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전수경의 MZ 여성 그리고 빈곤]
엄마 병환으로 돌아간 고향, 서울 한식당 주방에서보다 더 아팠다
과거부터 사회학적으로 ‘세대론’은 자주 사용된다. 최근에는 MZ세대가 대표적이다. 1980~1994년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5년 이후에 태어난 ‘Z세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전 세대와 달리 조직과 자신을 분리하고 ‘워라밸’을 지키는 세대로 규정된다. 그런 의문도 든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걸까. 더 정확히는 자신의 근무조건에 적극 문제제기를 하고, 보장된 휴식시간을 반드시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 같은 세대 내에도 부모의 능력과 교육, 성별, 태어난 지역 등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고 이는 불평등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어떤 동질성’이 같은 세대라고 치부하며 그들을 MZ로 묶어버린다. 이것이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자칫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은폐 내지는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은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만난 10명의 도시 속 여성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MZ세대이나 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MZ세대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도시 속 2030 여성들이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편집자 |
티를 만나기 위해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남쪽 지방의 역에 내려 다시 시외로 나가는 택시를 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던 티가 20대 후반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어머니가 아파서였다. 티를 만나서 듣게 될 이야기가 서울 살이의 고됨일지 어머니 돌봄이라는, 다른 생활 세계의 고행일지 알 수 없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티는 고등학교 때부터 식당 서빙, 마트 계산원 같은 일을 하면서 저금을 해두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대학 조리학과에 들어갔다. 요리사가 되는 꿈을 이루려면 서울에서 배우고 서울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바로 모은 돈은 기숙사비에 보탰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시스템이 갖추어진 곳에서 한 단계씩 올라가며 성취하는 꿈. 곧게 뻗은 직선까지는 아니어도 배우는 만큼 성장하는 직업인. 티가 생각하는 요리사 되는 법은 이렇게 표준안에 가까웠다. 호텔 뷔페 한식코너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티가 직업의 역사를 말하기 시작할 때 괜찮은 출발로 생각되었다. 주방의 막내에게 부여될 허드렛일을 꿋꿋이 해내다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고 무엇보다 호텔이라니 길게 보고 버티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티는 호텔에서의 일이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월급이 적었지만 식재료는 전처리되어 들어오고 오전조 오후조 두 개의 팀으로 나뉘어 하루 8시간씩 일했다. 같이 일하는 이들도 막내인 티를 아껴주며 조직생활도 평탄했다고 한다. 코로나19 전에는 점심시간 직장인들을 상대로 뷔페를 운영하며 수수부꾸미 같은 요리를 ‘라이브’로 진행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왔다. 큰 호텔이 아니어서 투숙객이 줄고 경영이 어려워졌다. 티가 식당을 옮긴 것은 한식 주방 사람들이 흩어지기 전이긴 했다. 티는 하루 8시간 노동이 너무 적게 생각되었다. 조금 더 바쁜 곳에서, 정통 한정식을 배우고 싶었다. 나중에 들으니 호텔 한식코너는 영업을 접은 후 다시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티의 두 번째 직장은 고급 한정식 식당이었다. 상견례를 위해 예약하는 손님들, 인근 공연장에서 공연을 보고 식사를 하는 손님들로 분주했다. 호텔 뷔페처럼 재료가 손질되어 오지도 않았다. 오후에 2시간 브레이크타임에도 예약 상황에 따라서 쉬지 않고 재료손질을 했다. 퇴근하기 전 2시간은 조리도구를 닦았다. 한정식 식당에서 밥, 국, 탕부터 디저트까지 체계적으로 배운 것은 좋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티는 늘 ‘너무 한가하게 요리를 배우는 건 아닐까’ ‘건강할 때 빨리 배워야 하는데’ 같은 초조감이 있었다고 한다. 