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여수로 내려간 것이 2001년의 일이다. 화학섬유연맹 광주전남본부와 함께 여수산단의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운영실태를 조사하고 활성화방안을 마련하는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내가 존경하는 한 동지로부터 “너 여수에 왜 내려가니?”라는 말을 들었다. 여수 같은 곳에 왜 내려가냐는, 다시 말해서 ‘생각 없는’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더냐는 질문이었다. 광주지역의 다른 동지들로부터도 비슷한 얘기를 들어왔던 터라 그냥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집회의 맨 뒷자락에 앉아 새로 산 골프채 얘기를 하는 나이 지긋한 노동자들을 보며 나 역시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나는 그 때까지는 여수의 노동자들을 보수언론보다도 못한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여수의 노동자들을 그 때까지는 만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2002년 봄, 엘지정유의 13대 집행부 명예산업안전감독관과 산안부장이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 다녀갔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다. 이 때만 해도 엘지정유와 특별한 관계가 되리라는 생각은 못해봤다. 광주 김병원의 엘지정유 특수건강검진 조작사건 때문에 작업환경과 조합원의 건강에 대해 제대로 평가해 볼 수 있는 곳을 찾던 노동조합이 우리 연구소를 알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나는 엘지정유 특별보건진단팀에서 관리진단을 맡게 된다. 관리진단이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현장의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환경과 건강에 대한 생각과 실제로 관리되고 있는 내용을 비교하여, 그 차이를 좁혀주기 위한 것으로 기획하였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안전보건 관리시스템 내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 때문에 엘지정유 모든 팀을 방문해서 현장 토론을 벌일 수 있었고, 이 때에서야 막연한 여수산단의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여수에서 살고, 여수에서 일하는 구체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2004년, 엘지정유의 파업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엘지정유 노동조합이 민주화학섬유연맹 여수권공동투쟁본부(이하 공투본)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 때문이기도 하고, 엘지정유 지도부의 건강함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엘지정유의 파업을 공투본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엘지정유는 임금도 그 무엇도 아닌 공투본의 공동요구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동요구안이라는 것이 엘지정유 노동조합을 정치적으로 희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엘지정유 노동자들은 공동요구안을 정말로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공투본의 공동요구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여수산단에는 민주노총 소속 화학사업장이 18개 있다. 이 사업장들은 여수권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여 매년 임단협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공동투쟁의 수준은 낮은 편이었으며, 공동의 요구를 쟁취한 경험도 많지 않았다. 2004년 여수공투본을 준비하는 과정의 가장 큰 고민은 공동투쟁의 실질적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2004년 2월. 여수공투본 대표자 회의에서는 공동투쟁 요구안에 대략 “주 5일제 주 40시간,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차별철폐, 지역발전기금 출연(0.01 %), 임금”을 다루기로 했다. 그리고 “2003년 임.단협때 산단 사용자들의 담합된 패턴교섭에 대해 공투본의 단결된 힘과 투쟁으로 대응하고 지역 주민들과의 우호적 관계개선을 목표로 공동요구안을 연맹에 위임하는 것을 결의하고 집행세부사항으로 단위노동조합의 의결기구인 대의원 대회를 3월말 내에 개최하여 결의하였다. 단, 임금부문도 포함할지의 여부도 함께 대의원대회에 안건으로 상정하여 논의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5월까지, 엘지정유, 바스프, YNCC, 금호피앤비, 화인케미칼, 삼남석유, 폴리미래, KRCC, 호성케맥스, 송원물류 등에서 대의원 대회를 통해 공동요구안을 연맹에 교섭위임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5월 10일 여수시청 앞에서 공동투쟁 요구에 대한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하지만, 이 때까지도 지역발전기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상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였다. 다만, 2004년 2월부터 공투본 대표자들은 여수의 유해한 화학물질과 폭발사고를 공부하였으며,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고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 역시, 석유화학사업장 주변은 개발이 안되고, 일자리가 없으며, 환경이 파괴되는 공통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미국 석유화학원자력노동조합에서 ‘노동자이웃연대’라는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지역의 환경문제를 풀어나가고 더 나아가 지역사회를 개혁하게 되었던 모델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머리로만 아는 것이라면, 별 의미 없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여수산단 공투본은 “유해물질 조사와 중대사고 대응을 위한 노동자 사업단”을 구성하기로 결의하고, 각 사업장 별로 대의원 대회를 개최해 안건에 붙였다. 그리고 조합원 1인당 15000원씩 부담하는 방식으로 사업단을 구성하게 된다. 행동이 시작된 것이다.

