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취약계층 보호 노사정 머리 맞대야”

[한겨레 2005-11-13 20: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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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노동재해 왕국’의 오명을 벗는 길은 없을까? 노동계와 사용자단체, 정부를 대표한 좌담 참석자들은,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이 노사 공통의 이해라는 인식을 함께 했다. 노동재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등에 대해선 엇갈리기도 했지만, △변화하는 산업·고용구조에 걸맞은 법·제도의 마련이 시급하며 △노사가 노동재해 감소를 위한 실질적 논의에 나서야 한다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박두용 교수= ‘노동재해 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우리나라 노동재해의 실상에 대해 어떻게 보나?

정영숙 한국노총 산업환경연구소장=올해 초 351개 단위노조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였더니, 신고된 ‘산업재해’보다 5~12배에 이르는 노동재해가 ‘산재’가 아닌 ‘공상’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실제 노동재해 규모는 발표되는 것보다 최소 4~5배 이상 되는 셈이다.

김정태 경총 상무=우리나라는 아직도 제조업과 건설업의 비중이 크고, 중소기업 대부분은 근로환경이 취약한 노동집약적 제조업체다. 산재도 이들 부문에서 많이 생긴다.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산재사고의 상당수는 근로자와 기업 모두 안전의식이 미흡한 데서 비롯된다. 비정규직과 외국인 근로자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재해를 많이 당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산재인정률이 높은 나라도 없다. 미국, 일본, 독일 등지에선 근골격계질환과 암 등은 산재로 인정받기가 매우 어렵다. 노동재해 발표보다 4∼5배 많아

송영중 국장=‘노동재해 왕국’이라고까지 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지만, 통계상의 여러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산재 사망은 선진국에 견줘 확실히 많다. 산재에 따른 경제적 손실도 2004년 기준으로 14조3천억원으로, 노사분규에 따른 생산차질 1조7천억원의 8배다. 심각한 수준이다. 산재 인정 범위는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산재보험이 아닌 건강보험으로 처리해야 할 부분도 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낮아 산재로 처리돼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고 본다. 박=산재 인정기준이 나라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국제통계에서 산재 사망률이 우리나라보다 높은 곳은 없다. 또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제조·건설업이 20%, 서비스업이 70%로 이미 미국과 비슷하다. 제조업에 고위험 업종이 많기는 하지만, 노동재해가 많은 이유를 산업구조 때문으로 봐선 안 된다. 송=우리나라의 경우, 산업구조에선 재해다발업종인 제조업이나 건설업의 비중이 다른 나라보다 높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속에서 많은 위험들이 중소기업으로 이전되고 있다. 정부도 그동안 산업안전보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사용자도 안전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근로자들도 자기 건강이나 신체는 자기 스스로 책임진다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 노사정 모두 책임이 있다.

정=노동강도는 갈수록 세지고 있지만 산업안전보건법을 제대로 지키는 사업장은 몇 곳이나 되나? 노동자도 자기 몸을 지키고 싶지만, 사업주가 주문하는 노동량을 거부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재해를 입고 있다. 노동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데도 정부가 안전 관련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큰 문제다.

박=어처구니 없는 노동재해가 반복되는 것은 안전에 대한 책임과 권리가 없는 탓이다. 노동재해가 줄지 않는 것은 낡은 법과 행정체계로는 문제를 풀 수 없음을 뜻한다.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이나 외국인 노동자로 위험이 전가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안전보건 공공인프라는 거의 없다. 정부의 대책이나 대안은 없는가?