티의 표현으로는 ‘배움에 대한 열망’은 컸지만 채워지지 않았다. 한정식 식당의 동료들이 줄줄이 식당을 그만둘 때 티도 식당을 나왔다. 세 번째로 간 곳은 ‘맛집’으로 소문난 대형식당이었다. 심야영업까지 하면서 어마어마한 매출을 올리는 곳이었지만 주방에서 도 식당 경영에서도 배울 점이 없었다. 티를 뽑을 때 사장은 신변잡기만 궁금해 할 뿐 요리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뽑은 모양이었다. 직원 교육이나 관리에 신경쓰지 않는 식당이었다. 대형식당에서 일하던 막바지에 티는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식당의 주방에서 어떤 노동을 하는지, 어떤 관계 속에서 일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요리사라는 직업이 쉬운 직업이라거나 위계 없는 분위기에서 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종교생활이 큰 의지가 되었다. 기도를 했다. 그냥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작은 일이라도 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에게 교훈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객관적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에너지를 덜 쓰는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호텔 한식코너에서 일할 때 일이 평이했다고 티는 말했는데 쉬는 날엔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 쉬는 날엔 병원에 가서 영양제를 맞았다. 영양제를 맞지 않는 날엔 산엘 올랐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체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엄마의 병환 때문에 다시 돌아간 고향에는 오빠와 남동생이 있었다. 오빠도 남동생도 성인으로서 자기 스스로를 보살피고 아픈 엄마를 돌보기 어려워했다. 이들 모두에 티는 책임감을 느꼈다. 일할 곳을 찾고 가족을 돌보았다. 전국의 읍내마다 시내마다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고향에도 있었다. 직원을 구한다는 말에 면접을 보러가서 그날로 일을 시작했다. 밥과 밑반찬을 해서 끼니마다 세 식구가 먹게 하고 알바로 버는 돈은 생활비에 보탰다. 능숙하게 가족 돌봄을 시작한 것에 비해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의 일은 서울의 식당에서보다 쉽지 않았다. 지역에서 매출이 손꼽히게 높은 매장답게 하루 종일 손님이 줄을 섰다. 고령의 손님들이 많아서인지 주방에서만 일해보아서인지 응대가 쉽지 않았다. 빵을 포장하고 계산하는 일인데 무어가 어려울까 싶었는데 약간만 소통이 안 되어도 큰 소리가 났다.
손님 응대 매뉴얼이 안 통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이 매장 알바가 힘들기로 소문난 곳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두고 싶어도 점주의 부탁에 번번이 알바기간을 연장했다. 알바를 시작하면서 손목도 허리도 아프기 시작하고 매너가 거친 손님들을 대하고 나면 정신적으로도 고갈되는 느낌이 왔다. 집에서 돌보는 식구들과도 마찰이 있고 골치 아픈 일들이 많았지만 손님들이 더 무서웠다. 고향에 돌아와서 처음 구한 알바에서 병이 났다. 카페에서 베이커리를 배우면서 서빙하는 알바로 옮기고 난 후 평온을 찾았다.
주방청소가 고되었던 곳, 직원들이 서비스직으로서의 소양이 없는 곳에서 일한 경험을 회상하며 티는 기분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평정을 유지하고 책임감 있게 일하는 것, 장점이고 재능이다. 버티면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발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직장을 옮겨 다녔지만 커리어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엄마의 병환이 아니더라도 서울의 하숙집, 월세살이를 지속할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가끔 서울이 그립다. 서울의 한식당 주방에서보다 고향 제과점에서 더 아팠다. 멀리서 보았을 때 단단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있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가 그를 들여다볼 때 멀리서 본 모습과 다르지 않게 고요한지 내면에서 폭풍우가 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서울이 그리우면 뉴스를 본다. 그러고 보니 TV뉴스는 서울의 풍경, 서울 사람들의 생활을 날마다 매 시간마다 보여준다.
* 이 연재는 2023년 ‘노동건강연대’와 ‘아름다운재단’이 함께 한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에서 만난 여성들, 노동건강연대가 활동하면서 만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