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진실게임
유재석이 진행하는 ‘진실게임’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진짜’와 ‘진짜 같은 가짜’를 섞어놓고 둘을 구분해서 찾아내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출연자들 대부분은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데 실패하고 만다. 알쏭달쏭 진실게임. 현실과 영화와 책을 통과하면서 우리도 한 번 시작해볼까?
1. 황우석의 줄기세포 논란
2005년 12월 15일. 노성일 이사장의 발언과 PD수첩의 후속 방송으로 황우석 교수를 둘러싼 줄기세포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황우석 교수와 노성일 이사장이 각자 기자회견을 하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하였고, 급기야 서울대에서 조사위가 꾸려져 중간발표를 가졌고, 최종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조사 결과야 더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몇 가지 확실해진 것은 있다. 첫째, 누군가가 전 국민 아니 전 세계를 상대로 초대형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둘째, 황우석 교수가 그 거짓말에 상당 부분 가담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 황우석 교수 연구팀이 체세포줄기세포에 대한 원천기술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과학자로서의 신뢰를 상실했다는 사실.
2. 라이어
이번 황우석 사태를 보면서 주진모, 공형진 주연의 2004년 작 ‘라이어’라는 코믹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 속에서 두 명의 부인을 두고 이중생활을 해오던 택시 운전사 정만철(주진모 역)은, 하나의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이런 거짓말들로 위기를 모면하는가 했으나 거짓말들은 자꾸 늘어나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예전에 영화를 볼 때는 ‘뭐 이런 황당한 시츄에이션? 이게 영화니까 가능하지 현실에서 가능하겠어?’ 하면서 웃어 넘겼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지금까지 어린 꼬마 아이부터 연세 드신 어르신까지 모두 존경해왔던 황우석 교수님이 손수 재연해 보이셨으니, 이 코믹한 상황에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3. 방각본 살인사건
김탁환이 조선 정조 시대에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등의 북학파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꿈과 열정을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연쇄살인을 당한다. 이 사건을 파헤치던 도중 한 명의 소설가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연쇄살인 사건은 계속되고, 조사가 계속되면서 배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배후는 끝내 밝히지 못한다. 정치세력들 간의 이해관계와 정국의 안정이라는 이유로 진실은 어둠 속으로 묻힌다. 이런 상황은 우리 역사와 현실 속에서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소위 ‘깃털’이라는 특수용어(?)는 이런 상황을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최근에도 X파일과 관련해 삼성 관련 몸통들은 무혐의 처분을 받고, 의혹을 폭로한 기자만 애매하게 다치게 생겼는데, 그것 참~
4. 지구를 지켜라
백윤식을 처음으로 배우라고 불리게 만들었던 장준환 감독, 신하균, 백윤식 주연의 2003년도 영화. 개봉당시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기발한 상상력으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처음에 병구(신하균 역)가 강사장(백윤식 역)을 안드로메다 외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관객들은 병구의 망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 강사장이 외계인이고, 영화 속 사건들은 외계인들이 인간을 선하게 만들기 위한 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진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 진실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런 진실 속에서 병구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는가 하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진실에만 얽매여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낭패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5. 혈의 누
‘번지점프를 하다’의 김대승 감독의 2005년도 영화. 피 튀기는 장면이 많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나, 근래에 보기 드문 치밀한 구성의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영화 역시 살인사건을 파헤쳐 가면서 진실을 밝혀나가는 작품으로, 진실을 감추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들을 여과 없이 잘 드러내준다. 특히 섬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집단광기에 사로잡히는지, 그 집단광기 속에서 어떻게 파멸되어 가는지 이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니체라는 철학자는 ‘진리(진실)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진리라고 믿어지는(혹은 믿고 싶어지는) 것을 누가, 왜 추구하느냐 하는 진리의지 혹은 권력의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집단광기는 이런 진리의지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집단광기는 영화 밖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6. 프랑스와 호주의 인종 폭동
개인적으로 대학 시절에 골똘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집단광기에 대한 것이다. 집단광기에 대한 좋은 참고서는 독일의 나치즘이 벌인 유태인 학살이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저런 광기에 사로잡힐 수 있게 된 것일까? 국가에 의해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편향된 정보가 주어지고, 사람들이 세뇌를 당해서 그랬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모자란 구석이 있다. 그 모자란 부분을 무엇으로 설명이 되는가? 최근 프랑스와 호주의 소요 사태는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프랑스는 외부로 밀려난 사람들이, 호주는 사회의 주류 세력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두 사태 모두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인종주의적 차별 때문에 발생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나치즘도 마찬가지로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잠재된 무의식 때문에, 군국주의라는 기름을 부었을 때 활활 타올랐던 것은 아닐까?
7. 우리나라의 열정 혹은 보수적 애국주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뜨겁다.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졌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사상 유래가 없는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다. 2002년 월드컵 때 온 나라가 붉은 물결로 넘쳐흘렀다. 대선 때 국민들의 뜨거운 참여로 노무현의 참여 정부가 탄생했을 때, 옆 나라 일본은 우리나라의 활력을 부러워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국민들의 뜨거움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꿋꿋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그 뜨거움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너무 뜨거우면 자칫 비이성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간격은 백지 한 장 차이 밖에 안 될 수 있다.
8. 존 말코비치 되기
열정이 지나쳐서 비이성으로 흐를 때 사람들은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너는 이쪽 편이냐 아니면 저쪽 편이냐? 편 가르기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져 한쪽으로 기울었을 때, 힘이 약한 저쪽 편에 서게 되면 상당히 피곤해진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선택하기를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획일적이라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다. 참으로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2000년 작 ‘존 말코비치 되기’를 보면, 존 말코비치라는 배우가 자기 머리 속으로 들어가면서 세상이 온통 존 말코비치로만 무한 복제되는 상황이 나온다. 남자건 여자건 모든 사람들이 존 말코비치이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모두 말코비치 밖에 없고, 아무리 매력적인 배우라고 하더라도 그 상황을 가장 못 견뎌하는 것은 존 말코비치 자신이다. 영화 밖에 있는 우리들은 그런 획일성을 참을 수 있겠는가?
9. 다시 황우석의 줄기세포 논란
황우석을 둘러싸고서도 많은 논란이 오갔다. PD 수첩은 진실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진실은 땅 속에 묻힐 뻔했다. 뭔가 수상쩍은 것이 있는데도, 내버려두면 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묻어두고 싶어 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사는 것은 퍽퍽하고, 내 꿈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꿈을 대리만족 시켜주었던 영웅이 그런 식으로 내팽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실보다는 욕망의 힘이 더 강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욕망이 진실을 압도할 때는 조심을 해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게 되면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욕망에만 위태롭게 의존하다가,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허탈감과 분노만이 뒤덮을 수도 있으니까.
0. 진실 게임 속에서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를 둘러싼 진실이 무엇인지 중요하다. 그렇지만, 진실 게임에만 너무 매몰되지 말자. 이번 논란은 진실 너머의 무언가를 우리에게 절실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한 국가뿐 아니라 세계를 들썩거릴 정도로 수업료가 비싸니, 열심히 공부하고 반성하고 바꿔나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