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의 편지]
이상윤(노동건강연대 대표)
코로나19 유행과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책이 필요하다. 감염병 위기와 경제 위기라는 이 두 가지 위기는 특히 저소득층과 불안정 노동 계층에 피해가 집중되어 사회 불평등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노동운동 진영의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다. 노동자 건강 측면에서 보면, 노동운동 진영에서 제기하는 여러 가지 정책 중 ‘아프면 쉴 수 있는 권리’만은 이번에 어떤 식으로든 제도화해 보장해야 한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일부 공무원과 교사 등을 제외하고는 아플 때 무급이건 유급이건 ‘병가’를 자유롭게 낼 수 있는 이가 드물다. 노동조합이 있어 단체협약으로 ‘병가’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회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체협약을 통해 유급이건 무급이건 병가를 신청할 권리를 가진 노동자도 소수이지만, 이들조차 회사의 눈치를 보느라 실제로 이 권리를 사용하지 못한다. 대부분 아프면 그냥 ‘연차휴가’를 쓴다.
코로나19 유행이 큰 영향을 미치면서 노동자들이 아프면 쉬기 위한 제도로 ‘상병수당’ 얘기가 많이 나왔다. 정부도 2022년 도입을 목표로 이런저런 준비를 하겠다고 한다. 상병수당은 노동자가 병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용인될 때, 노동자가 신청해서 소득 보전을 할 수 있는 제도다. 회사가 이런저런 이유로 노동자가 병가를 내는 걸 싫어하면 상병수당이라는 제도가 있어도 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된다.
상병수당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국가는 대부분 ‘대기 기간’을 두고 있고, 그 기간 동안의 급여는 사업주나 자영업자의 경우 본인이 책임지게 한다. 대기 기간은 일반적으로 3일에서 14일 정도이다. 다시 말해 상병수당 제도가 생기더라도 임금 노동자의 경우 3일에서 14일 정도의 병가 기간의 급여는 사업주가 책임져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이 기간의 급여 지출 부담을 지기 싫은 사업주는 노동자가 상병수당을 신청하는 것 자체를 막으려 할 것이다.
충분한 인력을 운용하지 않고, 총 노동시간에 의존해 이윤을 뽑아내는 한국 기업의 특성상, ‘질병’을 이유로 노동시간 손실이 발생하는 것 자체를 싫어할 기업주들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형식으로든 노동자에게 아플 때 무급이든 유급이든 휴가를 낼 권리를 보장하고, 노동자가 질병을 이유로 휴가를 냈을 때 해고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병수당이라는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그 제도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물론 자영업자나 사용자의 지휘 감독이 적은 일부 특수고용 노동자 등은 자신이 병가를 낼 때 경제적 소득 감소 외에 다른 고려요인은 상대적으로 적다. 근로기준법상 유급이든 무급이든 병가를 낼 권리가 제도화되지 않더라도 이들은 상병수당을 신청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도 이런 대상에 대한 적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상병수당 제도가 사회적으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임금 노동자 계층, 특히 영세 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 상대적으로 자원이 적은 노동자들이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상병수당’ 제도뿐 아니라 ‘유급병가’ 제도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함께 벌어져야 한다.
유급병가 제도는 감염병 예방 대책일뿐 아니라, 노동자 건강 보장 제도이다. 유급병가를 제공할 경우 미국 전역에서 독감 관련 증상으로 인한 결근을 줄여 매년 6억 3천 달러에서 18억 8천 달러 가량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을 것으로 계량화한 연구도 있을 정도로 유급병가 제도의 감염병 예방 효과는 이미 증명되었다. 유급병가가 있으면 아파도 억지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을 줄여 산업재해도 줄일 수 있고 산재 사망도 줄일 수 있다. 노동자들이 유급병가를 이용해 질병 초기에 병의원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 더 큰 질병 발생을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도 큰 이득이다.
유급병가를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그만큼 덜 일하면서 그 시간에 자신과 가족의 질병 예방 행위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유급병가 제도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국민건강 향상을 꾀할 수 있는 주요한 정책 수단이다. 유급병가가 없는 노동자는 있는 노동자에 견줘 자신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포기할 가능성이 3.0배, 가족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포기할 가능성이 1.6배 더 높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저소득층 노동자일수록 자신과 가족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지연하고 포기할 위험이 가장 컸다는 연구 결과를 볼 때 이는 건강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은 무슨 이유로건 노동자가 쓸 수 있는 휴가의 날짜가 너무 적다. 노동자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쓸 수 있는 휴가 시간을 늘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코로나19 유행은 다행히도 이런 논의 공간을 확장했다. 노동자들은 이 기회를 활용해 아프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유급으로 쉴 권리를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제도적으로 보자면 상병수당과 더불어 근로기준법상 유급병가 제도 도입을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