 단위의 이런 게 아니라?
박: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역할도 있겠죠. 그런데 현장에서만, 지역에서만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있거든요. 지역의 정서와, 현장 상황 이런 것들. 그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싸울 수 있는 당사자도 한명이라도 더 생기고. 작년에 제가 네이버 지식인이나 언론 기사 중 파견, 메탄올 관련된 글들에 댓글을 달고, 혹시 유사한 피해자가 있는지 찾는 일을 했어요. 그 댓글에, 궁금한 게 있으면 전화 달라고 사무실 전화번호를 엄청 뿌렸거든요. 사고가 발생하고 몇 달 후에 사고 난 세 개 업체 중 두 개에서 일을 했다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어. 어떻게 알고 전화했냐고 했더니, “댓글에 전화하라고 써놓으셨잖아요” 하더라고요. 1~2월에 사고가 났는데 전화 온 게 5월쯤이었어요. 왜 이제야 전화했냐고 하니까, 자기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는데, 같이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지나가면서 누가 눈이 멀었다더라 이런 얘기를 들었대요. 그래서 검색을 해봤다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구요. 그 분은 저랑 다섯 번 정도, 한 번에 1시간 정도씩 통화를 했어요. 폐업한 업체가 어디 가서 다시 회사를 차렸는지, 노동환경은 어땠는지, 누가 어떤 방식으로 공정에 투입되는지 등을 자세하게 들었어요. 중간 중간에 계속 노동법에 대해서 묻는 거에요. 한국노총 노동상담소에도 실제로 찾아가셨고, 도움도 받았어요. 10월에 새로 피해자가 밝혀지고 나서, 그 분을 만나 또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도 했죠. 88년생인데, 고시원에서 어떻게 사는지 얘기도 듣고… 그 분은 결국 공장 일 그만 두고 건설현장에서 일해요. 건설현장이 일 하는 시간은 비슷한데 돈은 더 많이 줘서 그게 더 좋대요. 후배 활동가들이 이런 일을 하면, 현실을 제대로 알면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과 무언가를 도모하는 일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옥문이 열린 걸 보는 듯했다
김: 전수경 활동가는 이 사건이 있는 동안 세월호 특조위, 말하자면 좀 바깥에 있었잖아요? 박혜영 활동가하고는 상황이 달랐을 것 같아요.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얘기해주세요
전: 일단 엄청난 사건이라고 생각했죠. 이중 구조화된 노동시장 밑바닥에서 뭔가 지옥문이 열린 걸 보는 기분, 맨 밑바닥부터 무너져가는 시스템을 빨아들이는 지옥을 보는 것 같았어요.
김: 시민사회나 노동의 대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어요?
전: 공무원 사회만 칸막이가 있는 게 아니라 이쪽도 칸막이가 있어요. 이게 소수 단체만이 아니라, 노동계가 같이 대응해야 될 일이었는데, 너무 전문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으로 칸막이를 쳐버린 것 같았어요.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전문가가 대응 과정이나 정부와의 대화 라인을 독점한다든가… 이 분야의 활동 시스템이 전문가 중심으로 되어 있고… 사실 메탄올 사건이 부천이나 인천 노동현장이 아니라 우리 같은 단체로 들어온 건, 우연히 초기 진료를 담당했던 전문가가 우리 회원이기 때문에 그리 된 것도 있지만, 지역에서 활동하던 일반노조, 노동 상담소, 지역 네트워크 이런 데가 작동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김: 현장에서 얘기가 들어온 게 아니라 병원의 진료현장을 통해서 왔죠.
전: 네. 지역별로 비정규센터들이 있고, 지자체 보조를 받으면서 운영되고 있는 곳도 많은데, 이곳들이 원래 지역 기반으로, 메탄올 피해자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권익을 보호하려고 있었던 조직일텐데… “공장마다 파견이 많더라, 서로 이름도 모르고 일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 이런 말 해주는 현장 활동가가 없었던 것 같아요.
김: 논의를 확대해 볼게요. 전수경 활동가는 세월호 특조위에서 안전과 관련된 포괄적 의제를 다뤘잖아요, 원전부터 시작해서 노동에 이르기까지. 그 2년의 과정을 거치면서 본인이 달라진 게 있나요?
전: 관점, 시각은 거의 변하지 않았어요. 전문가들의 밥그릇, 거기 맞춰서 셋팅된 관료, 공무원 조직. 이게 공고하게 자리잡은 상황에서 전반적인 사회적 의제와는 소통이 가로막히고, 전문적이고 기능적인 영역만으로 문제가 축소되었는데, 노동운동이 그걸 또 그대로 받아서 하다 보니 노동자 권리나 건강문제가 보편적 의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어요. 세월호를 보면서 안전, 건강이 민주주의, 정치 문제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박: 특조위 가서 사회제도에 대한 시각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전: 산재보험이든 노동부나 안전공단이든 이런 데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자기 권익을 보호할 조직이 없는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변화를 주는 거니까. 그 안에서 밥그릇을 차지하고 있는 관료 행태나 관료에 기생하는 전문가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관심이 많았죠.