비정규직의 문제에 있어서도 다른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수산단의 폭발사고에 의해 죽는 노동자는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발암물질을 더 많이 마시는 것도 비정규직이다. 하지만 예전 여수산단의 모습은 폭발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으면 문을 꽁꽁 닫아걸고 쉬쉬하는 역할을 노동조합이 나서서 해왔다. 그리고 2004년 엘지화학에서 또다시 비정규직의 사망사고가 발생하였다. 엘지화학 노동조합은 즉각 성명서를 발표했고, 불법 사내하청에 의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그 책임이 원청 엘지화학에 있다는 것도 분명하게 밝혔다.

지역 주민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미안함은 연대의 출발이었다. IMF 때도 삐까번쩍한 사택에서 심야에 조명 켜놓고 테니스를 치면서 희희낙락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공장에서 월급 받으며 지역 환경을 파괴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죽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을 하는 노동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2004년 7월 20일. 화학섬유연맹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경희대에서 나는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800명 엘지정유 노동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현장에서 파란 작업복에 안전모를 쓰던 모습과 전혀 다른 눈빛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개투쟁 과정에서 회사측으로부터 미행당하며, 노모를 통해 회유당하며 엘지정유 노동자들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내심 속으로 묻지 않았을까, 20일간의 산개투쟁 동안? 정말로 우리는 왜 싸우는 것일까, 옳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겠는가? 산개투쟁의 마지막 즈음에 만난 한 대의원은 파업 전보다 더 분명하게 지역발전기금과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상은 언론이 고임금 노동자의 투쟁이라고 비난했던 엘지정유 파업의 과정이다. 과정 자체가 순박하기 그지 없는, 그냥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해야될 도리를 하기 위해 진행되었을 뿐이다. 고임금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며 욕하는 신문을 펼 때마다, 나는 고임금 노동자이면서 지역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내 문제로 받아들인 엘지정유 동지들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엘지정유 동지들은 현장으로 복귀했다. 8월 9일, 복귀를 선언하며 엘지정유 정문 앞에 모인 동지들을 만났다. 그들의 눈은 더 맑아졌으며, 더 당당해져 있었다. 현장 복귀는 백기를 든 것이 아니라, 튼튼해진 조직력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교섭을 진행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집회에서 여수건설노조 위원장은 분명하게 밝혔다. “엘지정유 조합원 동지여러분, 당신들의 투쟁은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지역발전기금이나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주장을 조금 더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내가 만난 여수시민들은 이렇게 얘기했다. “30년간 나 몰라라 하던 놈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지역문제를 고민한다면 믿을 수 있겠소?” 그렇다. 못믿고 의심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유해물질 조사와 중대사고 대응을 위한 노동자 사업단’ 8월 모임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공유하고, 내년까지 우리가 여수산단의 환경문제를 조사해서 보다 구체적인 연대를 여수시민들에게 제안하자고 결의했다.

아, 나는 여수에 간다. 그 동네는 선한 눈빛이 넘쳐나며, 돈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제대로 된 노동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여수공투본 대표자 동지들, 함께 하는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동지들, 모든 조합원 동지들, 그리고 내가 끔찍이도 사랑하는 엘지정유의 동지들. “여수에 뭐하러 가니?”라는 2001년의 질문에 머뭇거렸던 나를 용서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