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까지 거짓말하게 만드는 ‘삼성의 힘'”
[인터뷰] 2년 넘게 삼성과 싸워온 삼성重 하청노동자 서종진 씨

2008-03-07 오후 4:33:49

한 남자가 있었다. 서른세 살 나이로 조선소에 취직해 한 달에 300~400시간을 일하던 그. 유조선을 만들 때 필요한 발판을 만들기 위해 한 장당 무게가 20kg~25kg에 달하는 ‘족장’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맨 몸뚱아리로 끌어올려야 했던 그.

잘 나간다는 삼성중공업이 자신의 일터였지만, 하청 노동자였기에 그 안에서도 온갖 위험한 일은 다 그의 몫이었다. 고된 노동이었지만 잔업이며 특근이며 마다하지 않고 벌어들인 돈은 한 달에 150~200만 원. 그 돈을 손에 쥘 때마다 칠순을 한창 넘긴 부모의 용돈을 줄 수 있다는 데서 낙을 찾았던 그.

그에게 악몽 같은 나날이 시작된 것은 입사 1년 6개월을 넘긴 지난 2005년 10월 12일이었다.

‘일 잘한다’며 노력상 안겨주더니 다쳤다고 ‘나가라’는 회사

삼성중공업 사내하청업체 수압기업에서 일하던 하청노동자 서종진 씨(37)는 약 2년 6개월 전의 그 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524호 여객선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하는 일은 삼성중공업 정규직이 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는 거거든요. 그걸 ‘족장’이라고 하는데, 길이만 3m로 엄청 무거워요. 허리를 구부려서 그걸 끌어올리려고 힘을 주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어요. 그 때 허리가 뜨끔하면서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종진 씨는 바로 병원에 갔다. 회사에서 지정한 정형외과에서는 “일주일 쉬면 낫겠다”고 했다. 몸은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 후 그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한 시간만큼 돈을 받는 하청 노동자가 허리 좀 아프다고 무작정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도 한 뼘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진 것은 사고 두 달이 지난 12월이었다. 당장 아픈 몸보다 “다치면 바로 잘린다더라”는 동료들의 공공연한 얘기가 떠올랐다. 다시 병원에서 2주 진단을 받았다. 병가 신청서를 내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2주 후 돌아 온 곳에서는 “아픈 사람 데리고는 일 못 한다”는 관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크레인에서 떨어지거나 깔려 죽지 않으면 산재처리 해 준 적 없다”

그 날부터 “나가라”는 노골적인 압박이 시작됐다.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필요없다는 확인서를 받아 와야 일 시켜준다”고도 했고, “너 그 몸으로 계속 노가다 하겠냐?”, “탈의실 청소나 해라”는 말도 들었다.

서 씨는 “사고 나기 직전에는 제가 회사에서 주는 노력상도 받았다”며 “일 잘하고 잔업 많이한다고 전체 직원에게 저를 보고 배우라고도 했던 사람들이 다쳤다고 갑자기 그만두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그 때는 너무 답답해 죽음까지 생각했었다고 덧붙였다.

열심히 일했던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니 다친 것도 서러운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산업재해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던 것도 처음에는 반쯤은 억울해서였다. 그런데 회사 과장의 말은 기가 찼다.

“‘그 정도로 무슨 산재냐’고 하더라고요. ‘크레인에서 떨어지거나 깔려 죽거나 뇌사 상태가 되야 산재가 된다’면서. 겨우 허리 아픈 걸로 무슨 산재냐며 그런 관례가 없다고….”

서 씨는 “나중에 알고 보니 요즘에는 엑스레이 찍어서는 잘 모르는 근골격계 질환도 다 산업재해로 인정된다는데 나는 CT촬영하면 눈으로도 보일만큼 디스크가 심각했다”고 덧붙였다.

왜 회사는 산재마저 인정해주지 않았을까? 한 노동문제 전문가의 설명은 이렇다. “산업재해 건이 발생할 경우 원청인 삼성중공업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하청업체들은 산재 처리를 안 해주려고 한다”는 것.

회사에서는 강제사직, 결혼 5개월 만에 떠난 베트남 아내

결국 그는 2006년 2월 사직서를 썼다. 그는 사직서에 “업무상 병가인데도 무단결근 처리하고 현장 관리자에게 작업장 복귀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고 노골적으로 그만둘 것을 요구해 그만 둡니다”라고 썼다.

