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
또 뭐라고 써야 하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잘린 손가락과 발들을 위로하면 될까
강압으로 목과 허리에서 탈출한 디스크추간판들을 위로하면 될까
모든 부러진 뼈, 찢어진 눈, 터진 머리, 이완된 근육
닳아진 무릎, 손상된 폐를 위무하면 될까
압사, 추락사, 감전사, 질식사, 쇼크사, 심근경색, 유기용제 중독으로
하루에 7명씩 8명씩 일수 붓듯 착실하게 죽어가는
모든 산재 열사들을 추모하면 될까

식당아줌마, 중국집배달부, 퀵서비스, 가정노동
모든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에게도
180만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도
농업노동자들에 불과한 영세농민들에게도
산업폐기물이 된 노령인들에게도
산재보험 적용을 해달라고 간구하면 될까
산재 민간감시원을, 산재요양 기간을, 적용 범위를 좀 더 늘려달라고
산업안전보건법 상 사용자의 의무를 좀 더 늘려달라고
산재 주무 기관을 좀 더 민주화시켜달라고 청원하면 될까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을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
사무직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전문직종사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내 아내에게는 내 아이에게는 산재가 전가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이에는 산재가 없을까
신체가 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잘리는 것만이 산재일까
정신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은 산재가 아닐까

내 모든 시는 실상 산재시다
내가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모든 형태의 산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 세계에 대한 외로움이다
내가 자연을 그리워할 때 그것은
모든 자연스러움과 조화로움으로부터 쫓겨나
기계가 되고 싶지 않다는 항변이다

보라. 저 거리에 나온 모든 상품들도
불구의 몸으로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거리에 선 모든 나무들도
팔다리 잘리며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들녘 강물의 모든 실핏줄들도
검은 가래에 막혀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하늘 위에서 내리는 모든 눈도 비도
산성에 물들어 있고, 보라.
저 하늘의 오존층도 우리의 폐처럼
숭숭 구멍 뚫리고 있다

이 모든 산재에 보상하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이 모든 산재를 지속가능한 상태로 되돌리라고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누구에게. 저 자본에게
우리의 잘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아
닳아진 무릎뼈와 폐혈관과 혼미해진 정신들을 모아
배부른 저 자본에게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이윤이 중심이 아니라 건강과 안전과 평화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가장 악독한 산재인 이 눈먼 자본주의를 추방해야 한다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인 착취와 소외의 세계화를 막아야 한다
모든 사랑스런 관계들을 파탄으로 내모는 이 불안정한 세계를 근절해야 한다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자본주의를 추방하지 않고
산업재해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이렇게 간단한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겪고 있는
가장 엄중한 산재는 이것이 아닐까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들

지난 금요일. ‘차별 없는 서울 행진단’이 기륭전자 앞에서 집회를 한다 해서 잠깐 들렸다가 00형을 만났다. 오십 하나. 대학 중퇴 후 노동운동하겠다고 나섰다가 평생 마찌고바(영세소공장)와 건설일용노동 일을 하며 사는 형이다.

처음엔 못 알아보고 옆 사람과만 인사를 했다. 힐끗 쳐다보는데 자세히 보니 00형이었다. 못 알아 볼 수밖에 없는 게 얼굴이 뇌수술 받아야 할 사람 모양으로 심하게 부어 있었다. 시민선전용 부채 모양 선전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도 잘 몰라 본 거였다.

“아니, 형 이게 웬일이에요.”

일용으로 용접일 나가 일하는데 육중한 철구조물인 주차 파렛트가 덥쳐 왔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 주차 파렛트가 무너지는 것은 처음 봤다고 한다. 다른 것 무너져 오는 것은 많이 봤다는 이야기니 좋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코뼈만 주저앉았다고 한다. 못 피했으면 압사다. 내일 수술인데 좀이 쑤셔 나왔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지체를 가진 아이를 숙명처럼 키우며 평생이 고생인 형이다. 운동이 뭐라고 좀 쉬시지, 라는 말이 입 밖까지 나왔다가 들어갔다. 그 마음을 어떻게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인가.