김: 따뜻한 관심?
전: 서로 붙어먹고 사는 그 시스템을 깨뜨리고 다시 세팅할 수 있으면 좋겠다. 노동조합이 없는 대다수 90% 사람들에게 맞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답답해 가지고 ‘차라리 산재보험을 없애고 다시 시작하든지’ 이랬더니 대표가 나보고 ‘왜 무정부주의자가 되어서 왔냐’고 하더라고.
김: 한국 남자들은 메타포를 이해하지 못해요 (웃음). 무정부주의에서 죽어나는 건 사회적 약자예요.
청년 담론에서도 배제된 생산직 노동자들
김: 이제 본격적으로… 이번 메탄올 사건에 여러 층위의 문제가 겹쳐 있는데 하나씩 원포인트로 이야기해봅시다.
박: 노동에 대한 사회적 습관, 사회적 무관심. 위험하고 힘든 노동은 그냥 이야기거리로 소비되고… 옛날 이야기 같지만 현실에서 엄연히 존재하는데, 사회적으로 발언권 없는 사람들로 계속 채워지면서 여기에 무심했던 이 사회. 습관이라면, 노동계도 너무 하던 대로만 하고.
김: ‘그러려니’ 하는 것?
박: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럼 너네가 알아 와 봐 이런 식이거든요.
김: 전수경 활동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장 약한, 혹은 결정적 고리라면?
전: 최근에 한국사회 청년세대와 관련된 책들이 꽤 많이 나와 있더라구요. 혼자 사는 청년들의 라이프스타일, 사회적 기업… 청년 유니온이 최저임금 이야기를 다룬 책도 있기는 하지만, 이를테면《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의 그 ‘열정’에도 끼지 못하는 저학력 저소득층의 육체노동자, 현장 실습생들의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더라구요. 청년 담론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정말 밑바닥 저수지에 있는 청년들, 아무런 문화자본도 없고 사회적 네트워크도 없는 그 사람들의 문제가 메탄올로 드러난 건데… 키워드 하나를 꼽는다면, 그거 같아요. 불평등.
김: 메탄올도 아니고 영세 사업장이란 키워드도 아니고.
전: 영세사업장, 5인, 50인, 300인 이렇게 나누는 건 정부가 관리하기 편하라고 만든 기준이고, 전문가들의 밥그릇도 더 많이 생기는 것이고. 50인 미만 사업장 관리한답시고 그걸로 계속 돈을 벌잖아요. 사업장 경계를 넘어서 그냥 흘러 다니는 육체 알바 노동자들, 실업자, 계절공. 이런 젊은 육체노동자들의 경우에는 규모별로 되어 있는 정부의 관리 제도가 아무런 힘을 못 쓰고 있잖아요. 정부가 이걸 영세사업장, 공장 문제로 보는 건 경로 의존성도 있고, 갑자기 흔들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 그래서 차라리 산재보험제도를 없애버리고 근로복지공단도 없애고 일반 보건의료체계로 흡수해서 개별 국민에게 접근하는 시스템으로 바꿔야 그 사람들을 그나마 포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박: 그리고 뭔가 되게 정형화돼서 사업체가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떨 때는 10명이 일하고 어떨 때는 100명 일하는데 어쩌란 말이야(웃음).
김: 상상의 지평이라는 건 굉장히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상병수당, 휴업 급여, 이런 문제만 해도, 공무원이나 대기업 다니는 사람들은 아파서 이틀 못나가도 월급이 깎이지 않잖아요. 그런 것에 대한 상상이 없는 거야. 휴업 급여가 왜 필요한 건지, 상병 수당이 왜 필요한지, 인식의 지평 안에 없어요. 책을 통해서 학습을 해도, 경험치가 따라오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파견 이슈 대신 메탄올
김: 정부 대응에서는 뭐가 제일 문제였나요?
박: 언론플레이를 너무 잘하는 거야. 기자들 불러놓고 엄청 설명해대고. 잘하고 있으니까 칭찬해 줄 건 칭찬해주라 그러더라구. 근데 우리가 왜 칭찬까지 해줘? 칭찬은 남들이 해주면 되지(웃음). 나는 이미 박근혜 때문에 화나 있었거든. 파견법을 확대하라 그래서. 나중에 메탄올 대책 보니까 짜놓고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파견 문제가 완전 빠지고, 처벌에서도 그렇고. 노동부 담당자도 파견 문제로 볼 생각은 안 했어요.
김: 의도는 모르겠지만 프레이밍 자체가 물질 중심으로 축소돼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이 문제를 엉망으로 만드는 데 고리 역할을 했다, 이렇게 보시는 거죠?
