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의 경동빌딩 옥상

광화문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인권전.
57회 세계인권선언일을 기념하여 ‘오늘의 인권전’이 열리고 있었다.
여러 작가들의 사진과 그림들을 스윽 감상하고 있던 차,
내 눈에 불현듯 들어오는 제목, ‘경동빌딩 옥상’

‘아니, 우리건물이랑 이름이 같네?’
호기심에 나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속의 경동빌딩은 전원에 사는 것이 염원이었던 한 노부부가
자신이 사는 건물의 옥상을 마당으로 가꾸어 사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의 시작은 회색 시멘트바닥에서 시작하였다.
부부는 여기에 빨간 고무 다라이를 놓고 흙으로 채웠다.
흙에서는 곧 여러 가지 푸른 것들이 자라난다.
회색투성이 옥상은 어느새 초여름의 햇빛을 받아 파래지고
할머니의 발걸음이 분주해질 때마다
손주와 이웃들의 움직임도 늘어간다.
화단은 점점 무성해져서 사람 키를 훌쩍 넘어서고
늘어선 빨래들 사이로 어느 날 차양막이 쳐지고
동네잔치가 벌어진다.

‘경동빌딩 옥상’ (박용석 / 새사회연대)
전원생활을 하는 것이 염원인 부부가 옥상을 정원으로 꾸몄다.

“경동빌딩에 사는 부부는 마당이 없다.
그래서 옥상을 마당으로 개발한다.
커다란 밭을 만들고 채소와 화초를 가꾸며 이웃을 모아 잔치를 벌인다.
옥상은 마당의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그 구조를 변해간다.
이 다큐멘터리 사진은 전원에 살기를 염원했던 부부가
옥상을 작은 밭으로 가꾸어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이제 옥상은 부부의 방이며 사적인 마당이며 또한 환경이 되었다.”
작가의 메모는 옥상에 담긴 부부의 생활을 간단히 표현하고 있었다.

또 다른 경동빌딩 옥상

한편 노동건강연대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는 또 다른 경동빌딩.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건물인 이 경동빌딩의 옥상의 풍경.
에폭시로 바닥 방수처리를 하고 한쪽에 물탱크가 놓여있는 것이
흔히 보는 건물 옥상의 풍경이다. 옥상 가장자리에서 바라본
성수동 일대의 건물 옥상들 역시 비슷하다.

또 다른 경동빌딩의 옥상.
평범한 옥상이다. 시멘트 바닥과 물탱크.

수지가 개발되기 시작할 때 한 아파트 건설회사에서는 과감한 시도를 계획하였다.
아파트 동중의 하나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작은 공원을 만드는 것이다.
이 계획은 건설회사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고 아파트 한 동을 포기함으로써 발생되는 손실을 생각하면 현실성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분양이 시작되자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이 벌어졌다.
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인근의 아파트 세대의 분양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단가가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아파트 한 동에 해당하는 손실은 공원을 둘러싼 세대들의 분양가에서 모두 되찾고 오히려 아파트의 이미지 상승에 필요한 광고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몇 년 되지 않은 일이지만, 이젠 아파트를 지을 때 중앙에 공원과 광장을 두는 설계는 당연한 것이 되고 있다.

전시회 사진속의 부부가 가꾸던 옥상은 사람이 도시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주변을 변형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식목일이 아니라도 봄만 되면 서울외곽의 원예하우스들은 북새통을 이룬다.
각종 허브에서부터 고추, 깻잎 등의 모종, 철쭉 등의 꽃나무와 사시사철 푸른 잎을 볼 수 있는 관엽식물 등까지.
여름이면 다 말라 죽게 만들면서도 해마다 봄만 되면 화분을 들여놓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설레는 나도 있다.

성수동 경동빌딩의 옥상에서 바라본 인근의 풍경.
풍경이라고 할 것도 없이 건물 투성이의 동네모습이다

결국 손 닿는 곳, 눈길 닿는 곳에 푸릇푸릇한 것을 놓고 키우던가 혹은 구경만이라도 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기본으로 갖고 있는 욕구가 아닌가 싶다. 전원생활을 하는 것이 ‘염원’이라는 부부는 그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옥상을 가꾸고 있고, 옥상이 없는 어떤 사람들은 방 한쪽에 화분이라도 놓고 산다.
그것도 아닌 또 다른 경동빌딩은, 그리고 이 동네 성수동 일대는 그런 노력도 제지된 채로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인권전에서 ‘경동빌딩의 옥상’이 내 눈을 끄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로수하나 없이 담장 넘어 내려오는 개나리 잎사귀하나 구경하기 힘든 회색투성이의 성수동에서 살다가 ‘경동빌딩옥상’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저렇게 살면 좋겠다, 주변에 저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좀더 숨통이 틔게 살 수 있겠다.”는 부러움이었다.
인간이 녹색의 자연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친밀감과 유대감이 결여되지 않고 살 수 있는 권리, 그것도 인권으로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