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을 버리고

노동안전보건대표자 제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들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대부분 감은 잡는 듯한 눈치다. 뻔하지 않은가? 아니 뻔하지 않겠는가? 노동계나 경영계의 반응이 대개 이렇다. 이렇다보니 이 제도가 제대로 받아들여지기는커녕 논의조차 잘 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노동안전보건대표자 제도는 현장에서 노동안전보건문제를 발굴하고 제기하고 해결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작업장의 최소단위(대개 10~20명 정도의 공정단위)마다 노동자 대표를 선출하도록 하고, 회사는 선출된 대표가 일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시간과 비용 등)을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시간과 비용은 무제한은 아니고, 추후 많은 논의와 협의 그리고 합의가 필요하겠지만 우선 유럽의 여러 나라를 기준으로 보면 대개 일주일에 4시간정도의 활동시간을 법으로 보장한다. 비용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정은 없다. 기타의 지원사항에 대해서도 별도의 법적 규정은 없다. 대개 세부적인 사항은 사업장의 규모와 특성에 따라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정한다. 노사의 협의기구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이며, 노측대표는 노동안전보건대표자들 중에서 구성한다.

것 봐, 뻔하지

일단 여기까지만 보면 노동자 측에서 보면 꽤 괜찮은 제도요, 사용자 측에서 보면 꽤 괜찮지 않은 제도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따져볼 것도 없이 대개 찬반의견이 정해진다. 이쯤에서 더 이상 이 제도의 취지나 내용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 죽어라고 밀어붙이거나 죽어라고 반대하는 수밖에.

어? 이게 아닌데

노동안전보건대표자 제도는 기존의 노사관계의 틀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아니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노동자안전보건대표자 제도는 (1) 안전보건에 대해서는 협조적 (참여적) 노사관계를 전제로 하며, (2) 산업안전보건문제를 노동조합 차원의 단체협상과 분리하자는 것이며, (3) 노동자에게 권한도 부여하지만 동시에 이행책임도 주자는 것이다. 어라? 어째 얘기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지 않는가?

20명마다 한명?, 2만명이면 대표자만 1,000명?

경영계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안전보건대표자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노조대의원이 많은데 각 공정마다 안전보건대표자를 두라고 하는 것은 기업경영에 엄청난 부담을 가져올 것이므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0명 정도마다 안전보건대표자를 선출한다면 현장노동자가 20,000명의 경우 안전보건대표자만 1,000명이 된다. 안전관리자나 보건관리자 한두 명을 채용하는 것도 큰 부담이 되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좀 황당해 보이지 않은가? 언뜻 보기에 그런 것 같다. 황당하지는 않더라도 확실히 많은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 거다. 혹시 QC분임조라고 들어보거나 경험해 본 바가 있는가?

QC분임조

최근 들어 업종을 불문하고 품질관리는 기업의 사활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품질이 중요해지면서 한두 사람의 전문가가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1년에 한두 번 품질검사를 한다고 해서 품질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품질관리의 핵심은 현장에서 모든 사람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자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조직, 그것이 QC분임조이다. 사업장에서 품질을 관리하기 위해 QC분임조를 몇 개나 두는가? 또한 품질조장은 몇 명이나 두는가? 일반적으로 QC품질분임조는 10명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현장노동자가 20,000명이라면 분임조대표는 2,000명이 된다. QC분임조와 안전보건대표자 제도는 기본적으로 같은 원리이다.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해나가는 기본 원리도 똑 같다.

안전보건대표자 제도는 변형된 노조전임자 제도?

경영계에서 우려하는 두 번째 문제는 노조전임자 임금지급문제와 맞물려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1997년 3월 13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을 개정하면서 노조전임자는 임금을 받아서는 아니 되며(제24조제2항) 노조전임자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행위는 부당노동행위로 규정(제81조)한 바 있다. 동법부칙에서 이 조항들은 2001년 12월 31일까지 유예한 바 있으며 2001년 2월 9일 노사정위원회에서 다시 2006년 12월 31일까지 유예하기로 합의하여 현재 2006년 12월 31일까지 이 조항들은 유예되어 있다. 따라서 안전보건대표자 제도를 도입하여 유급의 활동시간을 보장하면 노조전임자가 안전보건대표자로 활동하면서 실제로는 유급의 노조전임자 활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러한 우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우려가 되는 사업장이 몇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노조전임자 임금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풀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우려나 부작용은 별론으로 하고 다른 여러 각도에서 노동안전보건대표자 제도를 좀 더 살펴보자.

노동안전보건문제의 노사관계

노사관계는 협력적인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해관계가 충돌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교섭이나 협상은 거시적인 것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임금이나 노동조건은 산별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기업별 노조정책을 고수해 온 우리나라는 거시적인 정치적 문제부터 현장의 안전보건문제까지 많은 노사문제는 모두 기업별 노동조합의 몫이 되어 왔다. 산별노조체제가 발달되어 왔다면 임금협상이나 노동조건에 대한 교섭의 상당부분은 산별노조에 맡김으로써 기업단위의 노동조합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기업별 노조는 개별 기업의 상황에 따라 개별 기업내 복지 등 비교적 협조적인 관계에서 문제를 풀 수 있는 그야말로 노사협의회 차원에서 노사협의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조합이 대기업 위주의 전투적 노조가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산별노조를 억압한 노동정책에 있다고 할 것이다. 노동안전보건문제는 이와 반대되는 차원 즉,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적절한 노사협의기구가 없기 때문에 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떠 넘겨진다. 노동조합은 현장의 관리문제부터 정치적인 투쟁까지 모든 부담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통제와 억압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임금협상이나 기본적인 복지문제에 대한 단체협상을 제대로 체결하는 것도 힘겨운 것이 현실이다.

