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사망도 살인이다> 연중기획 ④
“노동자 결정권 없는 안전보건은 허구”
산안보건위·명예산안감독관·작업중지권 작동 미비
양대노총, 민주노동당, 노동건강연대, 매일노동뉴스는 “산재사망도 살인이다”라는 슬로건으로 <산재사망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캠페인>을 27일부터 시작한다. 매일노동뉴스는 산재사망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책임 수반과 사회전반의 인식제고를 위해 매월 2회씩 연중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관련기사는 레이버투데이에 마련된 별도의 공동캠페인 게시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편집자주>
“서울대병원은 과태료 400만원을 내시오.”
지난 3월말, 서울대병원은 서울지방노동청으로부터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무려 11개 사항을 지적받았다. 발암물질인 포르말린 작업시 별도의 국소배기장치를 설치토록 하고 있으나 이 병원 병리과에서는 이를 지키지 않았으며 급식과는 식기세척기 소음 감소 조치가 안 돼 지난해 소음성난청 직업병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뿐이 아니다. 서울대병원은 1,0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분기별로 의무적으로 구성토록 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열지 않아 매 분기당 100만원씩 모두 4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받았다. 산업안전보건위는 대표적인 산업안전보건 분야의 노동자 참여구조로서, 이것이 무시당했을 때 어떤 결과들이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노동자 결정권(참여구조) 없는 안전보건은 허구란 지적이 높다.
산업안전 노동자 참여구조 무엇이 있나
현재 산업안전보건 분야의 노동자 참여구조는 어떻게 마련돼 있을까.
현행법(산업안전보건법)상 구성돼 있는 참여구조는, 산업안전보건위(제19조), 명예산업안전감독관(제61조), 작업중지권(제26조)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산업안전보건위는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위험 또는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한 계획 및 대책 등을 노사가 심의·의결하는 기구다.
상시노동자 100인 이상 사업장은 산업안전보건위를 두어야 하며 유해·위험업종은 50인 이상 100인 미만 사업장이 해당된다. 건설업의 경우 공사금액이 120억원(토목공사법 해당 공사는 150억원) 이상 사업장이 그 대상. 그러나 100인 이상 사업장은 산업안전보건위를 의무적으로 운영해야 하며 1,000인 이하는 노사협의회로 대체할 수 있다. 분기별로 열어야 하며 노사 대표는 각 9인 이내에서 동수로 구성된다.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는 지난 95년도 도입됐다. 이 제도는 현행 근로감도관제도의 문제점에서 출발했다. 사업장을 맡고 있는 산업안전감독관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 24일 현재 각 지방청별 산업안전감독관수는 정원 325명(현원 306명)으로 1인당 담당 사업장수가 3,198곳(정원 기준), 담당노동자수가 3만2,225명에 이른다.
이 같은 현실이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를 도입하게 된 배경. 제조업, 운수·창고·통신업, 광업은 100인 이상, 건설업은 공사대금 100억원 이상, 기타산업은 500인 이상 사업이 그 대상이다. 노조와 회사, 노동·사용자·전문가단체 등에서 추천한 자를 노동부 장관이 위촉하게 되는 것이다.
정부의 산업안전감독에 대한 행정역량의 한계에 따라 노사 자율에 의한 산재예방제도의 일환으로 태동된 것이다. 95년 도입 당시 2,159명으로 출발해 2005년 3월 현재 4,137명(사업장내 3,975명, 사업장외 162명)이다.
현행법상 사업주는 산재발생의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나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즉시 작업을 중지시키도록 하고 있으며, 노동자는 산재발생의 급박한 위험시 작업을 중지시키고 대피할 수 있으며 사용자는 합리적인 근거에 의거해 이에 대해 해고나 불리한 처우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것이 작업중지권이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나 문제는 현실이다. 현재 노동자 참여구조가 존재하나 현실에선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높다.
“산업안전보건위의 경우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확연히 다르다. 일부 대기업과 달린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산업안전보건위를 구성하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제조업체 노조 산안담당자들의 ‘이구동성’ 지적이다.
금속노조 인천지부 김종호 산안부장은 “인천지역의 경우 대우종합기계, 대우차, 케이엠아이(옛 고려) 등 대기업이나 오랜 노조 경험이 있는 사업장은 산업안전보건위가 실질적으로 열리는 편이지만 중소기업의 경우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박세민 금속산업연맹 산안국장도 “회사의 법위반시 산업안전보건위를 통해 노사 합의안이 나오더라도 실제 이행이 잘 되지 않는 편”이라며 “대공장은 상근자가 있어서 합의사항을 강제할 수 있으나 중소기업은 협의조차 제대로 안 된다”고 밝혔다.
사실 1,000인이상 사업장인 서울대병원도 산업안전보건위가 의무적으로 열려야 하나 노조의 끊임없는 요구에도 병원쪽이 유야무야 미뤄 1년이나 열리지 못한 사례다. 그만큼 회사(병원)쪽이 기피하면 산업안전보건위조차도 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사실 산업안전보건위만 제대로 열렸어도 산안법 위반으로 11개 사항이나 지적당하는 일은 없었겠지. 모두가 산업안전보건위에서 노동자대표가 제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병원의 경우 비제조업이란 측면에서 산안문제가 덜 주목을 받는데, 실제 훨씬 심각하다.” 서울대병원지부노조 김혜정 정책부장의 지적이다.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 역할 어려워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도 현실에선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사업장 안과 밖에서 모두 4천여명의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을 위촉했지만 실제 이들이 현장에서 일하기엔 제약이 많다.