박: 총체적으로는 그렇죠.
전: 노동부 안에서는 이게 파견고용 문제로 가는 걸 막으려고 했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용 정책의 실패나 파견제도로 가지 못한 게 있어요. 고용정책 실패로 확산되는 걸 막을 수 있게, 일주일 안에 소화기로 다 뿌려서 진화해버릴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니까. 정부로서는 성공을 한 거예요. 당시 박근혜가 밀어붙였던 파견확대 문제로 전혀 옮아가지 않고 불을 껐으니까. 노동 쪽에서 파견 문제로 쟁점으로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어요.
김: 전문가 입장에서는 이걸 빨리 알려줘야 환자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생각이지 이걸로 파견 이슈가 점화되는 걸 막겠다 이런 건 아니었잖아요.
전: 그렇죠. 그 문제는 전문가가 할 일도 아니고. 이쪽이 잡아채서 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던 거죠.
21세기의 전근대적 자본주의
김: 사측의 대응은 어땠나요?
박: 사측이 너무 많아, 이번 사건은(웃음). 일단, 파견사업주는 사고 대응한 게 일절 없었죠. 사고 당시에 산재 은폐하려고 했던 파견회사가 한 개 있었어요. 전정훈 씨한테 어차피 산재 안 되니까 몇백만 원 받고 합의하자고 거의 협박해서 합의서 받아갔죠. 파견회사들은 파견법 위반으로만 재판을 받았고. 이게 산업안전보건법상 문제가 됐으니까 사용사업주도 문제가 된 거죠. 사용사업주들은 각각 다른데 예를 들면 처음에 만났던 피해자들이 일했던 덕용 ENG에서는 ‘이렇게 위험한 걸 줄 알았으면 우리 가족이 다 나와서 일을 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데 거짓말은 아닌 거야. 그러니까 ‘피해자가 억울하니까 메탄올을 마셨다,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자기가 십년 이상 이 일을 했고 이 업계에서 제일 오래된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사회적 이슈도 되고, 노동부도 찾아오고, 영업 정지 처분 내려지고 이러니까 사업주들도 겁이 나서 돈을 조금씩 줬죠. 당시의 병원비. 근데 어차피 산재보험으로 돌려받았어. 최근까지도 연락을 안 한 사업주들도 있고요. 미안하다고 초반에 병원비를 좀 내주던 사장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미안한 감정도 사라지고, 자기들도 억울한 마음도 들고 그러면서 연락도 뜸하게 되고, 민사 소송까지 들어가고 형사재판 받게 되니까 연락 뚝 끊겼죠. 그러다가 형사재판에 합의서가 필요하니까 다시 찾아오는 사장도 있어요. 합의를 하려고 돈을 얼마를 준다 그러고. 근데 금액이 너무 턱없이 작아요. 그러다 지난 10월에 피해자 2명이 더 나타났고 그제서야 부랴부랴 합의를 더 하네 이런 얘기를 했는데, 뒤로는 재산을 빼돌렸죠. 재산을 빼돌리느라 바빴을 거야. 기계가 한 대에 2~3억 정도 한다 그러는데 3개 사업장 기계가 50~70대 가량 있었단 말이야.
김: 그럼 100억이네?
박: 사업주들 두세 명이 동업을 하거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했다고 했는데, 민사소송 들어가서 보니까 모두가 재산이 1원도 없어. 사업주들은 다양한 각도로 자기 살길을 찾았겠죠. 나중에 재판 가서 BK 테크 사장을 만났는데 자기 부모가 장애가 있다고… 누구보다 장애인 가족의 마음, 장애인의 마음을 잘 아는데 자기가 정말 재산이 없어서 그동안 연락을 못했다고. 합의해 달라고… 그러면서 돈도 한 푼 안 주고(웃음). 그 회사가 메탄올 사건 터지고 노동부 점검까지 하고 난 후에 사고가 난 곳이잖아요. 그런데도 연락 없이 지내다가 최근 형사재판 때문에 찾아오고 연락오고 했죠. 그래도 다른 사업주들은 피해자들한테 조금의 위로금이라도 중간 중간에 주곤 했어요.
김: 발주처들은 어때요? 대기업.
