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병’ 파문, 노동부 늑장대응 비난 거세
2003년 산안공단 보고서에서 노말헥산 위험성과 열악한 근무환경 이미 확인
이주노동자들의 하반신 마비 증세로 인해 ‘노말헥산(n-Hexane)’의 신체유해성에 대한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사용하고 있는 사업장에 대해 노동부가 집중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 뒤늦은 전시행정이라는 비판이 높다.
노동부는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LCD, DVD 부품제조 업체인 ㄷ사에서 세척작업을 하던 태국 여성노동자 5명이 노말헥산에 의한 다발성신경장애(일명 앉은뱅이병)로 진단됨에 따라 이 업체를 포함한 전국 노말헥산 취급 사업장인 367개소(종사자 약 2만6천여명)에 대해 근로감독관, 산업안전공단 전문가, 검찰 등으로 합동 단속반을 구성해 17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 3주간에 걸쳐 집중 점검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동계 및 산업안전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노동부가 안전보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대책마련과 함께 지도감독을 철저히 했다면 직업병 발생사태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뒤늦은 행정조치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 경기도 화성 모 공장에서 일하다 하반신이 마비되는 ‘다발성 신경장애'(앉은뱅이병)에 걸린 태국 여성 노동자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가 제공한 사진이다. <연합뉴스>
평균농도 허용치보다 낮지만 조사업체들 과소평가 유발
특히 이미 2003년 12월에 한국산업안전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내놓은 ‘제조업 사업장의 n-Hexane 노출실태와 근로자의 건강평가에 대한 역학조사 보고서’에서는 노말헥산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작업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 조사돼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한 17개 사업장의 노말헥산 평균농도는 15.89±25.39ppm으로 노동부가 제시한 1일 8시간 작업 평균노출허용농도 50ppm보다는 낮게 측정됐지만 이를 취급하는 노동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이 물질을 사용하는 등 안전보건 실태는 매우 열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하루 8시간 노출허용농도 50ppm 이하에서도 노말헥산에 의한 말초신경독성이 발생하는 경우가 외국에서 보고되고 있다”고 경고하며 “조사 당시 업체들이 조사기간 동안 노말헥산을 사용하는 제품의 생산을 줄여 노출을 임의적으로 억제하거나 노말헥산을 사용하더라도 작업강도를 변화시켜 적은 량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노출농도의 과소평가를 유도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조사의 한계가 있음을 실토하기도 했다.
환기시설, 보호구 착용 등 안전설비 열악
또 이 보고서에 따르면 노말헥산 노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환기시설은 플라스틱사출성형제조업, 전자부품제조업, 분말야금제품제조업, 기계금속제품제조업, 도망 및 인쇄업, 접착테이프제조업 등 이 물질을 취급하는 모든 업종에서 벽면에 설치한 팬과 천장의 자연환기시설에 의존하는 등 부적절하거나 열악한 것으로 지적했다. 개인보호구 착용 역시 분말야금제품제조업을 제외한 다른 모든 업종에서 착용을 하고 있지 않거나 면장갑 등 부적절한 보호장비를 지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
특히 보고서는 개인 보호구 불착용 이유에 대해 노동자들은 ‘사용주가 지급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반면 사용주들은 ‘지급했지만 착용하지 않고 있다’는 상반된 대답을 내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관리자 및 취급자에 대한 유해성 교육 △개인 보호구 착용 지급 및 습관화 △초음파세척기 사용 등 노말헥산의 사용억제 △유기용제 저장용기 관리 △국소배기시설의 최적화 등 노동자의 건강보호를 우선하는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노총은 성명을 내 “산업안전정책이 실제 노동현장에서는 형식적이고 불법적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노동부는 구호성 정책만 남발하지 말고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보호 의무를 방치한 사업장에 대해 철저하고 정확한 조사를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부 조사 착수, 태국 돌아간 3명도 재입국 할 듯
한편 이번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수원지방노동사무소는 노말헥산 중독으로 다발성 신경장애에 걸린 태국 여성노동자 8명 모두가 특수건강검진을 받지 않은 등 위법사실을 확인하고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노동사무소 관계자는 “업체의 과실이 밝혀진다면 검찰의 지휘를 받아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화성 ㄷ회사에서 근무하다 다발성 신경장애에 걸린 뒤 귀국한 태국인 여성노동자 3명에 대한 재입국도 추진되고 있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는 이를 위해 소장인 박천응 목사와 자원봉사자들을 지난 15일 태국으로 출국시켰으며 치료를 받지 못하고 지난달 11일 태국으로 돌아간 씨리난(37), 러짜나(30), 살라피(25)씨 등 3명을 재입국시켜 산재의료원인 안산중앙병원에 입원, 치료받도록 할 예정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태국으로 돌아간 3명의 근로자가 재입국하면 정확한 건강검진을 실시, 질병이 확인될 경우는 국내에서 입원치료를 받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미 2003년에 이주노동자 산재심각성 경고
노말헥산 중독 검사 특수건강검진 실시 사업장 ‘불과 27%’
노말헥산 파문으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의 근무환경 및 안전보건 실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안전보건 위협의 심각성을 경고했던 보고서가 2003년에 이미 작성돼 있던 것으로 밝혀져 눈길을 끌고 있다.
한국산업안전공단이 2002년 12월부터 1년 동안 고려대학교와 공동으로 경기도 안산, 시화 및 반월공단에서 이주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195개 제조업 사업장을 대상으로 조사해 2003년 12월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에 문제가 된 노말헥산에 의한 중독성을 검진해 낼 수 있는 특수건강검진을 실시한 곳은 불과 27%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특수검진은커녕 일반건강검진조차 하지 않은 곳도 54%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유기화학 물질 등 중독성이 있는 물질을 다루는 사업장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1년에 2번씩 특수건강검진을 실시하게 돼 있지만 이 같은 법망이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
84.4%의 이주노동자들은 ‘산업안전보건법’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정기안전보건교육을 실시하는 사업장도 57.4%에 불과했다. 특히 연수교육시에도 산업안전보건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가 47.2%나 됐으며 본국에서도 이 같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62.4%에 달했다. 교육을 받았더라도 21.8%가 ‘별로 혹은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답했으며 40.0% ‘보통’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작업환경이 매우 열악함에도 ‘작업장 안전건강 정보’에 대해 ‘필요하지 않다’가 46.8%로 ‘필요하다’ 10.0%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산업안전에 대한 인식도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71.6%가 산재보험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결과에 따라 조사팀은 △이주노동자를 위한 안전보건 관리시스템 개선 △이주노동자에 대한 산업안전보건상 차별대우 금지 △고용사업장 시설개선 △기존 산업보건체계 및 기관과 연계한 이주노동자 건강보호 제도 시행기반 마련 △이주노동자 및 고용업체 사업주 교육 강화 등의 정책제언을 내놓기도 했다.
김봉석 기자 seok@labortoday.co.kr
2005-01-16 오후 4:42:37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