다행히 산재 처리는 받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하면 큰일인데도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만 건네고 덤덤히 앉아 함께 집회를 보았다. 십수년을 보아도 별 달라지지도 않는데 그렇게 우리는 똑같은 자리에 앉아 집회를 본다. 도처에 고난뿐인 사람들로 둘러싸여 사는 삶인지라 웬만한 아픔에는 심드렁해지기도 한다. 죽지 않았어. 그러면 됐어. 하기도 한다. 또 죽었데. 왜 죽었데. 그냥 살지. 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감성마저 메말라져 버리고 말았을까.

다음날 토요일.

한 선배의 권유로 산악회 모임엘 처음으로 따라갔다. 치악산이었다.

산 입구부터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스물 초입부터 서른 초입까지 용접일과 배관일을 하며 두 무릎과 허리가 다 망가져 있었다. 산소통과 알곤통과 LPG통과 오비끼(목재의 한 단위로 건설현장에서 쓰인다)와 파이프관과 앵글더미와 철근더미와 7인치 그라인더와 함마드릴과 너무 친하게 지냈던 결과였다. 잔업철야를 너무 좋아했던 까닭이다. 야리끼리(공사현장 은어로 단축공정을 일컫는다)를 너무 좋아했던 까닭이다. 종일 허리 한번 펴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 용접불빛만 쫒던 결과다. 작년 초 두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다 숙원이었던 무릎 관절 수술을 받던 어머니 병상 곁을 지키며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겉은 말짱한 청년인데 근육과 관절은 노쇠해 버린 내 청춘이 서글펐다.

예상한 대로 1시간 걷고 나니 오른쪽 무릎이 뻐근해져오기 시작했다. 내색할 수 없는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산도 관계도 모두 아득히 멀어져 갔다. 빨리 평지가 나왔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푸르고 튼튼하게 서 있는 나무가 부러웠고, 초록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뭇잎새들이 부러웠다.

과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산재를 겪다보면 나뭇가지 하나도 함부로 부러뜨리고 싶지 않다. 간혹 그럴 때면 나무에게 미안해진다. 그들에겐 인재가 산재일 터다. 맑은 시냇물을 흐트려놓고는 미안해서 빨리 정화되기를 소망해 본다. 못 하나를 박을 때도 정확히 가격해서 몇 번에 박아주고 싶다. 너무 많이 아프지 않게. 철근 하나도 한 곳만을 너무 많이 사용해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이 세상 자본가들은 같은 인간마저 그런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다. 같은 돈 주고 사서도 오히려 기계는 무척이나 아끼지만 인간은 마모될 때까지 쓰고 싶어 한다. 안전을 위한 조치보다는 피치 못하게 책임져야 할 산재가 일어나면 그때 보상이나 해주고 끝나길 원한다. 그것이 일상적인 안전유지 비용보다 훨씬 덜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색을 낸다. 그렇게 생산된 모든 가치가 사유화된다. 모든 걸 가지면서 그들이 지는 책임은 불과 일부분이다. 국회의원들은 그런 조삼모사의 산재보상법을 만들며 생색을 낸다. 똑같은 강도, 도둑놈들이다.

보라.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재 아닌 것이 있는지. 모든 실업도 산재다. 모든 파탄난 사랑의 많은 부분도 산재다. 가정불화의 대부분도 산재다. 독거노인도 거개가 산재다. 모든 교통사고의 주요인도 산업 재해다. 모든 생태위기도 뿌리는 산재다. 모두 무한정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폐해다.

우리는 그럼에도 아주 작은 것들만을 요구한다. 명백한 산재에 대해서라도 최소한의 책임을 다해 주기를. 누구라도 명백한 산재에 대해서는 보상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조금은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금은 더 안전하게 착취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아주 소박한 요구를 한다. 그 소박한 부탁마저 번번히 배신당하고 말지만 말이다.

오늘이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이란다. 삼가는 마음을 보낸다. 그런데, 세계 자본주의 추모의 날은 언제나 오는 것일까. 그런 날도 빨리 와서 시 한 편 써보면 참 좋겠다.

송경동/시인