박: 일단은 이게 3차 하청이잖아요. 1차 하청한테 연락이 왔어, 처음에 사고가 나고 막 이랬을 때. ‘거기는 영세하고 돈도 없고 그래’ 그러면서 자기한테 애기하라는 거야(웃음). 그래서 우리가 요구안 내는 거 보시라고, 개별적으로 할 얘기 없다고 하고, 우리가 발주처에, 원청에 세 번의 질의서를 보냈잖아. 삼성이랑 LG는 하청의 안전관리를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고 해, 하청 계약 담당자만 있고. 산업안전 쪽 사람은 그냥 원청회사 관리만 할 뿐이지, 하청 기업의 위험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는 거죠. 이번 사건이 발생했을 때 누가 이걸 담당해야 되냐 시끄러웠다고 하더라고. 그건 그들의 사정이고. 처음에 사건 터지자마자, 이게 3차 하청인데 왜 자꾸 원청한테 책임을 돌리냐 이런 댓글이 엄청 많았어요. 대기업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원하청 구조가 빛을 발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특별하게 그들이 눈에 띄게 대응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질의서 답변 내용을 보면 ‘1차 하청까지 우리는 책임진다’ ‘2, 3차 하청은 1차 하청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렇게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메탄올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여기도 메탄올 문제로 접근하는 거죠. 우리는 메탄올이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닌데. 아직 피해자들에게 말 못한 게 있는데, 심장이 두근거려서. 원청 답변서에 물 90%에 식품첨가제가 함유된 메탄올 대체재를 개발했다고 써놨더라고.
김: 대기업들이 이렇게 하는 걸 가능하게 한 요인이 뭘까요?
전: 적어도 자본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정부가 기업 간에 공정거래할 수 있게 관리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이 CNC 업무가 진짜 3차 하청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기록으로 관리되는 시스템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정도의, 기업간 경제활동으로 잡힐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닌 것 같아요. 세계 11위 경제규모를 갖고 있다는 나라에서,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될 때 미처 정리되지 못한, 맨 밑바닥 노동이 지금까지 있는 것 같아요. 전자산업 공급망 측면에서 보면 관리되지도 않고 관리되기 어려운 데서 일어난 일들인데, 노동자 관리도 전혀 안 되고… 전근대적 상황이잖아요.
김: 어렸을 때, 그런 거 안 했어요? 라디오 부품 이런 걸 집에서 막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공장에서 동네에 이걸 쫙 뿌려 가지고 그걸 집에서 손으로 조립해서… 푸댓자루로 가져다가 이렇게 했는데…. 이게 지금 기계가 2억이잖아요. 기계가 비싸서 가내 공업을 못할 뿐이지 기계가 만약 한 10만원이었으면 집에 나눠주고 옛날에 했을 그런 방식의 연장선상이 아닌가..
박: 지금도 공단지역에 많아. 푸댓자루 왔다갔다 해.
김: 그러니까 기계가 비싸서, 2억이라서 그렇게 못하는 거야, 그렇게 하고 싶은데 너무. 나눠주고 세척해 와라 이렇게 하고 싶지 않을까.
전: 이렇게 생산하는 방식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졌을 리가 없잖아요. 갑자기 재벌 그룹이 발명해낸 게 아니라 바닥부터 있던 걸 얘네는 어쨌든 이용한 거죠. 예전에 반월공단 이런 데 다녀보면 안전공단 지원금 받아서 공장에 보건관리 한다고, 공장마다 다니면서 사장들 혈압 재주고 커피마시고 나오고 그러거든요. 노동부가 그렇게 해왔는데, 이런 메탄올 같은 일이 터진 거죠.
전문가의 책임윤리란 무엇인가?
김: 전문가 문제는 두 가지로 지적했던 것 같아요. 하나는, 노동 분야가 취약했기 때문에 전문가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이건 전문가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두 번째는 실제로 전문가들의 대응이나 프레임이 잘못된 것. 사건 대응 과정에서 전문가, 학회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죠.
박: 사실 그들이 뭘 했는지 잘 몰라. 노동부랑 그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뭘 잘 했다, 잘못했다 말할 수 있는 게 잘 없고.
김: 근데 전문 학회들도 노건연을 통해서 이 사건을 인지하고 여러 활동을 한 거잖아요? 근데 그것에 대한 피드백은?
박: 전혀 없었죠. 학회들은 초반에는 좀 떠들썩하더니 그 후에는 잘 모르겠어요.
전: 지난 30년 동안 한국사회에 개입하려고 했던 전문가들이, 이번 메탄올 사건을 보면서 어떤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얼마만큼의 반성적 성찰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87년 이후에 현실을 바꾸자고 사회 각계로 나갔던 지식인, 전문가 영역 중에서 사실 현장과 접점이 있는 학문이란 게 몇 개 없잖아요. 고용구조나 노동시장 문제, 비정규직의 문제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것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불평등, 차별을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이 이쪽이고 이런 접점을 가진 현장이 별로 많지가 않아요. 전문가들이 이렇게 현실을 알 만한 영역이 별로 없잖아요. 최저 임금 가지고 경제학자가 무슨 실천적 활동을 하겠어. 근데 이 영역은 지식인들이 현장으로부터 자기 성과를 빨아가고, 정부한테서 연구과제 따가고, 자기가 연구자로서 성장하고… 정부 관료로 가있는 이들도 많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현실을 착취만 할 뿐이지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해서 참 마음 편하게들 있구나.
김: 다 같이 반성하러 갈까?
