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장내 성희롱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동안 직장내 성희롱이 고용상의 성차별 문제로 접근돼 오면서,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 예방과 규제를 명시해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해결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보인다. 직장내 성희롱 피해 실태는 높게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 신고된 사건 외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와중에서 성희롱 후유증 등 피해는 노동환경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개인에게 환원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다양한 해결 노력과 규제 방안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보고, 여기서는 ‘직장내 성희롱으로 인한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중요한 문제로 삼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성희롱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우선적으로’ 비난하는 성문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그 해결이 어려울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를 입기 쉽다. 직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발생한 사고인데도 이를 단지 남녀관계로 보는(보려 하는)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에 의해, 피해자가 개인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거나 수치스럽게 여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런 현실 아래, 직장내 성희롱 피해가 신체적 외상 이외에도 우울증, 불면증, 스트레스 등의 후유증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들 문제는 피해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보복성 인사조치를 받는 등 ‘은폐’되고 ‘축소’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직장내 성희롱 피해는 여성노동자가 안전한 노동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한 점,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 피해자가 노동을 지속하지 못하게 되어 노동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협한다는 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직장내 성희롱 피해는 노동 조건의 문제로 일종의 ‘산업재해’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산업재해’란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근로자의 부상․질병․신체장해 또는 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직장내 성희롱은 “업무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근로자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부상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조순경, 1999:6).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내 성희롱을 일반적인 산업재해로 인식하고 다루지 못해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직장내 성희롱을 산업재해로 인식하고 피해를 드러낼 수 있는 조건을 살펴보려 한다. 직장내 성희롱이 어떠한 근거로 산업재해에 해당하는지 봄으로써 성차별적 노동현실의 피해를 ‘노동재해’로 보게 되며, 이는 남성중심적 노동현실에서 이제껏 드러나지 않았던 ‘성별화되어 있는 부적절한 노동환경에서 발생한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산업재해로서의 직장내 성희롱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는 산업재해를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근로자의 부상, 질병, 신체장해 또는 사망”(제4조 1항)으로 정의하며, 크게 ‘업무상 사고’와 ‘업무상 질병’으로 구분하고 있다. ‘산업재해’는 말 그대로 업무와 관련하여 다치거나 질병으로 이환된 모든 경우에 해당하지만, 실제로 산업재해 보상을 받는 경우는 매우 적은 수에 그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산업재해를 판단할 때 중요하게 제시되는 점은 1) “업무상 사유”에 의한 것인가와 2) 상병과 사고 사이의 “상당 인과 관계”가 성립하는가이다. 직장내 성희롱이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한다면, 충분히 산업재해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1) ‘업무상 사유’의 판단: ‘직장내’ 성희롱

현행법에서 ‘업무상 재해’ 개념을 “업무상 사유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는 있으나, 이를 구체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산업재해의 여부는 산업재해가 발생한 상황이나 맥락을 통해 결정된다. 말 그대로 직장내 성희롱은 ‘직장’이라는 특수한 공간, 즉 고용환경 안에서 발생한 사고라는 점에서 업무상 사유에 의한 사고로 볼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법적으로 ‘업무상 사유’와 ‘업무관련성’이 다소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직장내 성희롱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종종 ‘업무와 관련성을 갖는가’(업무관련성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여기서 말하는 ‘업무관련성’이란 통상 ‘사무 집행에 관한 것’과 같은 의미로, 외형적인 사무집행 행위뿐만 아니라 근무시간 외의 공식적인 회식, 야유회 등 사업주의 관리가 영향을 미치는 것까지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업무관련성에 대한 법원의 해석 태도는 지난 롯데 호텔 성희롱 사건의 판결(회식자리에서의 성희롱)에서 보듯이, 점차 그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회식 자리 외에도 이후의 2차, 3차의 회식자리 등에서 직장 내의 지위나 관계를 이용하여 직장내 성희롱이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을 고려할 때, 업무관련성은 직장내 성희롱 사건이 발생되는 성별위계적 구조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판단될 필요가 있다. 직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상관없이, 그리고 근무시간외에도 직장 내의 위계적 관계에 기반해서 일어나는 성희롱은 그 사건 자체가 직장을 매개로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업무관련성에 대한 판단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여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한다면, 업무상 사유에 의한 사고로서 직장내 성희롱의 산업재해에 대한 판단도 확대될 수 있다.

