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담보” 각종 화공약품으로 얼룩진 영세 인쇄공장
(CBS연속기획) “영세노동자들 스스로 노동환경 개선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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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 일 15년 경력의 최영현씨가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된 인쇄공장 밀집지역을 안내해주고 있다./ 사진=CBS사회부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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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쇳가루, 기름 마시며 건강돌보기 엄두도 못내
– “15시간 뼈빠지게 일해도 쥐는 것은 쥐꼬리 월급”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최강국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국내 노동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영세업체 노동자들은 아직도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생명마저 위협받고 있다.
CBS 연속기획 ‘우리시대의 전태일, 영세노동자들의 삶과 희망’, 세 번째 시간으로 각종 화공약품으로 얼룩진 영세 인쇄공장의 실태와 함께 영세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환경 개선에 나섰다는 소식을 살펴본다.
인쇄공장 밀집지역 을지로에 영세업체들만 북적대
서울 을지로 일대에는 무려 1만여개의 인쇄업체가 몰려있다. 성수동 지역과 달리 대부분 소규모 영세업체들이다.
CBS 기획취재팀이 찾아간 을지로 인쇄타운에서는 인쇄물을 운반하는 작은 수레가 쉴 새 없이 좁은 길을 비집고 다녔다. 환기시설조차 없는 한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중금속 성분의 잉크와 본드, 벤젠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른다.
여기에 종이가루가 펄펄 날리고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소음으로 머리가 아플 정도다.
노동환경 열악, 직업병으로 고통 호소하는 노동자 많아
취재팀은 인쇄 일 15년 경력의 최영현씨와 함께 을지로 인쇄업체 10여곳을 살펴봤다. 최씨는 “인쇄업의 여러 가지 분야 가운데 특히 옵셋이나 코팅분야 노동자들 대부분이 피부병과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인체에)나쁜 약품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약품에 중독됐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각종 유기용제와 형광물질로 피부와 호흡기, 각막 등 민감한 부위에 병을 얻고 있는 것이다. 암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포름알데히드 등 유독성 연기도 마스크 없이 들이마시고 있다.
최씨는 “심지어 2세가 눈이 실명돼서 태어나도 하늘의 운이겠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어쩌면 약품 영향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해물질의 대물림이 우려되고 있다.
불안정한 노동시간, 사라지지 않은 ‘시다’
출판기획사가 발주하는 시점이 작업에 들어가는 시점이다. 당연히 노동시간이 불규칙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일이 몰릴 때는 12시간 맞교대로 숨돌릴 틈이 없다. 무거운 종이뭉치를 반복해서 나르느라 허리와 어깨 등에 근골격계 질환도 피할 수 없다.
제본소의 경우 가장 소음이 심한 데 작업 효율을 위해 귀마개를 안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작업현장에서는 이마저 지켜지지 않는다.
한 제본소 직원은 “제본소 소음이 가장 큰데다 여러대가 한꺼번에 돌아가면 그 소리가 엄청나다”면서 하지만 “현장에서 소음으로 의사소통이 안되기 때문에 귀마개까지 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된다”고 말한다.
인쇄노조 문종찬 위원장은 “을지로에만 무려 4만명의 인쇄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 사업주는 물론 자치단체나 정부도 이들의 건강과 안전을 나몰라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쇄업체 등 열악한 사업장 중심으로 자발적인 안전활동 진행
▲ 노동자가 주체가 돼 위험한 노동환경을 스스로 개선하자는 도쿄 노동안전위생센터의 ‘포지티브 프로그램’을 한국실정에 맞게 개발한 일본인 스즈키 아키라씨./ 사진=CBS사회부 기획취재팀
열악한 영세사업장 노동환경을 노동자가 스스로 개선해나가는 이른바 ‘참여형 노동안전 활동’이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노동자가 주체가 돼서 위험한 노동환경을 스스로 개선하자는 게 핵심내용이다.
이 활동은 성수동팀장인 일본인 스즈키 아키라씨가 도쿄 노동안전위생센터의 ‘포지티브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국 실정에 맞춰 제안한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이 직접 위험요소를 끄집어내서 토론을 통해 개선책을 마련하자는 것으로, 유해환경의 법 위반 사실만 따지는 기존방식과 큰 차이가 있다.
한국형 ‘포지티브 프로그램’, 노동위험성과 불편사항 꼼꼼히 체크
우선 노동자들이 직접 ‘체크 리스트’를 들고 현장을 찾아 잘된 점과 개선할 점을 꼼꼼하게 찾아낸다.
40여개의 질문 항목이 담긴 체크 리스트는, 예를 들어 “국소 환기장치를 사용한다”는 항목에 대해 ‘필요’, ‘불필요’, ‘시급’으로 나눠 표시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물건 보관이나 운반방식의 간소화, 통행방향 표시, 팔꿈치 높이의 작업대 설치 등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안전조치를 곧바로 마련할 수 있다.
스즈키 아키라씨는 “열악한 노동현장에 대해서는 물론 법대로 대응해야 하지만 법 규정이 없는 부분이나 노사가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면서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어떻게 느끼느냐가 기준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같은 방식은 특히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대다수 영세노동자들의 산업안전을 위한 유력한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지난 90년대에 시작된 이같은 자발적 산업안전 활동은 베트남과 몽골, 파키스탄의 영세사업장에 적용돼 산업재해를 크게 낮추는 성과를 거뒀다.
국내 산업재해의 70%가 발생하는 50인 미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자체적인 안전확보 움직임이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물론 정부나 자치단체, 사업주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전제돼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CBS사회부 정태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