전: 책임감을 가진 전문가들은 없고, 현실을 착취하면서 자리를 잡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성이 없는 것 같아요. 견제, 비판의 목소리도 없고. 제가 특조위에서 가장 열 받았던 순간 중 하나가 위원장한테 자문위원 임명장 받은 교수가 있어요. 그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엄청난 책임감을 느낀다, 다시 한 번 잘해보겠다’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저 교수가 정말 책임감을 느끼면 세월호특조위 자문위원장을 또 하고 싶을까’
박: 너무 냉소적이야.
전: 안전이 개인 책임이다, 노동자 부주의론을 만들어왔던 사람들이 다시 자리를 차지하고, 그런 사람이 특조위 오는 걸 왜 못 막는지 생각해 봐야죠.
“홈페이지 보고 하세요”
김: 산재보험 이야기 좀 해 볼게요. 사실 이번에는 산재 승인이 되게 빨리 되었잖아요. 신청부터 재활 단계에 이르기까지 박혜영 활동가가 가장 가까이서 다 봤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시죠.
박: 산재 신청하고 일주일도 안 돼서 승인 나오는 것 보고 황당했죠. 내가 지금 반올림 백혈병 사건 3년째 하고 있었잖아, 산재 신청만. 이 사건에 관련된 공단지사가 3개였는데 어디는 이걸 사고로 보고 어디는 질병으로 보고. 질병으로 분류하면 판정위원회를 열어야 되는 건데, 바로 승인이 나는 걸 보면서 이건 완전 운빨 아니냐, 당사자한테는 다행이었지만,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이 이렇게 자의적이구나 불쾌했어요. 그리고 10월에 만난 피해자들의 첫 질문은 자기가 산재보험을 신청할 수 있느냐는 거였어.
김: 나도 해도 되느냐?
박: 초창기에 만났던 피해자들도 자기들이 산재보험 신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못 믿었어요. 파견 제조업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산재보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또 스스로 4대 보험 가입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4대 보험을 자기가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월급 좀 더 받으려고 산재보험을 안 들겠다 말했는데 이렇게 하면 죄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하는 거에요. 설명을 해도 굉장히 주눅이 들고 의구심을 가졌어, 자기가 산재보험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에. 서류를 준비하면서 보니까 와, 이건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구나, 신청이라는 장벽이 처음부터 작동하는구나. 정부는 신청서를 낸 것에 한에서만 주는 거지, 무엇이 더 필요할까, 당사자가 어떻게 해야 된다, 이런 설명은 일절 없고.
김: 신청서 낸 건 해주지만 추가적 정보를 더 주고, 이런 게 없었다는 얘기죠?
박: 전혀 없었고… OO씨 경우에는 자살 시도를 했는데 정신과 질환 추가 상병 신청을 해야 하잖아요? 신청을 했더니 근로복지공단에서 그냥 질병판정위원회를 연 거야. 자살시도를 했던 피해자를 불러다놓고 네가 정말 힘들었느냐를 캐물은 거지. 그래서 엄청난 모욕을 당하고 울다가 나온 거죠. 내가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게 비정상적인거냐, 죄를 짓고 있는 거냐,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김: 인정 받았지요?
박: 인정은 받았어. 그것도 역시 근로복지공단이 뭔가 여러 가지 고려를 했겠죠.
김: 정신과질환 인정받기 되게 힘들잖아요.
박: 나는 사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그래도 정신과입원까지 했고 이런 게 소식이 들어가면 근로복지공단에서 전화는 한 통 하지 않을까, 어떤 치료를 더 받는 게 좋지 않을까 조언해줄 관심 정도는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이게 혼자 찾아간 사건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많이 관심이 있었던 사건이니까. 피해자들이 계속 정신적 문제를 겪으니까 이 문제를 제도 안에서 풀어보자 싶어서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를 열어놓고 어떤 사업을 하는지 쭉 관찰한 다음에 어디 전화를 하면 되겠다 싶어서 전화를 여러 군데 돌렸어요. 근데《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되었어요(웃음). 두 시간 전화 연결, 어디로 돌렸다가 어디로 돌렸다가 결국엔 마지막으로 다시 지사로 갔는데 지사에서는 우리는 ‘그런 것’까지 다 못한다, 이런 대답을 받았고.
김: ‘그런 것’의 그런 건 뭐죠?