2) 상당 인과 관계: 직장내 성희롱 피해에 대한 인식

업무상의 사유로 근로자가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이 생겼을 때,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산재근로자가 이러한 상병이 업무와 관련돼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법적으로 업무와 재해로 인한 상병 사이에 일정한 인과 관계가 있음을 충족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상당 인과 관계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상당 인과 관계’란 “경험칙상 그러한 결과에 상당한 조건만이 원인이 된다”는 것으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 데에 불가결의 조건이 되었던 것 가운데서 “상당”한 조건만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인터넷 법률용어 사전). 여기서 상당한 조건을 판단하는 별도의 구체적인 기준은 없으며, 다만 판례에 의하면 “의학이나 자연과학 등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아도 가능하며, 재해가 발생된 상황을 고려하거나 직접적인 증거가 없을 경우, 경험칙상 합리적 설명이 가능한 추론에 의해서도 가능하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당 인과 관계를 판단하는 기준인 ‘경험칙상 일반적인 합리성’이 과연 노동현실에 기반하여 얼마나 합리적으로 판단되고 있는가는 제고할 필요가 있다. 산업재해 판단에서의 일반적인 합리성은 그간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도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근골격계 질환은 산업재해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심각한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려워 1990년대 초반까지 직업병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여성의 경우, 가사노동에 의한 것이거나 평소 생활습관, 고령화 등에 따른 퇴행성 질환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근로복지공단에 문의한 내용 2003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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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산업재해 여부를 심사하는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의 협소한 해석 태도도 문제이다. 1차적으로 산업재해 심사와 판정을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또는 공단)은 업무와 상병간의 인과관계를 협소하게 보는 편이어서, “B형 간염에 걸릴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는 근로자가 아니면 간경화, 간암으로 악화돼도 자연적으로 악화된 것으로 판단해 산업재해를 인정해 주지 않고 있다” “심층취재/’과로성 재해’가 늘고 있다”, 『조선일보』 2002년 10월 11일.
. 그나마 법원은 최근 직장내 집단 따돌림을 당해 생긴 우울증(서울행법 2000구34224), 상사의 질책에 따른 정신적 충격 등으로 정신과적 질환 발병(서울행법 판결 99구21543 선고)에 대해 인과관계를 인정하여 산업재해로 판정하는 등 보다 폭넓게 해석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경험칙상’에 의한 기준이더라도 판단 주체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는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산업재해에서 상당 인과 관계를 판단할 때, 판단 주체는 신체적 증상으로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질환에 대해서도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의 업무 수행의 특성과 노동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여 폭넓게 이해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직장내 성희롱에 의한 피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직장내 성희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불안, 두려움, 공포, 분노, 신경증, 우울증, 자존감(self-respect)의 손상, 대인 기피증 등으로 다양하며(Paludi, 1996; 김양희, 1995; 장필화, 1994, 천대윤, 1999), 때에 따라서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희롱 과정에서 다치는 경우 외에도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증상은 심각한데, 각 여성단체의 성희롱 상담 사례들 중에는 “25인 이상 사업체에 다니는 여성으로 회사 야유회에서 상사에 의한 신체적 성희롱을 당한 충격으로 가해자를 보면 불안 증세를 보이고 경기를 일으킨다”, “상습적인 성희롱으로 인해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인용한 사례들은 한국여성민우회, 평등의 전화의 2000년, 2001년, 2002년 직장내 성희롱 상담사례와 상담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상담사례가 비공개인 점을 감안하여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고 부분적으로 성희롱에 의한 증상을 호소하고 있는 경우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 이러한 모습은 억압된 분노가 외부로 폭발하거나 내부로 향하여 파괴적으로 나타나는 성폭력 피해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설명된다(김정규, 1998:334).
