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급한’ 노숙인 죽음으로 내몰려
△ 지난 7일 오후 서울시 중구 서소문 서울시청 별관에서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 및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 회원들이 노숙인 의료보호비 삭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서울시 돌연 입원·수술비 지원 중단
“구호비 이미 과다지출” 공공병원 통보
수술날짜 잡고도 발길 되돌려 신음만
“예산 매년 삭감…복지불감증 드러내”
“이젠 다 끝났어. 병원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
8일 밤 10시 서울 중구 남대문5가 622번지 쪽방촌. 한 평도 채 안되는 쪽방 안에서 노숙인 이과연(62)씨가 밤늦도록 잠을 못 이루며 연신 밭은 기침을 해댔다. 이씨는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무료급식을 타러 갔다가 진료봉사 나온 의사한테서 ‘활동성 결핵’이 의심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곧바로 서울 서대문시립병원을 찾아 정밀검진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상태가 심하니 당장 입원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씨는 그냥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서울시가 지난달 26일 ‘노숙인 의료구호비로 통원치료비만 지원하고 입원·수술비는 제외한다’는 공문을 각 공공병원에 내려보냈기 때문이다. 올해 예산으로 잡힌 노숙인 의료구호비가 이미 과다 지출됐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 쪽에서 마련해준 쪽방에서 하루하루 병을 ‘키우고’ 있다.
서울 청량리 가나안교회 노숙인 쉼터에서 생활하는 장명환(64)씨는 서울 동부시립병원에서 수술 날짜까지 잡았지만 갑자기 시의 지원이 축소되는 바람에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0년 12월 오토바이 사고로 부러진 다리뼈가 여태 제자리를 잡지 못해 급히 수술을 받아야 할 처지다.
장씨는 병원에서 타온 진통제로 통증을 견디면서, 구청 쪽에서 의료보호 대상자로 지정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부양할 자식이 있으면 의료보호 대상자로 지정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은 터라, 연락이 끊긴 지 오래인 아들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속을 태우고 있다.
△ 지난 7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한 나이든 노숙자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노숙인의 입원·수술비 지원 중단과 관련해, 서울시는 ‘고육책’이라고 설명한다. 신종한 서울시 노숙자대책팀장은 “올해 노숙인 의료구호비 예산이 8억원 정도인데 2002년 이후 누적 적자분이 계속 이월되는 바람에 올 한해 예산이 1분기만에 모두 바닥났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는 “꼭 입원이나 수술을 받아야 한다면 한달 이상 노숙인 쉼터에 거주한 뒤 주민등록 발급 등의 절차를 거쳐 의료보호 대상자로 지정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노숙인 지원단체들은 “상태가 급한 노숙인들이 응급치료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노숙인 의료구호비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2002년 10억4700만원에서 올해 8억원 정도로 줄여오기만 한 보건복지부와 서울시의 ‘복지 불감증’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가나안교회 노숙인 쉼터 김정래 운영실장은 “삶의 의지가 상대적으로 박약한 노숙인들이 제발로 병원을 찾았다면 병세가 상당히 심한 경우가 많다”며 “예산부족을 이유로 거주지도 없고 자활 능력도 없는 이들에 대한 응급수술 등의 공적 지원을 없애는 것은 그들의 생명권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영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한림의대 교수)는 “구제금융사태 이후 현장에서의 노숙인 의료구호 비용은 계속 늘어나는데 거꾸로 예산을 줄여오던 당국이 결국 이런 어처구니없는 조처까지 내놓았다”며 “인간존중의 사회복지 정신을 살려 노숙인 의료구호비 예산 증가 방안을 서둘러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노숙인 의료구호비 예산은 국비 70%와 지방비 30%로 구성돼 있으며, 서울시에 전국 노숙인의 60% 이상이 몰려 있다.
김영인 기자 yiy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