박: 예를 들면 ㅁㅁ씨 경우에는 근로복지공단 병원에 있으니까 병원에서 정신치료를 한다거나 재활이랑 연결시키는 게 있어요. 그냥 일반병원에 있거나, 입원해도 치료할 게 없어서 집에서 있는데, 이 사람들이 정신과 상담이나 치료를 받고 싶을 때 어디에 찾아갈 수 있는가, 그게 궁금했던 거죠. 뒤져보니까 찾아갈 데가 없더라구요.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에는 제도가 있다고 하는데, 현실에서 찾을 수는 없어. 나는 그나마 전문성이 있는 사람인데도 못 찾아냈고. 또 하나는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요양이 끝나고 장애로 넘어가는데, ‘요양 끝나면 장애급여 신청하세요’란 안내도 아무도 안 해줬어. 당사자들이 아무런 안내도 못 받는다면 장애 등급을 신청하는 건 불가능하더라구. 그래서 우리가 카톡방에서 요양기간 언제 끝나는지 서로 확인을 하고 먼저 끝나는 사람들부터 일단 장애 등급을 신청했는데 우여곡절이 많았죠. 병원을 계속 왔다갔다 해야 되는데, 맞물린 게 동사무소 장애등급이었어요. 동사무소 장애등급 받는 것도 또 신청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근로복지공단에서도 아무도 안 알려줬고. 피해자들이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으니까 동행할 사람을 제도적으로 확보하려면 동사무소 장애등급을 신청해야 되는데, 돌고 돌아 얽혀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 각자가 병원 원무과 돌아다니면서 해야 됐죠. 피해자 가족들은 다들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스케줄 맞추기도 힘들고, 내가 같이 가거나 친구가 같이 가서 장애등급 신청을 양쪽에 하게 되고.
김: 근로복지공단이랑 동사무소랑 서로 연락을 안 하나 봐요
박: 그게 화가 나… △△씨는 혼자 고군분투해야 되는데, 동사무소에 가서 “장애등급 신청하러 왔어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하니까 “홈페이지 보고 하세요” 이랬대(웃음). “저 시각장애인인데요” 그제서야 얼굴 쳐다보고 책을 하나 줬다는 거야.
김: 책? 점자책?
박: 아니.
김: 그냥 책?
박: 응(웃음).
김: 아니 홈페이지 보는 거랑 뭐가 달라?
박: 장애인 복지관도 궁금하고,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물어봤지만 동사무소에서 제대로 아는 게 없어. CC씨한테 그 얘기를 듣고 화가 나서 같이 시청을 가자, 해서 인천 시청을 둘이 같이 갔어. 장애인 복지과를 찾아갔더니 “동사무소를 가셔야죠. 여기는 그런 것 안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지. 그래서 동사무소에서 이런 대우를 받고 왔다, 그랬더니 ‘원래 우리가 이런 거 안 해주는데’라며 또 책자를 줘.
김: 그 놈의 책(웃음)
박: 그 다음에 “동사무소 공무원 이름을 아느냐” 이렇게 물어봐. 그래서 계속 우리를 담당할 사람인데 고민에 빠졌지, 어쨌든 말을 했어. 왜 이렇게 연결을 안 해주느냐 했더니, 거기는 노동부 관할이고 여기는 복지부 관할이라 안 한다, 우리는 노동부가 당연히 해주는 줄 알았다, 이런 대답을 인천 시청 공무원이 했지. 그리고 나서 돌아 나오는데 동사무소에서 전화가 온 거야. “불편한 점 있으십니까?” (웃음) 지금 산재보험 장애등급을 신청하고, 지자체 신청을 동시에 했잖아. 두 개 다 연금이 나오는데 그 연금을 두 개 다 받는 게 아니라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해야 돼. 그런 걸 아무도 안 알려줘. 결론적으로 어떤 제도에 대해서도 한 번도 미리 들은 적이 없다, 연결고리도 없다.
김: 의료비 등 문제나 휴업급여는 어때? 산재보험도 비급여가 있지 않아요?
박: 네. 그건 개인이 내야 돼.
김: 부담이 얼마나 되는 것 같아요?
박: 일단 피해자들이 다 장애등급이 달라요. 병원에 있거나 완전 새카맣게 안 보이시는 분들은 간병급여가 같이 나오는데, 간병급여도 신청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한동안 헤맸어. 급수가 다르고 액수가 차이가 나서. 비급여 치료를 받게 되잖아. 그 부분은 개인 부담으로 남아 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치료가 많지가 않아요. 시신경은 손상됐고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시신경 손상 이외의 뇌 손상 같은 경우에는 재활을 받아야 되는데 그래서 병원에 있는 분들 중심으로 비급여가 생기고 있죠.
김: 휴업급여는 잘 나오고 있어요?
박: 사람마다 다르고 마음이 아픈데, 회사가 미안하다고 일당을 많이 써준 데가 있고 그냥 있는 대로 써준 데가 있어서 휴업급여도 차이가 나요. OO씨는 앞이 안 보여 일을 못하는 건 같은데 조금 희미하게 보인다고 급수가 차이가 나서 연금을 못 받게 되고. 돈이 조금 나오고. 울분이 쌓이는 거야.
근로복지공단 어쩌지
김: 이 문제 해결하려면 산재보험제도 어떻게 해야 해요?
박: 진짜 그 생각 많이 들더라고. 근로복지공단 얘넨 대체 왜 있는 거야?
