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권 노동자들, 발암물질 최고 300배 노출
여수산단 노동자들이 선진국과 비교해 100배 이상의 고농도 발암물질에 노출돼 온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던지고 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최상준 박사가 1년간 여수산단을 중심으로 유해물질 노출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발암물질인 벤젠·1,3-부타디엔·비닐클로라이드 모노머 등에 ‘단시간 고농도’로 노출되고 있으며, 이는 외국의 단시간 노출기준에 비해 최고 300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1000개 이상의 시료를 측정하여 분석한 결과, 벤젠은 최고 741 ppm으로 미국 노동부 기준인 5 ppm의 150배이며 미국정부산업위생전문가협의회 기준인 2.5 ppm에 비해서는 300배에 이른다.
1,3-부타디엔은 최고 82 ppm으로 미국 노동부 기준의 16배였으며, 비닐클로라이드 모노머는 최고 654 ppm으로 미국 노동부기준치 5 ppm의 130배 이상이었다.
벤젠과 1,3-부타디엔은 백혈병과 림프종 등을, 비닐클로라이드 모노머는 간혈관육종을 일으키는 주요 발암물질이다.
이러한 고농도 발암물질에 대한 노출로 인해 여수산단 노동자들의 다수가 이상증세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소가 1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이들 중 43%가 가려움·두통·구토 등을 호소했으며, 현재의 작업환경 때문에 병에 걸릴 수 있다고 불안을 호소한 노동자는 전체의 79%에 달했다.
△여수산단 노동자들의 이상증세 ⓒ노동환경건강연구소
LG칼텍스정유노조의 파업, 정말 ‘이기적’이었나?
이날 발표된 결과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은, 이 조사가 LG칼텍스정유노조의 요구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여수산단의 대표적인 사업장인 LG칼텍스정유(현 GS칼텍스정유). 지난 2002년 LG칼텍스정유에서 노동자에 대한 건강검진을 은폐한 사건이 드러난다.
LG칼텍스정유의 2000년 특수건강검진에서 직업병 유소견자인 C1 등급이 상당수가 발견되자, 검진을 담당했던 김 모 교수(68세, 조선대 의과대)가 회사의 압력으로 사표를 내고 C1 판정 노동자 8명이 모두 정상(A)으로 바뀐 것.
노조에 의해 밝혀진 이 ‘김병원 사건’은 지난해 LG칼텍스정유노조의 파업 이유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노조는 사건 이후 회사에 특별보건진단 사업을 요구했고 또한 여기에 참여하게 된다. 노조는 2003년에 유해물질 조사사업을 진행했고, 석유화학산업의 유해성에 대한 구체적 자료들을 확보하게 된다.
이 결과에 따라 LG칼텍스정유 노조는 △희귀병 증가에 대한 연구기금 출연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매출 증가에 따른 투자와 고용 등을 요구하는 파업에 돌입했던 것.
또한 같은 해 LG칼텍스정유노조는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 산하의 여수권공동투쟁본부와 함께 ‘유해물질조사와 중대사고 대응을 위한 노동자사업단’을 발족하고 조사작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이날 발표된 것.
96년부터 ‘죽음의 땅’ 의혹제기.. 노동부는 뒷짐
이번 조사결과는 여수산단 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한 위협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이 위험성에 대한 논란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지난 199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여수산단 주변의 환경오염실태를 발표한 이래, 여수산단은 노동자들에게 ‘죽음의 땅’으로 불리워왔다.
같은해 환노위 국정감사에서 이미경 당시 민주당 의원은 LG칼텍스정유(현 GS칼텍스정유)·LG화학등 5개 사업장의 작업환경 측정에서 비닐클로라이드모노머·벤젠·포름알데히드 등의 발암물질이 누락되고 있다고 밝히고 노동자들이 두통, 헛구역질, 피부염 등에 시달린다며 정확한 특수건강검진 실시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부는 1년 후 ‘여천공단의 근로자에게 작업환경으로 인한 뚜렷한 건강영향은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향후에도 인체에 특별한 건강장해를 유발할 우려는 없’다고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여수산단에 대한 사실상의 면죄부였던 셈이다.
노동부는 또한 여수산단과 관련 ‘건강장해 예방’을 위한 △유해화학물질의 노출농도 파악 △지속적인 저감대책 마련 △직업병 예방 지역감시체계 구축 등의 후속조치를 발표했으나, 각 사업장의 노출농도 파악조차 시도되지 않았으며 ‘직업성질환감시체계’는 별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97년 국정감사에서도 전남대 의과대학의 ‘근로자 특별검진’을 바탕으로 ‘여천공단 근로자들이 암에 걸릴 확률이 다른 지역보다 잠재적으로 높다’는 지적이 나왔으나, 노동부는 “이 검사만으로는 발암성의 확률이 높다고 말할 수 없으며, 단지 조사집단이 비교집단에 비하여 유해인자에 더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답변했다.
