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광양 비정규직 ‘백혈병 공포’
용접·배관 일용직 잇단 발병…“특수 건강검진 받은적 없다”
정대하 기자
▲ 전남 광양제철소에서 비정규직 용접공으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박동규씨의 부인이 21일 근로복지공단 여수지사 앞에서 업무상 재해 인정을 촉구하며 사흘째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여수건설노조 제공
유해물질을 많이 다루는 전남 여수와 광양산업단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잇따라 급성 백혈병에 걸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달리 특수검진을 받지 못하는 등 산업안전보건법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광양제철소에서 일용직으로 용접 일을 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지난 3월 숨진 박동규(50)씨 유족들은 21일 근로복지공단에 “유해물질에 노출돼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다”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달라고 촉구했다. 박씨는 1983년부터 하청회사를 옮겨가며 광양제철소 안 현장에서 용접공으로 근무하다 지난 2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판정받고 한달여 만인 3월17일 숨졌다. 박씨의 아내 김아무개(48·경북 칠곡군)씨는 “남편이 건설 현장의 분진 등에 섞인 화학물질 때문에 발병했다”며 5월31일 업무상 재해 신청을 냈다.
근로복지공단 여수지사는 “박씨가 일하던 광양제철소 현장의 역학조사를 하기 위해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의뢰했다”며 “박씨의 발병 원인이 유해물질 인자와 연관돼 있는지에 대한 소견 결과가 나와야 업무 연관성 여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최용환(31·여수시 오촌동)씨도 최근 “여수산단 등지에서 건설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유해물질에 노출돼 백혈병에 걸렸다”며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해 달라고 근로복지공단에 신청서를 냈다.
1995년부터 여수산단 등지에서 용접·배관공으로 일해온 최씨는 5월21일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최씨는 “여수산단 안 공장의 배관을 철거할 때면 정규직 노동자들은 슬며시 현장을 떠날 정도로 잔류 유해물질이 많이 날린다”며 “10년 동안 하청회사를 옮겨 다니면서도 단 한차례도 특수검진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95년 이후 여수산단과 광양산단에서 백혈병에 걸려 숨진 노동자는 13명이며,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번이 처음이다.
산업안전보건법(42, 43조)상 분진·소음 사업장이나 벤젠·톨루엔 등 특수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는 특수건강검진을 받게 돼 있지만, 원청이나 하청회사 모두 검진비 부담을 우려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특수건강검진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 문길주 노동안전보건부장은 21일 “산업단지 옥외 사업장에서도 유해물질 농도 등의 작업환경을 측정하도록 돼 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이 때문에 옥외 사업장에서 주로 일하는 여수·광양산단의 건설 일용직 노동자 1만여명이 백혈병 등 직업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고상백 연세대 원주의대 교수(산업의학과)는 “산단 건설 일용직들이 정규직 노동자보다 유해물질에 훨씬 더 노출돼 위험하지만 근무기간이 짧아 특수검진에서 배제돼 있다”며 “용접·배관·화학 등 업종별로 나누어 비정규직도 특수건강검진을 받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는 이날 근로복지공단 여수지사 앞에서 박씨 등의 백혈병 산재 승인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기사등록 : 2005-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