노동안전보건은 노사관계의 4차 차원에서 가장 낮은 차원, 즉 작업현장에서 항상 제기되고 해결해야 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노동안전보건문제는 노사자치(自治)에 기반을 노사의 자율적 협상보다는 객관적이고 엄격한 기준에 의해 사업주가 강행적으로 지켜야 하는 공적 기준에 가깝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자율적 의지에 따라 조합을 결성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고(단결권), 교섭을 요구할 수 있고(단체교섭권), 파업과 같은 실력을 행사하는(단체행동권) 권리는 헌법에서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노동조합을 결성해야 한다는 것을 법적으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사가 협의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거나 적어도 노사협의를 강제하는 것이 노사는 물론 국가적으로 바람직한 경우 노사협의를 법적으로 강제화한다. 노사협의회나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바로 그러한 예에 해당된다. 따라서 노사협의회는 ‘근로자참여와 증진에 관한 법’에 의해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노동조합의 유무와 관계없이 설치하고 운영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억압적 노동통제정책 기조를 유지해 온 우리나라에서 노사문제나 노동정책은 곧 노동조합과 노사관계조정의 문제로 귀결되어 왔기 때문에 노사협의회나 산업안전보건위원회 같은 강행적 노사협의 및 노사공동결정과 같은 노동정책문제는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대립적 노동정책의 종속변수로만 취급되어 왔다. 특히 산업안전보건위원회와 같은 노동안전보건문제를 현장에서 다룰 기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노동안전보건문제에 대한 노사협상이 단체협상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노사협의가 끝나는 시점과 시작되는 시점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의 일차적인 목표는 단체협약의 체결에 있다. 단협이 체결되면 그 이행은 주로 사업주의 몫이다. 노동조합은 단협의 이행여부에 대한 감시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안전보건문제는 노사공동결정이 이루어지는 시점이 곧 실행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다. 작업장의 유해․위험관리는 시설개선이나 적절한 보호장비의 보급 등 사업주의 기본적인 안전조치에 대한 의무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현장의 노동자가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하는 부분도 매우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사공동결정은 노사공동책임과 직결되는 문제로 이어진다.

노동안전보건의 분리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하면서 노동자계급이 등장하였고,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의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법제도가 도입되었는데 공통적인 법제도를 크게 보면 노동법과 보험제도이다. 노동법은 노동보호법률과 계약보호법률로 구분하는데 노동보호법률은 절대적 가치를 기준으로 계약의 내용에 상관없이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저기준을 공법적으로 설정하는 것에 해당되고 계약보호법률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이 계약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단결권과 단체교섭 그리고 단체행동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률을 말한다. 노동안전보건과 최저임금제와 같이 주로 개별적 노사관계에 대한 강행적 기준은 노동보호법률에 해당되며, 흔히 말하는 노동법(노조법 등)은 계약보호법률로 이해하면 큰 무리가 없다. 노동보호법률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산업안전보건법이다. 안전보건은 노사가 적당히 계약을 통해 조절이나 침해를 용인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정한 안전이나 환경기준을 초과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공법적(公法的) 기준이다. 즉, 노사협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사업주는 사전에 법으로 정한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노동자는 이 법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노동법과 달리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안전보건조치를 위반한 사업주는 국가에 의한 형벌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노동안전보건이 일반적인 노동행정과 완전히 분리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와 논리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노동안전보건문제는 현장에서 항상 진행되는 노사문제의 최일선이다. 따라서 노사의 참여와 개입 없이는 효과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따라서 산업안전보건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는 노사참여, 특히 노사참여의 기제(제도)가 된다.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노동안전보건대표자 제도인 셈이다.

선진국에서의 노동안전보건대표제도

유럽연합의 모든 회원국가는 유럽연합(EU)이 1989년 안전보건에 관한 유럽연합지침(EU Directive 89/391)을 채택하면서 노동안전보건대표자 제도가 도입되었다. 유럽연합에서는 이 지침을 통해 사업주의 의무를 (1)유해․위험요인을 파악(Risk Identification), (2)평가(Risk Evaluation), (3)개선(Control), 그리고 그 사항에 대해 (4)노동자에게 고지(Risk Notification)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사업장에서 이러한 사업주의 의무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노동자에게 다음과 같은 권리를 부여하도록 법적으로 강제하였다. 법적인 강제사항은 (1)노동자가 안전보건에 대해 의문사항을 언제나 협의․자문을 구할 수 있도록 할 것(Workers’ Consultation), (2)노동자가 스스로 대처가 가능하도록 교육․훈련을 제공할 것(Workers’ Training), (3)노동자가 참여를 보장할 것(Workers’ Participation), (4)단위공정마다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는 안전보건대표자를 두도록 할 것(Workers’ Safety Representative) 등이다.

유럽연합에서 4R(RI, RE, RC, RN)과 4W(WC, WT, WP, WR)의 체계를 위험성평가제도라고 한다. 위험성평가의 의무는 사업주에게 부과되지만 실제 위험성 평가는 각 공정마다 현장에서 노동안전보건대표자를 중심으로 노동자가 스스로 참가하여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기 사업장에 어떤 유해․위험요인이 있는지 무엇이 가장 위험하고 어떤 것이 덜 위험한지 각각의 위험에 대해 회사는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고 노동자는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과 훈련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며 자연스럽게 노사협의와 공동결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지난 15년간 유럽연합의 많은 국가에서의 경험이다.

노동안전보건대표자 제도를 도입한 국가에서는 대부분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에서 좋은 성과가 있었다는 보고가 많다. 이제 우리도 노동안전보건대표자 제도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늦은 감이 든다. 늦어도 한참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