노동부의 방관자적 태도로 인해 96년 KIST에 의해 시작된 여수산단 노동자의 유해물질 고폭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점차 사그러든다. 이후 ‘김병원 사건’과 희귀병 증가에 대한 연구기금 출연을 요구하는 LG칼텍스정유의 파업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으나, 노동부는 아직까지도 뒷짐을 지고 있다.
벤젠 등 발암물질, 단시간 노출기준조차 없어
여수산단과 같은 ‘석유화학장치산업’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하루 1시간 미만의 단시간에 유해물질에 고농도로 노출된다.
이를테면 샘플링(벤젠이 제품규격에 맞게 생산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료를 채취하는 과정), 드레이닝(탱크나 용기에 고인 물을 제거하는 과정), 게이징(탱크에 얼마나 저장되었는지 확인하는 과정), 로딩/언로딩(제품을 입출하하는 과정), 정비검사 등 짧은시간이지만 거의 매일 밀폐된 장치를 열어야 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시에는 매우 고농도로 유해물질에 노출되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단시간기준(Short Term Exposure Limit, STEL, 15분 기준)을 제정하여 이러한 작업에서도 노동자들이 과도하게 유해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각 국가별 벤젠, 1,3-BD, VCM에 대한 노출기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아직 한국은 이들 물질에 대해 ‘단시간 노출’에 대한 기준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단시간에 아무리 고농도로 노출이 되어도 8시간 평균 농도만을 측정하고 ‘뚜렷한 건강영향은 없다’고 발표해 온 것이다.
노동부 고시는 톨루엔과 자일렌에 대해 ‘단시간 노출기준’을 150 ppm으로 정해놓았으나, 심각한 발암물질인 벤젠·1,3-부타디엔·비닐클로라이드모노머(VCM)와 같은 물질이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부 고시는 “이 고시에 유해요인의 노출기준이 규정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법, 영, 규칙 및 보건규칙의 적용이 배제되지 아니하며, 이와같은 유해요인의 노출기준은 미국산업위생전문가회의(ACGIH)에서 매년 채택하는 노출기준(TLVs)을 준용한다”고 했는데도 적용해 오지 않았다.
이와 관련, ‘유해물질조사와 중대사고 대응을 위한 노동자 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는 김현열 한국바스프노조 위원장은 “2002년 여수지방노동사무소 근로감독관이 금품을 받고 노동자의 실족 사망사고를 눈감아 준 사건이 있었다”며 “여수산단의 노동자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독자적인 사업을 했던 이유”라고 밝혔다.
여수·울산 등 발암물질·희귀병 증가
1972년 공장들이 입주한 이후 30년 넘게 유해물질을 배출해 온 여수산단. 발암물질이나 희귀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여수산단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지역적으로 봐도 심각한 혈액질환이나 림프종이 90년대 후반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이들 질병이 장기간의 잠복기를 거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여수산단만이 아니다. 울산의 한 정유회사에서는 2,900명의 생산직 중에서 2년간(2002-2003년) 4명이 급성골수성백혈병, 비호즈킨 림프종, 재생불량성빈혈 등으로 산재인정을 받았다. 이들 질병의 발병률을 보면, 벤젠 등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의 경우 10만명당 3명, 비호즈킨 림프종의 경우 10만명당 19명, 그리고 재생불량성빈혈은 10만명당 1명 정도이다.
즉, 여수 울산 대산 등 석유화학장치산업 노동자와 지역민에 대한 장기간의 역학조사와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조사결과는 민주노동당·민주노총이 14일 개최하는 ‘노동과건강포럼2005 두 번째 포럼’을 통해 발표되며, 이 자리에는 한국산업안전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과 노동부 관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또한 이 조사결과에 근거해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은 ▲중요 유해물질에 대한 단기간 노출기준의 제정 ▲석유화학장치 사업장 단기간 노출기준에 근거한 작업환경측정 의무화 ▲단기간 노출기준을 초과하지 않도록 작업현장 개선과 사업 ▲주 의무 이행을 위한 노동부 지도감독 강화 ▲석유화학장치산업 정규직 노동자 및 건설 등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장기적인 역학조사 실시 등을 요구할 계획이다.
문형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