이외에도 지속적인 성희롱으로 인해 무력감, 상실감, 나아가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을 경험하게 되고 자신을 무기력한 존재로 느끼게 되는 피해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명명하거나, 위장장애, 두통, 치통, 목이나 등의 통증 등의 신체화 장애를 ‘성희롱 증후군(sexual harassment syndrome)’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학적, 심리학적인 설명은 성희롱 피해를 인식하게 하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이는 산업재해에서 인과관계를 설명하는데도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산재보상 여부를 판단할 때 상병과의 인과관계는 의사의 소견, 자문 등 의료진에 의한 “의학적 공증”을 통해 입증하기 때문이다. 직장내 성희롱에 의한 산재보상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유도 바로 “의학적 공증이 안 돼서 객관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피해를 입증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재해로 다치거나 질병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성희롱에 대해서 드러나는 질병이나 그런 것에 관한 인식이 부족하여 산업재해를 판정하는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성희롱 피해가 대부분 정신적이고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거나, 피해 정황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의학적 소견 외에 사실관계나 피해자의 개인적 특성 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이해가 산업재해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들(전문가, 자문단 등)에게 전제돼야 한다.

3. ‘굴뚝재해’ 중심으로 유지되는 산업재해의 성편향

직장내 성희롱은 “타인에게 재정적, 정신적, 사회적 안정과 정신건강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상해를 입히는 문제”(O’Donohue, 1997:2)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산업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고용관계 안에서 해결하려는 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 관련법의 적용을 받는 경우는 극히 소수(2000년 ‘부산 새마을 금고 사건’ 단 한 건)에 불과할 정도로 노동재해로서 인식해오지는 못했다.
이는 외국에서 직장내 성희롱 및 직장내 성폭력 등을 산업재해 예방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만하다. EU, 미국 등 서구에서는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중요한 문제로 직장내 폭력과 스트레스가 제기되면서 이를 산업재해 예방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EU의 여러 국가(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이탈리아)는 직장내 폭력에 대한 사업주의 예방 및 규제 장치로서 조직, 교육, 후속장치 마련 등의 산업안전 장치를 마련하고 있고 European Agency for Safety and Health at Work(2002b), “Issue 7: Prevention of work-related accidents: a different strategy in a changing world of work?, European Conference and Closing Event of the European Week for Safety and Health at Work 2001”, FORUM(7), p.7, http://agency.osha.eu.int/publications/forum/7/en/index.htm,; Health and Safety Executive(1999), Violence at Work: A Guide for Employers, HSE Book UK.
, 미국에서도 산업안전보건위원회(OHSA: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에서 직장내 폭력을 사용자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OSHA; P.L. 101-552, Section 3103, 1990(Hatch-Maillette & Scalora, 2002:279에서 재인용).
. 직장내 폭력에 대해 위팅턴과 와이크(Whittington & Wyke)는 피해 근로자에게 후속적인 카운셀링(상담), 건강을 위한 치료 등이 필요하며, 특히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피해자가 장기적인 도움이 필요로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의료적인 도움, 법적 조언, 소송, 산재보상, 카운셀링, 동료들의 지원 프로그램과 같은 실질적인 권리 구제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Whittington, R. & Wykes, T.(1992), “Staff Strain and Social Support in a Psychiatric Hospital Following Assault by a Patient”, Journal of Advances Nursing, 17, pp.480-486(Wigmore, 1995:339에서 재인용).