그만두지 않았더라도 사고 후, 일을 못 하게 하니 월급도 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사고 후 그가 받은 월급은 12월에 58만 원, 1월에는 29만 원이 다였다. 더욱이 치료비도 자비로 부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 씨보다 아내가 “더는 못 버티겠다”고 했다. 사고 한 달 전 어머니의 주선으로 베트남까지 가서 만난 베트남 아내였다. “돈도 돈이었지만 남자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아무 것도 못 해주게 됐다”고 얘기하는 서 씨의 말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원망보다는 미안함이 더 많이 배어나왔다.

결국 사고 이후 4개월 뒤, 결혼 5개월 만에 아내와 이혼을 했다.

“미친 놈” 소리 들으며 ‘나 홀로’ 싸웠던 2년

모든 것을 이미 잃었지만 서 씨는 ‘나 홀로’ 싸움을 시작했다. 해고무효소송도 제기했고 산재 신청도 했다.

해고무효소송은 지난해 6월 1심에서 기각된 이후 넉달 만인 10월,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결정이 나왔다. 대법원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인지대와 우편송달료 20만 원이 없어서 포기했다. 서 씨는 “비록 내가 사직서를 내기는 했지만 강제사직이었다”고 주장했다. “강압에 의한 자백은 법적인 효력도 없다지 않냐”고 덧붙였다.

산재 신청도 쉽지 않았다. 사고 이듬해인 2006년 5월 근로복지공단에서 불승인 결정이 나온 직후,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재심사를 청구했다. 통영지원을 거쳐 부산지사, 서울지사까지 모두 “산재로 인정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가벼운 신경통 수준의 요추 염좌만 인정되고 추간판 탈출증으로 불리는 디스크는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서 씨는 “병원 의사들도 모두 내 MRI 사진을 보곤 ‘이게 디스크가 아니면 뭘 디스크라고 하지’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반박했다. 결국 혼자서 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행정소송에서도 불승인 판결이 나온 것이 지난 2월 29일이었다.

서 씨의 이 같은 사연에 대해 법무법인 산하의 이영기 변호사는 “1년 넘게 하루에도 수백 개에서 수천 개의 족장을 들어 올리는 일을 해 온 것인 만큼 산업재해가 틀림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최근에는 산재 인정 범위가 더 넓어지는 추세”라며 “가벼운 증세만 인정하고 정작 중요한 디스크에 대해 요양 불승인 처분을 한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삼성이 대우조선보단 낫다고요? 천만에!”

서 씨는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기계는 거짓말을 못 하지 않냐”고 말했다. 기계가 보여주는 몸의 병을 법원이 못 보게 한 것은 삼성이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삼성이 같은 거제도에 있는 대우조선보다 그래도 낫지 않냐고요?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삼성엔 노동조합이 없으니 더 엉망이예요. 나 같은 하청 노동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혹은 지나치게 위험한 일을 하더라도 제어해줄 곳이 없습니다.”

하청 노동자에게 회사 간판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만은 서 씨는 “그렇지 않다”고 몇 차례 강조했다. 일하다 생기는 문제나 어려움을 소위 정규직 ‘안전 요원’에게 얘기하면 바로 협력업체 사장이 “왜 골치 아픈 말을 하고 다니냐”고 몰아세우기만 한다. “노동조합이 있는 대우조선은 그래도 하청 노동자 문제에 대해 시늉이라도 한다”고 그는 말했다.

서 씨는 1심 판결에 맞서 다시 법정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한 가지 걱정은 올해 일흔 넷의 어머니다. “적어도 산재만은 되리라 믿고 계셨던 어머니가 1심 판결이 나온 후 내내 울기만 하신다”며 말 끝이 흐려졌다.

성치 않은 몸이지만 책상 앞에 써 붙여 놓은 “정신의 용기는 육체의 힘을 능가한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며 종진 씨는 웃었다.

“하청 노동자 중에 저처럼 한 사람이 없다며 ‘미친 놈’이라고들 하던데 제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똑같이 당하는 일은 없겠지요?”

서 씨의 마지막 말이었다.

여정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