“저도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이지만 실제 제가 사업장 내에서 산업안전예방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사업장 안과 밖의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은 권한이 다르다. 게다가 사업장 내 소속이라 하더라도 노조의 힘이 받쳐주지 않으면 제 권한을 발휘할 수 없다.”
한 노동단체의 간부이자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이기도 한 이의 고백이다.
그는 “전임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도 매우 크다. 산업안전보건 활동과 시간을 보장해줘야 하지만 현실성이 없다. 현장에서 산업안전보건 감시활동을 하는 이들이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이지만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아 사업주와 싸우지 못한다”고 전했다. 이같이 독립성이 보장되지 못하면서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은 회사에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쉽지 않고 회사의 기밀보호의 측면에서 투쟁에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반면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이 제대로 일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여주는 예가 박태순 대열보일러노조 위원장(안산명예산업안전감독관협의회 의장)<인터뷰 참조> 사례이기도 하다. 올해 초 우리사회에 충격을 던져주었던 이주노동자 노말헥산 집단중독 사실을 밝혀낸 이가 박 위원장이다. 그는 명예산업안전감독관으로 수개월 안산지역 사업장을 쫓아다녀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
작업중지권은 어떤가. 이것 역시 현장의 힘이 있어야 제대로 작동되나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이다. 조성애 건강한노동세상 정책실장은 “노조가 작업중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도 회사에서 그로 인해 손실을 입었다고 판단했을 때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묻기 때문에 쉽지 않다.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강력하게 이를 뒷받침해줄 노조가 없는 한 작업중지권 발동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경영계 ‘적극적 안전보건 대응지침’ 내놔
“안전보건관리자의 임면은 사용자의 독자적인 인사권에 해당하므로 노동조합이 관여할 사항이 아님을 주지시킨다.”
“1,000인 미만 사업장은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지 않고 노사협의회로 갈음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이 올해 산업안전보건 단체협약지침으로 내놓은 것이다. 올해 들어 경영계가 더욱 공세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경총은 이밖에 이 지침을 통해 △명예산업안전감독관으로 임명돼 활동하는 노조전임자에 대해서는 그 활동에 따른 실비나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 근로자위원이 노조전임자인 경우 별도의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의 작업중지권 및 그 활동에 대해 법률이 보장하는 수준을 넘는 권한보장 요구는 허용하지 않는다 △사용자는 작업중지권 오용 또는 남용으로 회사의 손실이 발생했을 경우 손해배상 청구 및 징계권 행사를 적절히 활용한다 등의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경총은 이와 관련해 “노동계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해에 대한 노동조합의 참여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 같은 노조의 요구사항을 임단협과 연계해 지속적, 조직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며 “개별기업들은 임단협을 통해 경영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 절실하다”고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지난달 15일 경제5단체는 정부에 “건강진단시 근로자대표 입회조항(산업안전보건법 제43조)을 폐지해 달라”고 규제완화를 요구했다. 건강진단시 근로자대표 입회조항 역시 노동자 참여구조 하나로 경영계가 이를 제한하려는 요구라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계의 우려를 사고 있다. 사용자가 산업안전보건의 노동자 결정권을 상당부분 제약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조성애 정책실장은 “경영계는 일부 산업안전보건활동을 잘 하는 대기업을 겨냥해 ‘노동자 권한이 커졌다’면서 노동자 참여권에 대한 전면적 대응을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 참여구조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산업안전보건 분야에서 노동자 참여구조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대표적인 사례 하나. 인천의 발전소 주물을 제작하는 (주)하이메트의 한 하청노동자가 지난 10일 시설물에 압사당하는 중대재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정규직노조인 금속노조 하이메트지회가 직접 특별교섭에 나서고 지역 노동·사회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산업안전개선 방안과 유족보상 등을 약속받았다. 자칫 비정규직이어서 소외당할 수 있는 문제였으나 원-하청 노동자가 산업안전 문제에 적극 대응해 성과를 얻은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이 과정에서 기존의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이 사실상 회사쪽 추천자가 위촉돼 왔던 것에 대해 노조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며 노조쪽 추천자로 바꿀 것을 요구, 결국 관철시켜냈다. 적극적으로 노조의 참여권을 확보한 것이다.
조성애 정책실장은 “너무 멀리 있는 법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노조의 조직력이 중요하다”며 “이어 정부가 세게 사업주를 규제하는 것이 뒤따라야 노조의 참여권도 보장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지적들을 노조 산안담당자들은 인정한다. 특히 노조가 산업안전 활동을 임단협 때만 ‘반짝’하는 것이 아닌 조합원의 목소리가 수렴되는 일상적 활동으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은기 민주노총 노동안전부장은 “산업안전보건위가 자칫 어용화되면 ‘직권중재’에 이를 수 있다”며 “현장의 요구를 수용해 사쪽에 적극 개선 요구를 하도록 노조가 뒷받침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현재의 산업안전보건위가 간부 중심이라며 현장 노동자의 참여구조를 만들어내도록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활동시간 확보 △업무권한 확대 △노사 의식제고 △업종별로 세분화된 교육 △대상 사업장 범위 확대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정부의 산업안전감독관이 보다 증원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이 유명무실한 상태에서 정부의 보다 강화된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 실제 노동부는 올해 5개년 계획으로 현 정원의 2배인 총 650명 확보를 행자부에 요청해 놓은 상태다.
또한 알 권리의 보장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은 “영세사업장, 비정규직은 더욱 산업안전보건 문제에서 소외당하고 알권리도 박탈당하고 있다”며 “유해물질 사용 작업에 주로 이들이 투입되지만 이들은 자기방어권이 없다”며 ‘알 권리 보장’을 강조했다.
연윤정 기자 yon@labor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