. 실제로 미국 연방정부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성희롱 문제로 치른 경제적 비용인 2억 6천 7백만불 중에서 약 10분의 1인 2천 6백만불이 성희롱 이후의 정신적 심리적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한 비율(병가 등 포함)로 보고된 바 있다 Ellen Bravo and Ellen Cassedy(1992), 9 to 5 Guide to Combatting Sexual Harassment, New York, John Wiley and Sons, pp.49-50(조순경, 1999:1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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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행 산업재해 관련법은 산업화 시점인 1960년대에 만들어진 것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어, 그 이후에 변화된 산업구조나 노동조건 등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1963년에 제정, 1964년에 적용된 우리나라 산재보상법은 당시 건설․제조업의 2차 산업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되기 시작하면서 소위 ‘굴뚝 산업’에서 발생한 사고나 질병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제도화할 필요성에서 생겨났다. 초기에 산재보상법이 500인 이상의 광업과 제조업 분야에만 우선적으로 적용했던 사실은 이 법의 취지와 목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주로 굴뚝 산업 위주의 산업재해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산업재해는 실상 노동자에게 ‘가시적이고 심각한 사고/질병(신체적 절단, 손상, 진폐증 등)’이라는 최협의의 개념으로 인식돼왔다 산재문제 및 노동 상담을 해온 노동조합 상근활동가와의 인터뷰. 2003년 9월 19일. 이와 함께 형광석(1992)이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바에 의하면, 산재보상보험법과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해 35.3%가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고, 비교적 알고 있는 경우는 16.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산업재해 관련법에 대한 인식이 낮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기업의 산재처리방식에도 영향을 미쳐, 산업재해가 발생하더라도 노동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 공상(公傷)으로 처리하게 된다(형광석, 1992:5).
. 고용구조 및 산업형태의 변화로 사고성 재해 외에 사회심리적 요인에 의한 증상이 점차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산업재해를 ‘굴뚝재해’ 중심으로 인식하는 보수적인 태도가 지배적이다. 통계상으로 볼 때 산업재해는 대규모 사업장, 제조업의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부상이나 외상과 같은 사고성 재해가 주류를 이룬다(정진주, 1999; 김인숙 외, 2000; 김영미, 2002).
더욱이 성별에 따른 산재노동자의 비율은 남성 대 여성이 9:1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노동부,『여성과 취업』(1999, 2000), 노동부, 『산업안전국자료』(한국여성개발원, http://kwdi.re.kr
에서 재인용).
, 산업재해에 내재한 성편향을 지적할 수 있다(마경희, 2003:52-56). 이러한 성편향은 지금까지 간과돼 왔는데, 단순하위 사무직․판매․서비스직에 집중되어 있는 여성의 경우 성별 권력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기 쉽지만, 작업도구 중심의 물리적 환경요인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산업재해 범위에서는 직장내 성희롱과 같은 인간관계에 의한 폭력을 산업재해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4. 여성의 경험을 반영한 실질적인 ‘산업안전’ 개념으로

산업재해와 그로 인한 고통은 신체적, 정신적 건강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노동생산성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노동자의 안전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된다(Hatch-Maillette & Scalora, 2002:287). 산업안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산업재해로 인한 막대한 손실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기업과 정부가 이를 중요한 문제로 보고 실질적인 예방조치를 실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 작업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성의 발견과 그 개선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안전․보건진단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산업안전 개념은 굴뚝 산업의 작업장을 반영한 물리적 기준에 대한 조사와 평가를 위주로 하고 있는 제조업 중심의 사고 속에서 나온 개념이다(한국산업안전공단, 2003). 물론 산업안전보건법의 사업주의 의무 조항(5조)에 “적절한 작업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근로자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고, 근로자의 생명보전과 안전 및 보건을 유지․증진하도록 해야 한다”고 정신적 스트레스 예방에 관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 적절한 조치 및 관리 내용이 없기 때문에 예방의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개념으로 볼 때, 여성노동자는 성폭력, 성희롱의 위험에 노출되어 산업재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인이 간과됨으로써 ‘산업안전’의 테두리에서 제외되고 있다(한국산업안전공단, 2003). 제조업 중심의 2차 산업의 작업환경을 기준으로 한 산업안전의 개념으로는 대다수 서비스업 여성노동자의 비가시적인 불이익이나 위험을 작업환경의 예방조치 내용 안에 적절하게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여성노동자가 안전한 환경 속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매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재해와 산업안전에 대한 관심이 특정 산업(제조업)을 위주로 강조됨으로 인해 산업재해가 많이 드러나지 않은(산재통계화되어 있지 않은) 직종은 관심 ‘밖’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또한 전통적인 산업재해 관련 정책에서 성별이 적절히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별에 대한 정책적인 고려가 간과되고 있다 European Agency for Safety and Health at Work(2002b), “Issue 7: Prevention of work-related accidents: a different strategy in a changing world of work?, European Conference and Closing Event of the European Week for Safety and Health at Work 2001”, FORUM(7), pp.5-6, http://agency.osha.eu.int/publications/forum/7/en/index.htm,
. 이 둘이 맞물려 관심 밖의 영역에 있는 여성노동자가 더 안전하다는 통념을 강화․재생산하기 때문에 성별화된 작업환경과 위험요인에 대한 문제 자체를 차단하게 된다. 이는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산업안전 정책이 성편향적으로 작동하여 여성노동자의 재해를 예방하기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여 문제를 지속시키는 실질적인 차별에 해당한다.