전: 지금 시스템으로는 안 되는데, 사회보험청이나 이런 게 있기 전에는 안 될 것 같아.
김: 왜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전: 근로복지공단은 기본적으로 자기네가 사업주 책임보험을 대행해준다고 생각하지 사회보험으로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공단이 왜 1주일 만에 산재승인을 해줬느냐, 이건 당연히 공단 판단이 아니라 노동부 판단으로 했을텐데, 산재나 이게 얼마든지 정치적 쟁점이 된다는 걸 알고 대처한다는 방증이잖아요. 쟁점으로 만들기 전에 힘 빼버리는 거지. 역으로 근로복지공단이 사회적 발언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언가를 해줄 하등의 유인책이 없는. 해줄 이유가 없잖아요.
김: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전: 지금의 고용구조 하에서 산재보험 시스템으로 커버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근로복지공단 자체 개혁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이고. 노동정책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사회복지 영역에서 이걸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김: 구체적으로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의 통합, 이런 것을 생각하는 건가요?
박: 나는 그게 너무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ㅁㅁ씨나 △△씨가 눈이 안 보이는데, 또 어떻게든 일을 해야 되는 사람들이니까 일자리를 구했어. 그러다가 나중에 또 아팠네? 그럼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 노동이 너무 파편화되서 지금 근로복지공단에서 이걸 감당하는 건 말도 안 되고 할 수도 없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
김: 일정한 정도의 보장성 확대, 이런 개혁이 이슈가 아니라 아예…
박: 아휴 보장성 확대는, 득 보는 사람이 어느 정도 될까? 산재보험 신청을 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 정도가 되겠죠. 공원에서 OX 퀴즈를 깔아 놓고 ‘내가 잘못하면 산재신청 못 한다’에 전부 다 O를 체크했거든,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다.
김: 내 친구 부모님, 산재 신청 포기했잖아. 가장 큰 이유가, 회사가 산재보험을 주는 줄 알고 계시더라고. 얘는 연구소에 있었으니까 지도교수가 사실은 사업주였단 말이야. 어떻게지도교수님한테 그러냐. 그게 아니라 나라에서 주는 거라고 설명했는데 그게 이해가 안 되시는 거야.
박: 너무 존재감이 없어, 산재보험이.
전: 경제활동인구를 2천만이라고 쳤을 때, 정규직 1/3, 비정규직 1/3, 자영업자 1/3 이렇게 놓고 보면, 산재보험이 거의 70%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 놓치고 있는 거에요. 새 판을 짜지 않으면 사실 개혁은 어렵다는 거죠. 그런데 양 노총이 이렇게 요구할 가망이 별로 없고, 피해 당사자들은 그 정도의 목소리를 낼 여력이 없고… 그래서 이건 위로부터 개혁해야 될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박: 댓글들 보니까 대기업 정규직들은 무상 의료 수준이라서… 그래서 완전 그냥 모르는 것 같아, 보상도 어렵고 치료도 어려운 세상을.
정부가 나서서 조직없는 노동자들 보호하라
김: 조금 근본적인 얘기. 위험의 생산 이야기를 해봅시다. 원청, 발주처에 대해서 윤리 경영, 사회적 책임 경영 이런 것을 가지고 가는 전략이 적절한 건지, 그들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요?
박: 이번에 UN에서 영신 씨 발표하는 날 아침, 거기 세션 의장한테 삼성이 장문의 메일을 보내왔는데 자기들이 어떻게 개선을 했는지 그런 내용들이었대요. 그런 걸 보면 사회적 압력이 분명히 존재하는 건 맞는데, 딱 거기까지 아닌가 싶어요.
전: 현대 중공업 하청 노동자 사망 문제 가지고 선주사한테 압박을 가하는 활동을 했는데, 그 후에 현대중공업 사측이 달라진 게 없어요. 지불 여력이 되는 기업, 평판이 중요한 기업들한테만 극소수 노동자들이 보상 싸움 하는 게 현실이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건 사실이고요. 책임투자 이런 이야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투자자의 선의에 기대서는 사회가 바뀌지 않잖아요. 이런 활동이 나름 의미는 있지만 보완적이거나 부수적으로 활용되어야 하는데… 노자 간에 힘의 균형이 안 맞고 계속 지기만 하니까 조금 곁눈질을 해보는 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서 자본이 바뀌지는 않죠. 현대중공업 보면 노자간의 대립 구도조차 형성이 안 될 만큼 압도적으로 노동의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자본의 선의에 기대서 해결할 수 있다면 사실 자본주의가 아니게 되는 거죠.
김: 원포인트 해결 고리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전: 지금 노동이 매번 깨지는 상황에서, 결국 정부의 개입밖에 기댈 데가 없다고 생각해요. 가장 많은 자원과 인력을 가지고 있는 거대조직이 정부인데, 그 정부에서 대다수 국민의 이해를 보호하는 방식의 경제개혁, 이런 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희망이 없을 것 같은데…
김: 사업장 근로감독 이런 게 아니라, 구조 자체의 개혁 없이는 해결이 안 된다는?