송=재해다발 부문인 소규모 사업장에 우선적으로 힘을 쏟고 있다. 법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단순한 계도로 풀려고 하니 시정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점차 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 감독권 발동을 강화할 계획이다.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이 만들어진 뒤 손질을 별로 못했다. 그동안 상황은 바뀌었다. 21세기에 맞는 제도를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중대사고엔 책임을 지는 관행이 정립돼야 한다. 현재 다수의 중소기업은 산재가 늘건 줄건 보험료의 경감이 없다. 사고가 나면 경제적인 불이익을 주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중복규제는 문제다. 안전보건과 관련된 정부 부처는 5개, 산하기관은 11개, 법령은 18개나 된다. 사전규제도 많아, 기업의 비용 부담이 상당히 크다. 사전규제는 지양하고 선진국처럼 사후규제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교육도 중요하다. 재해 예방에는 노사가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양대 노총 차원에서도 재해를 줄이는 예방활동을 강화했으면 한다. 산재 관련법 위반 처벌 솜방망이

정=이미 노동안전보건과 관련된 규제가 완화되고 있는데, 규제를 더 푼다면 노동재해 예방은 더욱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2003년에 산재 관련 법규를 위반해 검찰에 송치된 5천여건 가운데 구속은 3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전규제를 풀고 사후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정부도 탁상 행정이 아닌 노동안전보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사정의 실질적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가 노동계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산재예방기금을 운영하는 등의 방식은 고쳐야 한다.

송=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산업안전보건 문제를 풀어 보자는 점에는 공감한다. 산재통계 개선방안도 노사정이 합의해서 발표했다. 현재 노사정이 참여하는 팀을 만들어 산재예방교육 개선방안도 만들고 있다.

김=노사정의 진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경영계는 물론 노조도 상급단체 차원에서 재해예방 문제를 중요 이슈로 다뤄야 한다. 그래야 지금처럼 관 주도 방식을 개선할 수 있다. 노사정위원회가 오랫동안 운영되어 왔지만, 노동계도 산업안전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다.

박=노사정 공동 논의의 장을 실질화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 법과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노동보건안전의 큰 방향을 노사가 결정해야 한다. 다른 노사문제와 달리 노동재해 문제는 상대적으로 노사 간 협의가 잘 이뤄질 수 있는 부분이다. 단 중소규모,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경우 노조를 통한 참여가 어렵다. 소외된 노동자의 뜻이 반영될 수 있으려면, 법적으로 강제된 기업단위의 산업안전보건위원회와 같은 노사참여기구가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정=예방과 관련해서 노사 공동으로 논의하면 좋은 의견들이 나올 것으로 본다. 협의기구가 있으면 좋겠다.

송=노사 문제엔 이해가 대립되는 것과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산업안전은 노사가 공통의 이해를 갖는 부문이라고 본다. 산업안전 패러다임과 법, 제도, 의식을 바꿔야 한다. 지금처럼 정부와 전문가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기업 안에서 노사가 산업안전문제를 활발하게 논의해야 한다. 정부는 작은 사업이든 큰 사업이든 노사협력·노사참여적 산업안전 정책을 펴나가려 한다.

박=비정규직, 영세사업장, 외국인 노동자 등 안전 취약 계층에 대한 대책을 논의해 보자. 이들 안전 취약 계층에 위험이 전가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이들을 위한 공공의 지원과 인프라도 강화돼야 한다.

정=특수고용직 노동자 등에 대해 꼭 산재보험이 적용돼야 한다. 정부는 더욱 강력한 행정지도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근로감독관들은 안전과 보건에 전문성이 없다. 오히려 현장 노동자들이 감독관을 가르쳐야 할 정도다 안전 취약계층 공공지원 강화돼야

김=산업안전감독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데 동의한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감독관의 숫자도 많고 전문성이 높아 기업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중소기업, 비정규직,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책임은 정부, 대기업에 같이 있다. 기업은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과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송=‘위험 전가’를 차단하는 게 바람직한지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아웃소싱 자체를 금지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지 의문이다. 때문에 (위험 전가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기업의 역할도 크다. 산재 관련 법은 대부분 정규직 보호 위주로 만들어져 있다. 안전교육만 해도, 기업들이 비정규직 근로자들에게는 기업 내 위험요인을 충분히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서 여러 문제점이 발생한다. 근로감독관들의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기술적 전문성이 다소 부족한 점은 인정한다. 앞으로는 기술직 감독관을 늘려 개선하려 한다. 정리=양상우 조기원 기자 y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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