따라서 여성이 안전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산업안전의 개념이 여성의 경험에 기반하여 확장․재구성되어야 한다. 기존의 내용이 여성의 노동현실과 경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음으로 인해 실질적인 차별 효과를 낳았다면, 이러한 결과는 충분히 수정돼야 한다. 산업안전 개념에 여성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정착된 차별 효과를 낳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교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평등을 실현하는 개념상의 적극적 조치로 인식될 수 있다 적극적 조치는 여성을 포함한 소수 집단의 실질적인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조치로서, 성차별이 관행으로 내려오면서 사회 구조적으로 정착된 차별에 대해 적극적으로 교정함으로써 과거차별의 구제효과와 결과적인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제도이다(김경희,2000:106-107).
. 산업안전에서의 적극적 조치는 직장내 성희롱과 같이 그 동안 여성노동자에게 감추어진 문제를 드러내고 숨어있는 원인을 찾을 때까지 안전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밀턴(Alice Hamilton)의 연구는 보이지 않는 여성의 산업안전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여성이 남성보다 납중독에 더 많이 걸린다는 결과를 생물학적 차이로만 설명해왔던 기존 연구의 통념을 해밀턴은 자료를 재분석하여 여성이 낮은 임금을 받는 열악한 위치와 위험노출과 상관성을 밝힘으로써 사회경제적 지위가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Mergler, 1995:248).
. 여성의 경험이 반영된 산업안전의 적극적 조치라는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산업재해로서 직장내 성희롱의 실질적인 예방은 가능할 것이다.

5. ‘산업재해’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을 기대하며

그동안 여성 관련 산업재해 연구는 선행연구의 부족으로 인해 ‘위험’이 알려지지 않고, 그로 인해 연구의 필요성이 인식되지 못하여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범주에 대해 새롭게 산업재해로 인정하기 어려운 악순환이 반복돼왔다. 즉, 여성이 종사하는 대다수의 직종에서 여성이 겪는 산업재해의 위험이 드러나지 않음으로 인해, 마치 ‘여성의 일은 안전한(women’s work is safe)’ 것처럼 인식돼왔다. 결국 여성이 노동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사전에 차단되어 산업보건(occupational health)에서의 새로운 문제, 특히 여성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따라서 산업재해와 산업안전의 영역에서 기존의 범위를 넘어서는 작업은 여성노동자의 건강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노동현실이 점차 2차산업 중심에서 3차산업의 확대로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가 일하는 작업환경에서의 위험이 단지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수단만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관계적인 요인일 수 있다는 인식이 실질적으로 법과 제도의 적용 상에서도 이뤄져야 한다. 여기에 남성중심적 현실로 인해 여성노동자에게 처한 위험과 건강상의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와 남성중심적 성문화는 여전히 ‘폭력’을 ‘희롱’ 쯤으로 해석함으로써 여성의 문제를 더더욱 사(私)소화하거나 부차적인 영역으로 남겨둬 왔다.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노동자의 건강문제 가운데 직장내 성희롱은 바로 그러한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을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일 뿐이며, 앞으로 이에 대한 여성주의의 개입과 실천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산업안전’과 ‘산업재해’라는 의미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을 통해 여성노동자의 건강권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집단적인 산재보상 요구와 같은 법적 소송 등의 운동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