전: 구조 개혁 자체가, 지금은 적어도 위로부터의 개혁밖에 안 보이고.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의 힘으로는 최소한의 공정한 자본주의조차도 한국사회에서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김: 성군을 만나야 되는 거야 우리?
전: 그런 것 같아. 되게 비관적이지. 어쨌든 지금 정부가 자원과 인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걸 잘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 그것도 애매한 지점에 있는 것 같아. 그 활용이라는 게 현실에선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느냐면 ‘나 누구 국장 안다’ ‘나 누구 비서관이랑 친하다’ ‘그 사람한테 얘기해서 어떻게 하겠다’ 이런 건데, 이게 세력으로서 푸시해서 하게 하는 게 아닌 거잖아요. 그러니까 위로부터의 개혁도 말이 좋아 위로부터의 개혁이지. 아는 사람 통한 읍소. 상소문 쓰는 거랑 비슷한 거 같아요.
여전히 집단적 운동이 중요하다
전: 이번에 메탄올 보니까 노동부는 노동운동에서 집단적으로 대응할까봐 걱정했는데, 노동계는 집단적 대응의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너도나도 전문가가 되어서 달려들었던 것 같아. 집단의 힘으로 투쟁하고 이런 건 없어졌는데, 동시에 하층, 육체노동자들을 스토리텔링으로 소비하는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 같아요. 가령 뭐 하청 노동자, 알바, 편의점… 인터넷 설치 기사가 살해당하고 편의점 알바노동자가 살해당하고… 사회적으로, 집단의 힘으로 푸는 게 불가능해지니까 스토리로 소비하거나 감성으로 소구하는 방식? 어떤 연대의 정신이 남아있는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조직의 힘이나 집단의 힘으로 풀려고 하는 시도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 같아요.
박: 구의역 사건 같은 건 좀 다르잖아요.
전: 구의역 사건도 그렇지만, 알바 노조에서 시급 만원 제안했던 게 몇 년 후 대선 공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기존 조직노조가 아닌 곳에서 시작된 이슈를 나중에 조직노동이 받은 건데, 그런 거 보면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 구의역 사건은 집단의 힘으로 조직되었다기보다 스토리텔링의 힘이 컸다고 생각해요. 열아홉 살에 사발면… 빈곤 청년의 스토리텔링이죠. 그 후에도 지하철이나 철도에서 사고가 계속 나더라고요. 그러니까 구조를 바꾸는 건 확실히 집단의 힘이 있어야, 집단의 힘이 없으면 안 바뀌는 거죠.
박: 구의역 겪으면서 처음에는 스토리텔링이었지만 사회적 문제로 만드는 힘은 여전히 대중에게 있구나 생각했어요. 조직 노동이 뭔지도 헷갈려요. 노동조합으로 조직돼야만 조직된 힘인가? 사람들이 기존과 다르게 조직되어 움직이면 그게 조직된 힘인가? 구의역에서 사고가 나고, 옆의 노조 활동가에게 스크린도어 사건 세 번째라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될까 했더니, “그러게요. 우리 기관사들 힘들겠어요” 이래요. 사고 나면 기관사들 힘든 건 맞지만. 사람들이 구의역 오고 추모하고 포스트잇 붙이기 시작하니까 조직노동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지. 그래서 뭐가 뭐를 견인하는가, 어떤 게 사회적 힘인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들었어요.
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돼?
전: 우리는 불안정 노동자 이슈로 하는 노동단체로 활동한 지 꽤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비는 영역도 있지만. 이제 불평등 문제에 조금 더 집중해서 새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 메탄올 사건 이후에 들어온 회원들을 보면, 정말 이것만은 막았으면 좋겠는데 이런 거 하는 데가 여기밖에 없더라 하면서 조용히 가입한 사람들이 있어. 이런 사람들이랑 같이 현실을 발굴하는…
김: 새로운 세대의 회원들이란 말인 거죠?
박: 연령대는 다양한데 그런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호객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오는 걸 보면 그런 사람들을 더 만나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전: 이제는 진짜 하나 정도는 바꿔야 되지 않을까. 목소리 없는 노동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좀 편해지는 거 하나를 꼭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마음이 되게 급한데, 5년 동안 하나 만들고 또 다음 5년에, 지금부터 10년 정도는 실제로 노동자들의 삶이 조금 나아지도록 만들어야 된다. 건강보험이든 산재보험이든, 하나 바꿔 내서 문해 능력이 있건 없건, 제도에 대해서 접근성 자체를 좋게 해주는 것을 하나 정도는 만들어줘야지 성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노동자 민중의 삶을 좀 나아지게 해야 하는 거지.
김: 긍정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려 했는데, 끝내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네요(웃음).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